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런 작품을 만든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머릿속이 궁금했을 정도다. 멕시코 출신의 거장은 <블레이드 2>, <헬보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등 여러 영화로 사람들에게 큰 물결을 일으켰다.
국내에선 <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 영화 <부산행>, 드라마 시리즈 <지옥> 등으로, 또 다른 상상력의 지평을 열어온 연상호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연상호 감독의 이야기를 눈 앞에서 들어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작품의 스타일이 확고하다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많다. 실사와 애니메이션 양쪽에 모두 일가견이 있다는 점, 넘치는 상상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지금도 활발하게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창작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부산=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 왼쪽부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연상호 감독
# 상상력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연상호 감독은 “생활 속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어렸을 땐, TV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많이 방영됐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데뷔작이라 할 만한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 999> 등 여러 작품을 봤고, 소설책도 많이 봤다. 만화나 소설처럼 공부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것만 많이 보니 부모님이 상당히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운을 띄웠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또한 “크게 공감한다. 스포츠도 못하는 편이었고, 집에서도 관찰자에 가까웠다. 영화마저 없었으면 아마 가족들이 나를 절벽에서 밀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기예르모 감독은 동명의 소설과 과거 작품들을 기반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각본과 감독을 맡아 2025년 11월 7일 공개를 앞두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일본 도호의 전설적인 특촬 영화 <가스 인간 제1호>(1960년 작품)을 원작으로 한 <가스인간>이라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를 제작 중이다.
두 작품 모두 일종의 ‘괴수’를 다루고 있고, 앞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들이 있음에도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자신들의 색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이 있다. 괴수, 괴물에 대해 기예르모 감독은 재밌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괴수라고 하시니, 제 삼촌과 친척들 모두 괴물 같이 느껴지던 사람들이었어요.(웃음) 저는 정치인보다는 차라리 괴수가 좋아요. 그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잖아요. 그런데 괴물은 사실 이해하기 쉬워요. 제가 1964년생인데, 제가 어릴 적에 멕시코에선 TV에 <울트라맨> 등을 비롯한 일본 프로그램이 참 많았어요. 스시만 안 먹었지, 사실 타코 먹고 자라던 일본 어린이에 가까웠죠.”
같은 맥락에서 연상호 감독 또한 <가스인간>을 만든 상상력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일본 <변신인간> 시리즈에 영향을 받아서 <가스인간>으로 리메이크를 하고 있는데, 그때 당시 상상력엔 제약이 없었다는 느낌이에요. 영화 시작하자마자 바로 사람이 가스가 돼서 사람을 죽이고 다녀요. 이런 상상을 하기 힘들잖아요. 그런 상상력들이 참 놀라웠죠.”
기예르모 감독은 “저도 도호 괴수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런 호러 장르를 통해 모든 것에 손이 닿을 수 있다고 봐요. 어떤 것을 끝까지 알고 싶다고 하게 되면 동력이 생기죠. 마치 장갑을 끼지 않은 범죄 현장 같은 거예요. DNA를 모든 곳에 남기죠. 그렇게 남긴 생명이 저의 전기가 되는 겁니다. 그만큼 생명을 들이붓다 보니 좋은 아들, 남편이긴 어려울 때도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하죠”라고 말을 이어갔다.

# 그림과 피규어 모형은 소통 수단이자 영감의 원천이기도
기예르모 감독은 영화 촬영 전에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노트를 현장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조각, 일러스트레이션, 심지어 특수 메이크업 등을 모두 배워가며 했었던 자신의 과거 제작 경험처럼, 현재도 작품을 만들 때 그런 상상력을 모두 생생히 옮기고 구현하고 있었다.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대담 현장에서 공개한 제작 노트 중 일부
연상호 감독은 기예르모 감독의 노트를 보며 굉장히 놀랐다며, 자신도 영화 제작 과정에서 필요할 때는 그림을 그릴 때가 종종 있다는 말을 전했다.
“원래 애니메이션을 했다 보니, 웬만하면 안 그리려곤 하는데, 설명이 필요하면 그림을 그리기도 하죠. <부산행>에서 엔딩 부분에 좀비들이 기차에 끌려가는 장면이 원래는 없었어요. 이 장면을 추가할 때 스텝들이 정확히 인지를 못해서, 스케치를 해서 설득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기예르모 감독님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이런 작업을 하시는 것 같은데, 노트를 보니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와 거의 똑같아서 정말 놀랍네요.”
앞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특수 메이크업과 조각도 직접 했다는 소개를 하기도 했지만, 피규어 수집과 도색도 매우 좋아하는 취미라고 언급했다.
“잘 조각된 피규어를 보면, 아주 훌륭한 모양이나 색채에 대한 솔루션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깨에 이런 이음새가 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장난감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죠. 도색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헬보이>를 만들 때도 직접 그려봤었어요. 원작자가 어떻게 그렸는지 궁금했거든요. 새삼 저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기도 했지만요.(웃음)”
▲ 2004년 개봉작 <헬보이>
# 우린 ‘사고’가 일어나길 원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의 차이를 말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실사 촬영을 하면 9개월 넘게 매일 작업하게 될 때도 있는데, 배우가 대사를 까먹는다거나, 바람이 불어 머리가 흩날린다거나 하는 ‘사고’(accident)가 나오길 바라게 돼요. 감독들이 굉장히 정밀하게 설계를 하지만, 그런 사고까지 작품의 한 부분이 돼죠. 스탠리 큐브릭 감독님이 70번이 넘는 테이크 끝에 배우를 지치게 한 후 진실을 좇았던 것처럼, 그런 의외성이 실사의 매력이기도 하죠.”
“모든 건 드라마예요. 스토리에 집중해야 하고 톤에 집중해야 해요. 오페라의 톤, 팝송의 톤, 뮤지컬의 톤이 있죠. 그 모든 것을 맞춰서 올리고 내려야 해요. 저는 영화가 시(詩)인데 하드웨어가 있는 시라고 생각해요. 움직이는 음성과 리듬, 연기를 만드는 거죠.”
“톤에 대해 더 얘길 하자면, 몇 층의 건물이더라도 1층부터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 1층부터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6층에서 시작하는 작품도 있는데 그런 건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죠. 일단 시청자를 끌어들여야 하고, 궁금증도 유발해야 합니다.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겠구나, 10분 15분은 기대할 수 있겠지만요, 얼마나 많은 흥미 요소로 관객을 일으키느냐. 우리가 관객이 되고 그 마음을 읽어야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와 같은 작품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업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이 의외성과 관객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측면에 대해 연상호 감독도 크게 공감했다. 최근 저예산 영화 <얼굴>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작은 규모의 영화를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특유의 에너지, 규모가 큰 영화로는 보여줄 수 없는 이미지, 주제, 질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늘 큰 예산이 있을 때만 유리한 건 아니죠.”
“촬영 중에 과거 장면이 있어서 무리하게 세팅을 했는데, 촬영 바로 전날 엄청 큰 비가 와서 진흙이 다 쓸려와서 세팅한 바닥이 모두 진창이 된 일이 있었어요. 처음엔 그걸 치우려 하면서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룩이 또 과거와 맞아서, 만약 상업 영화로 이 장면을 찍으려 했다면 흙을 다 가져와 뿌려야 했을 수준인데 싶었죠. 기예르모 감독님이 말씀해주신 ‘사고’ 같은 거겠죠. 그게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이 될 때도 있어요.”
▲ 연상호 감독의 <얼굴>이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흥행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흔들릴 것이냐 흔들 것이냐. 틀이 상상력을 바꾸기도 한다.
두 사람이 평론가들의 평에 대처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연상호 감독은 ‘간극을 좁히려 다 보는 쪽’에 가까웠다.
“평론가 평과 저 사이에 격차가 생길 때도 있겠죠. 그 격차 사이에 뭐가 존재하는지 읽어보려 해요. 대중에게 뭔가를 보여드리려 하면, 사실 대중을 특정할 수가 없거든요. 될 수 있으면 그 ‘대중의 상’을 그려보려 해요. 작업실 밑에 영화를 잘 안 보시는 편의점 아저씨가 있는데, 그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느낀 바를 다시 영화로 보려하기도 하고요. 평가, 숙제검사를 받는 느낌보다는, 그들의 의견은 존중하더라도, 작업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게 노력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얼마나 ‘공감의 수’보다 ‘깊게 공감했는지’ 깊이가 훨씬 더 중요하다 강조했다.
“제가 첫 영화 <크로노스>를 했을 때, 모든 평론가들의 평을 다 저장해뒀어요. 제 외모부터 작품의 의도, 심지어 신발 욕도 있더군요.(웃음) 나이가 들었을 때 다시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저장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안 봅니다. 좋은 평을 믿으면 나쁜 평도 믿어야만 하거든요. 사실 공감한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깊게 공감했느냐가 중요해요. 몇 명이 봤냐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느냐가 핵심이죠.”
▲ 대담 현장에서 공유된 연상호 감독의 <얼굴> 촬영 장면 중 일부분
숏폼이 대세인 시대고, 작품의 길이도 다양해지는 시대에 긴 호흡의 작품을 여전히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말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는 점점 플레이타임이 극과 극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게임 제작자들도 주목할 만한 말이었다. 먼저 연상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비디오 데크가 있을 때,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OVA)이 TV도 극장용도 아닌 비디오 전용으로 나왔어요. 그때 OVA 중에 굉장히 독특하고 창의적인 게 많이 나왔죠. 형식이 바뀌면서 오는 신선함이었다 생각해요. 넷플릭스 같은 OTT가 그런 예전의 OVA 같은 역할을 한 측면도 있죠. 전달 속도도 중요한데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가 동시에 보는 여건은 굉장히 큰 장점이죠.”
“극장용 영화는 나라마다 텀이 있고, 제도와 배급 방식도 달라서 시간이 걸리죠. 그래도 속도는 느려도 전달되는 깊이의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고, 장단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아이디어의 크기가 화면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큰 문제”라 강조했다.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3억 명 이상의 시청자가 집에서 본다, 이런 건 이전엔 없던 것이죠. 한편, 3분짜리의 압축적인 영화든 3시간짜리 영화든 들어가는 역량이 비슷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헬보이>는 주 6일에 걸쳐 130일 동안 촬영했는데, 이런 두 시간 분량의 영화를 찍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조언은, 긴 시간에 걸쳐 해야 하니, 초반에 너무 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님과도 비슷한 이야길 나눴는데 하루에 7시간은 꼭 자라는 것이었죠.”
▲ 연상호 감독의 실사 작품 <기생수: 더 그레이>는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만화, 애니메이션 원작이 있음에도 '형식'을 바꿔 재해석한 사례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작품 본편뿐만 아니라, 이런 숏폼의 티저도 4,382만 조회수를 넘길 정도로 엄청 큰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처음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 먼저 연상호 감독은 이런 말을 전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애를 먹고 있습니다. 라이브 액션 영화는 10년, 애니까지 하면 15년 정도 했는데도 여전히 어렵고요. 여러분만 애먹는 게 아니라, 저도 그렇습니다.(웃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도 끝까지 유쾌한 분위기의 말을 덧붙였다.
“저도 공감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건 ‘데이트’가 아니라 ‘결혼’이예요.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웃음)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