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들어보셨는가. 영화, 드라마 등의 작품에서 신체 접촉 및 노출 등 성적인 장면이 있을 때, 배우와 감독, 스텝 등을 비롯한 제작진 사이에서 정확한 수위와 표현 방식에 대해 안전하게 조율하는 전문가를 지칭하는 용어다.
상당수의 대본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침대에 눕는다” 정도의 간략한 지문만 적혀 있기 때문에, 감독이 구상하는 그림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인지, 배우는 어디까지 수용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 사전 조율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서로의 존엄성이나 신체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제작 앞뒤에서 이 껄끄러울 수 있는 주제로 얼굴을 붉힐 일 자체가 줄어든다.
그러나 이처럼 긴 설명이 뒤따라야 할 정도로, 아직 국내에선 낯선 직업이다. 최근에는 국내 1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권보람 씨 등 관련 전문가가 극소수 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콘텐츠 제작 환경의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될까. 그 힌트 중 일부는 글로벌 콘텐츠 제작, 배급 환경을 완전히 바꾼 ‘넷플릭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넷플릭스가 국내 출시 이후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 각지에서 콘텐츠 제작 환경에 어떤 변화의 바람을 불어왔는지, ‘박가언’ BIFF 수석 프로그래머, ‘김민영’ 넷플릭스 아시아태평양 지역 콘텐츠 부분 VP, ‘이용수’ PD, 태국의 ‘찻차이 케트누스트’ 화이트라이트 CEO, 일본의 ‘모모코 니시야마’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부산=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진행된 넷플릭스 크리에이티브 아시아 패널 세션. (왼쪽부터) 이성규 넷플릭스 아시아태평양(인도 제외) 프로덕션 시니어 디렉터, 찻차이 케트누스트 화이트라이트 CEO, 모모코 니시야마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이용수 프로듀서다.
# 문화와 배경의 차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렸다
박가언 BIFF(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는, 자신이 영화 <미나리>에서 나온 것처럼 미국 바이블벨트 지역에서 살던 시절을 언급하며, 넷플릭스를 비롯한 여러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흥행작이 나오며 시대가 많이 변한 것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과거 자신을 향해 “곤니치와, 니하오”를 외치던 사람들, 도시락을 싸가면 미스터리박스 취급을 하며 김치는 냄새난다고, 김밥의 김은 탄 종이를 먹는 것이라며 이상한 취급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국 콘텐츠와 문화를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현실이 감회가 새롭다는 것이었다. BTS에 모두가 열광하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도 <기생충>을 보고 ‘짜파구리’를 검색하면서, 이제 잘못 인식되는 오해를 넘어 오히려 쿨한 문화가 되는 시대까지 오게 됐다.
그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시아인들은 조용한 사람들이었고, 너드였으며, 과학자였고, 의사였다. 그런 인식 속에 살아왔다. 누군가는 우리가 스토리텔링이나 영화, 드라마 제작과는 맞지 않다고 그랬지만 아니었다. 우리가 이런 일을 잘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발견하고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동양적(oriental)이고 이국적인(exotic) 것에 대한 흥미에 그치지 않고, 감상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느끼게 된 것이 컸다고 한다.
“이 변화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자라오면서 ‘나의 이야기’가 중요치 않다고 느껴왔던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의미가 있죠. 살면서 들은 유일한 칭찬이 ‘너 영어 잘한다?’였던 이방인들에게, 가치를 알아주는 자긍심이 됐죠.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그러했듯 고정관념에서 개성으로 거듭났습니다. 외부인 취급을 받던 창작자들, 과거 현재 미래의 이야기꾼들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표현하길 바랍니다.”
▲ 박가언 BIFF(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 “각 지역의 진정성 살린 콘텐츠가 결국 통했다”
2025년에만 해도 참 많은 콘텐츠가 글로벌 시청자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제주도를 중심으로 했던 <폭싹 속았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화제였던 <오징어 게임 시즌 3>,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킨 <케이팝 데몬 헌터스>까지 모두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는 일본, 태국 등 다른 아시아 지역 콘텐츠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민영 넷플릭스 아시아태평양 지역 콘텐츠 부분 VP는 이 모든 흥행작들은 “각자 개성이 강한 작품들이지만, ‘로컬한 진정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정 흥행 공식이 있는 게 아니라, 배우, 제작자들과 함께 그 지역의 정서, 문화 등을 충실히 녹여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공감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엔 각 지역의 제작 환경이 개선되어온 맥락이 있다. 넷플릭스는 지난 10년간 한국을 비롯한 아태 지역에서 250개 이상의 현지 제작 파트너들과 직접 협력하며 창작 생태계 전반을 확장하는 데 힘써왔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8,000명 이상의 인력이 넷플릭스가 주도한 지원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일례로, 넷플릭스가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협력해 운영 중인 VFX 아카데미는 지난 2년 반 동안 330여 명의 교육생을 배출했고, 졸업생의 70%가 덱스터, 웨스트월드 등 주요 VFX 스튜디오에 취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신인 창작자들의 기술력 향상을 위한 ‘릴 라이프’ 프로그램을 수년간 진행하는 등 제작 환경 개선 및 기술 전파에 진심이다.
잘 알려져 있듯, 기존 방송국 제작 환경과 달리 넷플릭스와 같은 OTT가 대세가 되면서, 사전 제작이 훨씬 더 공고히 자리 잡게 됐고, 예산 확충 및 제작 기회의 장이 더 커진 것도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큰 변화로 작용하게 됐다. 이에 대한 실질적인 목소리도 이어서 들어볼 수 있었다.
▲ 김민영 넷플릭스 아시아태평양 지역 콘텐츠 부분 VP
# 없던 직업도 생겨날 정도로 제작 환경이 크게 변한 지난 10년
4분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 예정인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이용수 프로듀서는 영화, 드라마 시리즈 등을 넘나들며 여러 작품에서 활약해왔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국내 제작 환경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고, 넷플릭스 이후 영화와 드라마의 분리된 이분법적 촬영이 아니라 각각의 장점이 섞인 환경이 자리 잡으면서, 이전보다 더 나아진 제작 환경을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제작 과정에서 한국,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등의 국가를 오갔는데, 해외 촬영은 각 국가의 제도 및 프로덕션 환경이 모두 달라 어려운 지점이 많음에도, 넷플릭스 글로벌에서 로케이션 섭외도 도왔고, 각 지역 문화에 맞게 고려해야 할 사항, 이슈 발생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 등 여러 측면의 도움을 제공해, 제작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용수 프로듀서는 특히 캐나다 촬영 당시의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말했다. “캐나다에서는 법적으로도 제도가 마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촬영 시작 전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촬영을 할 것이고, 날씨가 너무 더우면 휴식을 취할 것이라거나, SFX 촬영에서 폭발 씬이 있으니 반경 몇 미터 이내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등에 대한 브리핑을 모든 스텝, 배우가 모여서 듣고 시작한다”고 했다.
어찌 보면 다소 뻔한 내용일 수 있고,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항을 전 스텝이 모두 모여 한 번 더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며 주지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안전 사고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제작 동선에서도 안정감이 더 생겨 좋은 제작 문화였다고 강조했다.
▲ 이용수 프로듀서의 넷플릭스 시리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4분기 공개 예정이다.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주로 활약해온 찻차이 케트누스트 화이트라이트 CEO는, 프리 포스트 단계의 구분을 넘어 제작 전반의 소통이 강화됐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태국에선 액션 영화를 찍을 때 현장 사고가 나는 사례가 꽤 있었고, 이를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였기에 액션 씬을 찍는 걸 기피하는 현상도 있었는데, 넷플릭스 탤런트 팀과 함께하면서 절차가 개선되고 트레이닝을 거치면서, 이런 걱정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왼쪽부터 찻차이 케트누스트 화이트라이트 CEO, 모모코 니시야마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이용수 프로듀서다.
이날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사람은 모모코 니시야마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였다. 서문에서 소개한 것처럼 노출이 있거나, 신체적으로 친밀한 장면을 찍어야 할 때, 이를 감독과 배우 사이에서 구체적인 사항으로 조율, 소통하는 자리다. 그녀는 어느 한 쪽을 위한 직업이 아닌, 감독의 창의적 비전을 유지하면서도 제작 환경의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이라 강조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2020년 처음 이 역할이 일본에 소개됐고, 그녀는 5년 넘게 이 일을 해오면서, 현재는 일본의 콘텐츠 제작 환경 안에서도 상당히 많은 곳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진 않았다. 서구권에 먼저 있던 직업이니 “우리는 헐리웃이 아니다”라는 막연한 반대도 거쳤으나, 실제 이러한 소통 과정이 도입된 곳에서 좋은 반응이 훨씬 더 많이 나오자 빠르게 환경 전반이 개선됐다고 한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기존에 없던 직업이 도입된 것을 포함해, 언급된 여러 트레이닝, 제작 환경의 개선 등은 단순히 넷플릭스와 함께 작업하는 순간에 적용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은 제작 환경을 경험한 팀들이 이후 넷플릭스와 함께 하지 않는 순간에도 좋았던 부분을 차용하고 적용해, 다른 제작팀들에게도 확산될 수 있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비슷한 변화의 흐름이 차츰 더 강해지고 있는 만큼, 향후 영화, 드라마 제작 환경, 그리고 더 넓은 차원에서 게임 원작 및 미디어 믹스 제작 환경에서도 창작자들이 더 긴밀하게 소통하고 일하기 안전한 환경이 자리 잡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