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8번 출구>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먼저 들었었다. ‘이상 현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재밌는 소재지만, 게이머들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스토리’나 ‘인물’이랄 게 전혀 없던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95분의 런타임이 그저 도시 괴담의 나열에 그치지 않을까, B급 공포영화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나 국내 극장 개봉보다 한 달 먼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미리 본 <8번 출구> 영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근래 이 정도의 명작을 본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마치 영화 <겟 아웃>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신선함과 강렬함처럼, 영화 <8번 출구>는 이 작품 그 자체로 재미와 탄탄한 작품성, 메시지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괜히 칸 영화제부터 부국제까지 시사 현장마다 호평 일색이었고 일본 개봉 직후부터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게 아니었다.
이하 스포일러 없는 영화 후기와 이번 영화의 감독, 배우를 직접 만나 전해들은 제작 비화를 소개하려 한다. <8번 출구> 게임을 아직 안 해보셨는가. 게임 원작을 몰라도 전혀 상관없다. 이 작품은 게임 원작의 분위기와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도 당연히 좋은 작품으로 남겠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를 찾는 영화 팬들에게 오래 기억될 명작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부산=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8번 출구> 영화를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호들갑 하나도 없이 정말 역대급 영화가 탄생했다.
# 기가 막힌 카메라 동선, 몰입한 시선 끝에 공포를 세워두다
게임 <8번 출구>의 시작이자 끝인 ‘지하철역에서 이상 현상을 뚫고 탈출해야 한다’는 설정은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간단하고 강렬한 룰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꽤 반복적으로 이를 전달해주고 있다. 지하철역 안 특정 복도의 루프에 갇혀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안에서 당신이 지켜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곧장 되돌아나갈 것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
그리고 반드시 8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갈 것
복도 천장에는 8번 출구로 나가는 길이라 표시되고 있지만, 눈높이의 벽면에 붙은 표지판은 역에 원래 없을 0번 출구를 안내하고 있다. 그 루프에서 어렵사리 ‘이상 현상’의 유무를 찾아 다음 복도로 성공적으로 가면 이 숫자가 0에서 1로, 또 성공하면 1에서 2로 바뀌는 것을 주인공은 발견한다. ‘여덟 번만 연속으로 성공하면 나갈 수 있다’고 믿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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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이상 현상’은 단순하게는 앞서 본 복도와 달라진 점(예를 들어, 아까는 없었던 형광등이 더 많이 생겼다거나, 문 손잡이 위치가 바뀌었다거나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몇몇 ‘이상 현상’은 말 그대로 기이하다 못해 극도의 공포로 다가온다. ‘이상 현상’의 다양함을 따라가는 것이 게임에서도 영화에서도 핵심 소재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예시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도록 하겠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기가 막힌 카메라워크를 통해, 같은 공간에서 몇몇 변주와 현상을 마주하는 반복적인 상황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특히 앞서 봤던 복도에서의 특징을 기억하며 이번에 보는 복도는 어떤 부분이 다른지 찾는 주인공의 시선을, 3인칭의 카메라 구도에서도 완벽하게 따라가, 몰입감을 크게 키워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관객의 시선도 이 공간 전체를 샅샅이 꼼꼼히 훑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포스러운 요소도 그 집중한 눈과 귀의 앞에 배치되게 된다. 런타임에 비하면 점프스케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다. 비주얼과 사운드로 압도되는 정말 기괴하고 무서운 이상 현상도 당연히 있지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경험의 핵심이 단순한 상승과 하강의 재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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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서 도망치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그리고 진짜 공포는 무엇인가
스토리와 인물이 없던 게임에, 영화만의 내러티브를 더하기 위해 덧붙여진 부분들이 자칫 작위적이거나 군살로만 느껴질 수 있는데, <8번 출구> 영화는 오히려 반대다. 매우 좋은 내러티브의 토대에 게임의 설정이 보조를 하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영화는 이어폰을 낀 주인공이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동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한 엄마는, 어딘가 불편한지 갑자기 크게 우는 아기 때문에 당황하는데, 그 자리 앞에선 까칠한 직장인 아저씨는 크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애 좀 조용히 시키라며 윽박을 지르고, 이 만원 지하철에 그런 어린 아이를 데리고 타는 게 상식이 있는 행동이냐며 마치 금방이라도 때릴 듯 위협한다.
하지만 지하철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곤경에 처한 아기 엄마를 돕지 않는다. 상황을 인지한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을 뿐이다. 나쁜 의미로 눈치 보는 세상. 비단 일본만 그런 것도 아니니 관객들도 그 불편한 분위기가 신경이 쓰인다.
한편, 주인공이 산부인과에 있는 연인과 통화를 하며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이 초반에 등장한다. 쉽사리 결정을 못하는 주인공은 망설인다. 그 ‘선택’의 망설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8번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조바심과도 연결된다.
작중에선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상 현상’ 그 자체보다도, 이 루프에 갇히기 전에 있던 여러 ‘불안’과 ‘불편한 진실’이 진짜 공포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직간접적으로 끊임 없이 던진다. 콩나물 시루처럼 담겨가며 모두가 누군가의 위기를 외면하는 지옥철, 과거에 해왔고 앞으로 하게 될 결정적인 선택, 인간의 단절. 그 모든 게 ‘공포’다. 어느새 이 기이하고 끔찍한 루프에서 나가더라도, 상황은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으로도 이어진다.
이번 소개에서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인물, 사건의 언급을 피하고 있어, 다소 모호하거나 어려운 영화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 영화 안에선 이러한 내러티브와 주제를 매우 묵직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겠다.
영화는 이 한정된 반복되는 복도라는 공간 안에서도 소품과 인물, 이상 현상을 적극 활용해 미장센의 극치를 보여준다. 8자로 꼬인 뫼비우스의 띠에서 개미가 기어가는 에셔의 그림, 예고편에서도 보실 수 있는 꼬마 아이 볼의 상처, ‘이상 현상’의 일부로 걸어다니는 아저씨의 기괴한 표정 등 소품과 장면 하나하나만 스틸컷으로 떼어놓고 봐도 의도가 명확해서 좋았다. 천식을 앓는 주인공의 신체적 결함마저 극 중의 긴장감을 더하는 좋은 부가 설정이라 느껴졌다.
▲ 영화에서 에셔의 그림으로 소개되는 8자의 뫼비우스의 띠를 도는 개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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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지 않은 기자 개인의 해석인데, 이번 영화에서 ‘아이’라는 소재가 시놉시스 시작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 만큼, 0에서 8까지 성공 횟수를 채워 나가는 이 과정 자체가 8에서 10개월에 걸친 ‘출산’ 과정의 은유로도 다가와, 영화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통해 게임 원작에선 느끼지 못했던 설정의 확장감까지 받을 수 있었다.
기자는 부산 센텀시티 CGV 아이맥스관에서 <8번 출구> 영화를 감상했는데, 큰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전달되는 ‘이상 현상’, 마치 커다란 복도 안에 실제로 들어와있는 듯한 몰입감 덕에, 기자 양 옆에 앉은 여성 관객분들은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된 시점 쯤에 눈을 질끈 감거나, 몸을 잔뜩 웅크리고 떠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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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기자와 다른 일자에 다소 작은 화면으로 감상을 했던 관객은 몰입감에 대한 후기가 조금 달랐으니, 10월 국내 개봉 이후에도 꼭 큰 화면을 지원하는 공간에서 보시길 적극 추천한다.
한편, 다른 날짜에 영화를 감상했다는 이 관객은 특정 서사의 줄기나 인물의 묘사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해서 아쉬웠다는 평을 전하기도 했는데, 기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미 ‘이상 현상’과 ‘탈출이 가능한가’라는 상황적 전제만으로도 긴장감과 복잡성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인데, 서사까지 너무 꼬아두면 복잡하게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군더더기가 될 수 있는 영화의 오리지널 스토리와 인물들은, 게임 원작의 미스터리한 설정과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감독의 정교한 계산 안에서, 이번 작품을 영화 자체로만 접해도 온전한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줬다.
부산국제영화제 시사 현장에서, 카와무라 겐키 감독, 주인공인 니노미야 카즈나리, 기괴하고 강렬한 웃음을 예고편부터 보여준 야마토 코치까지 세 사람을 만나, 스토리도 인물도 없던 게임 원작에서 어떻게 이런 탄탄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들어볼 수 있었다. 이하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게임과 관련된 문답만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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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영화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었을까
Q. 먼저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하면 <8번 출구> 게임을 플레이도 하셨는지, 탈출에도 성공하셨는지 여쭤볼게요.
A. 카와무라 겐키 감독: 네, 게임이 발매되고 나서 곧바로 게임을 재밌게 즐긴 기억이 있는데요. 아주 안절부절 못하면서 게임을 했었습니다. 저는 일단 탈출을 성공하긴 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했었네요.
A. 니노미야 카즈나리 배우: 저는 하는 것보단 보는 쪽 전문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유튜브에서 이 게임에 대한 영상이 눈에 띄어서 “아, 이렇게 플레이하는 게임도 있구나”하고 알게 됐었습니다.
A.야마토 코치 배우: 네, 저는 영화의 제안을 받고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게임을 플레이해봤습니다. 사실 처음엔 플레이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기도 했었는데요. 조금 시간을 두고 제 아들과 같이 게임에 도전하면서 겨우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랬는데 지금은 저희 아들이 몇 십 번이나 클리어할 정도로 이 게임에 훨씬 더 푹 빠져버렸네요.
▲ 왼쪽부터 카와무라 겐키 감독, 니노미야 카즈나리 배우, 야마토 코치 배우.
Q. 감독님은 영화 감독이기도 하면서 영화 제작자로도 유명하신데요. 예를 들어,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그리고 이번에 <국보>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상일 감독의 <분노> 또한 카와무라 겐키 감독님이 제작자로 참여하셨죠. 또 감독님이 직접 집필하신 소설도 여러 편 있는데 한국에도 번역 출간도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보면 감독님께서 정말 뛰어난 스토리텔러로서의 감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8번 출구> 게임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에 어떻게 매료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카와무라 겐키 감독: 사실 <8번 출구> 게임 원작에는 스토리가 없습니다. 스토리가 없던 상황에서 공간과 게임의 룰만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굉장히 독특한 제작 방식을 취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또한 독특하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게임을 영화화한다는 접근보다는요, 게임과 영화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경계선에서 새로운 영역을 도전한다는 느낌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래서 배우진과도 열심히 상의를 하면서, 새로운 제작 방식에 도전하며 만들게 됐습니다.
▲게임 <8번 출구>의 한 장면.
Q. 말씀해주신 것처럼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새로운 요소들이 많이 추가됐는데요. 아마 그 중에서 제일 큰 게 주인공으로 참여하신 배우님을 섭외하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매력을 가장 중요하게 보셔서 니노미야 카즈나리 배우님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카와무라 겐키 감독: 사실 이 영화에서는 역할, 캐릭터들이 정확한 이름, 명칭이 없는데, 개성이 없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렇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 캐릭터에게서도 뭔가 인간의 감정 같은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좀 독특한 스타일로 연출을 하게 됐는데요. 게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플레이를 하면서 점점 감정이입이 되고 자신이 일부분 투영되는 부분들도 있는데요. 그렇게 점점 인간, 감정의 영역은 그라데이션의 형태를 띄는데, 아예 아무 개성이 없는 상태에서 점점 입체적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폭 넓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니노미야 배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또 니노미야 배우가 게임을 무척 좋아합니다. 게임 러버(lover)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을 또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닐까 해서 캐스팅을 하게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