지난 주말 지스타보다 두 달 먼저 부산에 가서 부산국제영화제 취재를 하고 왔다. 게임 기반 영화인 <8번 출구>를 10월 개봉 전에 미리 보고 싶기도 했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매기 강 감독, 상상력의 벽을 허물어준 <판의 미로>, <블레이드 2>, <헬보이> 등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델 토로, <부산행>, <지옥> 등으로 익숙한 연상호 감독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과 드라마, 영화는 담긴 틀은 다르지만 콘텐츠를 ‘창작’한다는 측면에서 공유하고 있는 정서가 많다. (여전히 장르의 익숙함에 기대어 빈약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게임도 많지만) 특히 최근 들어 PC 콘솔 게임 개발 트렌드가 강화되면서 ‘내러티브’와 ‘세계관’의 중요성이 더 대두된 것도 한몫을 하고 있다. <P의 거짓>,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게임에 우리가 극찬을 할 때도 “극장 영화 같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가.
한편으론 참 얄궂은 현실이지만, 게임 업계의 (이제는 꽤나 오래된) 화두 중 하나는, 게임의 경쟁 대상이 다른 게임이 아닌 넷플릭스나 유튜브, 인스타, 틱톡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정된 시간과 여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을 두고 경쟁을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크다.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카카오톡 대형 업데이트와도 무관하지 않다. 각자 ‘우리’ 플랫폼, ‘우리’ 콘텐츠에 머물렀으면 하는 심리다.
그런데 과연 이 씬은 그렇게 다른 플랫폼에게 경쟁의 가시를 세우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을까. 개인적으론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는 측면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9월 17일부터 오늘(26일)까지 진행된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을 기념하며, 영상 콘텐츠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뤄보려 한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매기 강 감독도 직접 만나고 왔고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연상호 감독도 만나고 왔다.
▲ 그리고 화제의 <8번 출구> 실사 영화까지 기사로 전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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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오피스를 씹어먹은 마리오, 소닉, 마인크래프트
게임 기반 영화가 흥행하기 어렵다거나 작품성이 아쉽다던 것도 옛말이 되어버렸다.(물론, 과거엔 그런 때가 있긴 했다) 한 번 두 번이면 ‘운’이라 생각하겠지만 반복되면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크리스 프랫이 마리오를 잭 블랙이 쿠파를 연기한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2023년), 키아누 리브스가 ‘섀도우’를 연기하며 엄청난 호평을 이끌어낸 영화 <수퍼 소닉 3>(2024년), 예고편에선 “이게 맞나?”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결국 박스오피스를 또 한 번 씹어먹은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년)까지(재밌게도 여기서도 잭 블랙이 큰 활약을 했다) 정말 “역사적인” 성적을 거뒀다.
▲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영화 <수퍼 소닉 3>
▲ 영화 <마인크래프트 무비>
마블, 디즈니가 주춤하고 있는 동안 단순히 빈집털이를 했다는 개념이 아니다. 유명한 감독들도 쉽사리 거두지 못하는 글로벌 흥행 성적을 기록한 배경엔, ‘게임에서 인터랙티브하게 경험했던 세계’를 색다르게 즐기는 ‘또 다른 체험 방식’으로 인식하는 맥락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에 박차를 가하는 게임사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당장 9월 12일 닌텐도 다이렉트만 봐도, <슈퍼 마리오> 시리즈 40주년에 가장 큰 소식 중 하나로 꺼낸 카드가, 게임과 영화의 연계 출시를 노린 영화 <슈퍼 마리오 갤럭시>(2026년 개봉 예정, 앞서 전 세계에서 흥행한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후속작) 공개 아니었던가.
▲ 다시 돌아오는 <슈퍼 마리오 갤럭시> 게임 시리즈, 그리고 영화도 같은 이름으로 비슷한 시기에 나온다.
이런 분위기는 드라마판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스트 오브 어스>, <폴아웃> 시리즈 등 게임 기반 영상 콘텐츠가 말 그대로 대세가 됐다. 이쯤되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거 돈 많은 프랜차이즈들이나 가능한 미디어 믹스 아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라스트 오브 어스> 실사 드라마
# 그래서 더 주목해야 하는 <8번 출구>의 사례
완벽한 반례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8번 출구> 영화가 아닐까 싶다. 스토리도 없고 이렇다 할 인물도 없던 게임이다. 매력적으로 작용한 건 ‘게임의 설정’과 ‘배경’, ‘플레이 방식’이다.
이상현상을 마주하면 뒤돌아갈 것, 이상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 꼭 8번 출구로 나갈 것. 나폴리탄 괴담, 도시 괴담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특정한 ‘룰’이 있는 무서운 이야기들이 익숙하실 텐데, 과거의 ‘금기’를 어기지 말라던 고전적 테마에서 현대적으로 가볍게 변용된 버전들이다.(엘리베이터 버튼을 특정하게 누르면 이상한 곳으로 나간다거나 하는 것도 다 같은 궤에 있다)
<8번 출구>의 이 단순하고 명료한 테마 안에, 끊임 없이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이상 현상’과 감독의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오리지널 스토리와 캐릭터로도 완벽한 합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보다 앞서 공개된 칸 영화제에서도, 일본에서의 개봉에서도 호평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8번 출구>는 정말 심플한 구성을 가진 ‘저예산 인디게임’이다.(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이제 AI 시대까지 찾아오면서, 앞으로 이러한 미디어 믹스의 기회는 더 쉽게 찾아오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결국 ‘아이디어’와 ‘설득’의 싸움이 될 것이다.
▲ 영화 <8번 출구> 장면 중 일부
# <오징어 게임>,<케데헌>의 성공 그리고 ‘넷플릭스’라는 변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슈퍼스타가 누구였느냐 하면, 다른 어떤 배우나 감독도 아닌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만든 ‘매기 강’ 감독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더피’(작중에 등장하는 호랑이 캐릭터) 인형을 들고 찾아오거나, 수기로 편지를 써오기도 하는 등 <케데헌> 팬덤의 행렬이 이어졌다. 싱어롱 상영도 큰 화제였고, 관객과의 만남 자리가 마련되면 그것도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극장 영화가 주류였던 영화제 현장에, OTT인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니. 눈을 돌려 CGV, 메가박스 등 영화관을 봐도 마찬가지다. <귀멸의 칼날>의 열기가 한창 이어지지 않았나.(참고로, <귀칼> TVA도 넷플릭스에 있다) 넷플릭스는 지금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케데헌>은 <킹덤>, <오징어 게임>, <피지컬 100>, <흑백 요리사>처럼 ‘한국 문화’가 반영된 콘텐츠의 연이은 성공 사례다. 역시나 같은 의미에서 ‘운’이 아니라 ‘이유’가 그 뒤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플릭스가 여러 차례 강조했던 것은 각 지역 문화의 ‘진정성’ 위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공통된 테마를 다룰 때, 한국 문화 기반의 콘텐츠뿐만 아니라 아시아 등 해외의 흥행작들도 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인사이트였다. 거기에 넷플릭스가 협업하는 콘텐츠 제작자들과 함께 기술, 시스템 등을 크게 바꾸고 개선하면서 제작 환경이 좋아진 것도 흥행작이 더 자주 나온 배경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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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팝 데몬 헌터스>
사실, 게임을 만들고 소비하는 입장에서도 넷플릭스는 주목해야만 하는 생산, 배급자다. (여전히 모르는 분들이 꽤나 많지만) 넷플릭스는 4년 전부터 꾸준히 다양한 게임 장르에 도전해왔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 게임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퀸스 갬빗> 체스 게임도, 심지어 <오징어 게임>의 공식 모바일게임 <오징어 게임: 언리쉬드>도 출시했었다.
▲ 게임 <기묘한 이야기 1984> 안 해보셨다면 꼭 해보시길 강력 추천한다. 원작 드라마를 떠나 게임 자체로 재밌다.
▲ 게임 <퀸스 갬빗: 체스>. 안야 테일러조이 배우의 얼굴을 참 잘 옮긴 모델링이다.
넷플릭스는 인디게임 라인업에도 진심이었다. 퍼즐 명작 <모뉴먼트 밸리> 시리즈부터, <옥센프리 2: 로스트 시그널>은 개발사 나이트스쿨 스튜디오를 넷플릭스 게임즈가 인수해서 출시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하데스>와 <카타나 제로>, <브레이드>도 라인업에 들였었다.
100여 개의 게임 중 역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건 역시 <GTA 트릴로지>였다. 넷플릭스는 이러한 모든 게임들을, 일반 넷플릭스 구독료(여러분이 OTT로 영상 콘텐츠를 보는 그 기본 비용) 안에 게임 서비스 이용료도 포함되어 있다는 설명으로, 광고도 추가 결제 비용도 없는 게임 서비스를 이어왔다. 어떤 면에선 Xbox 게임 패스 못지 않게 퍼주는 장사였던 셈이다.
▲ 넷플릭스 게임즈에겐 의미가 남달랐을 게임 <옥센프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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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게임즈에게 성공 경험을 안겨준 <GTA 트릴로지> 모바일 버전.
그러나, 넷플릭스 게임이 아직도 전성기라 부를 만한 순간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 것 또한 현실이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징어 게임> 게임이 나오던 순간이 그런 변환점이 되어주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던 과거보다, 만약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거나 확정된 건은 전혀 없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 관련 게임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상상은, 그 자체로 꽤 높은 실현 가능성과 큰 파괴력이 있어 보인다.
넷플릭스 공식 <케데헌> 게임 같은 상상이 아니더라도, 게임이 미디어 믹스로 진출할 때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가 이미 <아케인>,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등 수많은 콘텐츠에서 쌓아온 게임 기반 미디어 콘텐츠의 시장 경험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사례가 앞으로도 더 자주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아케인> 시즌 2
▲ 음악만 들어도 여전히 눈물 터지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게임스컴 2025 직후에도 다소 아쉬움을 표했던 ‘신선함’이 사라지고 ‘IP’ 의존도가 매우 높아진 작금의 게임 업계 풍토도 미디어 믹스 산업 확장 가능성에 힘을 더 보태고 있다. <포켓몬>, <젤다>, <마리오>, <바이오하자드>, <콜 오브 듀티>, <배틀필드>, <사일런트 힐> 등 이미 장수한 IP들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고, 굵직한 대작들도 이러한 IP들에서 많이 나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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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게임 IP들 중 상당수는 이미 극장의 문을 두드려본 경험이 많거나, 새롭게 두드릴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이들이 포스트 <케데헌>의 자리를 노릴지 누가 알겠는가. 넷플릭스로 영상을 공개하는 것이 극장 개봉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판단하는 콘텐츠들이 앞으로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호평을 받은 <포켓몬 컨시어지> 시리즈도 그런 도전의 연장선에 있다.
▲ 힐링하는 마음으로 너무 재밌게 볼 수 있었던 <포켓몬 컨시어지>.(2023년 12월 첫 공개) ▲ 2025년 9월 4일엔 신규 에피소드도 나왔다. 이와 같은 도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먼 훗날 이와 같은 주인공이 국내 게임사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상상력을 더해 10년 뒤 부산국제영화제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P의 거짓>이나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독특한 세계관이 돋보이는 게임의 미디어 믹스가 넷플릭스와 같은 OTT에서 <케데헌> 같은 열광을 받는 모습을 말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8번 출구>와 <케데헌>이 보여준 열기를 생각해보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은 절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