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는 접두어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엔 “우리 콘텐츠와 인재를 알아주세요”하는 다소 작위적인 분위기가 섞인 말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콘텐츠를 넘어 문화에 대한 관심까지 세계인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K를 내세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게 대표적인 예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게임 쪽에선 조금 상황이 다르다. <데이브 더 다이버>, <P의 거짓>, <스텔라 블레이드> 등 PC 콘솔 쪽에서도 괄목할 만한 평가를 받는 사례들도 나오고는 있으나, 여전히 우리는 세계 시장에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고, “K-게임”이라는 말은 사용하는 뉘앙스에 따라 심하게는 멸칭으로 쓰일 때도 더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분야의 콘텐츠 전문가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한 최근의 K-콘텐츠 성공 이유에 대해 정말 다양한 해석이 이미 나왔지만, 게임 기자가 부산국제영화제 현장까지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마음 먹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 두 사람은 조금은 다른 관점과 인사이트를 제시할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얼굴이 익숙하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와 국내외 콘텐츠 산업과 정책 등에 대해 일선에서 다루고 있는 김숙 컬쳐미디어랩 대표를 만나, <케데헌>을 비롯한 여러 작품이 콘텐츠 시장에서 ‘한국’을 다루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콘텐츠 제작 방식에선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지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부산=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 왼쪽부터 김숙 컬쳐미디어랩 대표와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다. 넷플릭스가 마련한 미디어 대담 자리에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 ‘정체성 찾기’를 비롯한 보편적 정서의 관통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 요인에 대해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와 김숙 컬쳐미디어랩 대표는 K팝과 한국 문화라는 ‘소재’도 중요했지만 ‘보편적 메시지’가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한국적 취향이 가득한 특수한 소재를, 정체성을 찾아가는 전 세계인 모두가 고민해봤을 ‘아이덴티티 찾기’라는 메시지로 담아냈다는 점”이 <케데헌>이 서구권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요인이라 꼽았다.
작품의 구조도 영민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스티븐 킹이 말했던 “독창성을 확보하는 데 가장 훌륭한 방법 중 하나는 두 개의 장르를 섞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는 <케데헌>이 <미녀 삼총사>의 구조에 ‘퇴마사’라는 소재를 더했고, 헌트릭스 세 명의 캐릭터도 어떤 성향의 시청자도 자신과 동일시하기 좋은 폭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정체성 찾기'가 서사의 중심에 있던 <케데헌>
▲ <케데헌> 제작진 중 상당수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제작진인 점. <스파이더맨>도 다른 유니버스의 피터 파커들의 '정체성'에 대해 다뤘던 작품인 점은 우연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이 말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도 함께 인용하며, 앞서 언급한 ‘정체성 찾기’라는 보편적 소재가 가진 힘을 재차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에, 문화적 괴리가 크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나는 어떠한 사람이고, 그 뿌리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대해 젊은날의 통과 의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민자가 많은 미국과 유럽에선 이 주제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먹방’의 인기나 여러 배경도 함께 언급되고 있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1세대 한인 이민자들이 <케데헌>을 보며 눈물이 터진 장면은 의외로 ‘김밥’을 먹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그들에겐 낯선 식재료인 김으로 싼 밥을 보면서 과거 세대들에겐 차별과 놀림의 대상이 되던 소재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힙한 음식으로 소비되는 상황이 됐으니 감회가 남다를 만하다.
▲ 김밥과 라면 등 한국 음식을 먹는 <케데헌> 속 장면.
비슷한 논지에서 <기생충>, <오징어 게임>, <피지컬 100>, <흑백 요리사> 등의 국산 콘텐츠가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거나 호평을 받은 배경에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정서와 주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상대적으로 더 유명하지 않은 셰프들이 승리를 거둔다거나, 육체적이 이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승리를 가져가는 ‘판타지’는, 빈부격차나 계급적 구조에서 오는 괴리감, 유리함과 불리함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이겨내는 ‘보편적 주제와 서사’로 작용하며, 언어나 문화적 소재에 대한 장벽을 넘어선 인기를 끌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 <오징어 게임>
# 소유의 가치에서 체험의 가치로, 진짜 ‘주류 문화’의 한복판에 서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조용필 씨의 노래가 빌보드에 오르냐 마냐를 논하던 1980년대 키드로서, <케데헌> 신드롬이 신선하고 충격적이라 생각한다. 우리 문화를 담은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얼마나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는지, 이전에 영화제에서 여러 작품들이 상을 받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절대 다수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국제 시장에서 주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영향력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라 설명했다.
과거의 헐리웃 영화들이 ‘동경’하고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영화적 꿈을 그려냈던 반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한국 문화와 K팝을 ‘체험’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점도 지금의 시대에 맞는 접근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케데헌> 흥행 이후 한국행 비행기 티켓 예약이 늘어나기도 했고, 한국어가 섞인 가사까지 모두 외우며 챌린지를 이어가거나 싱어롱 상영이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는 인스타그램 등 SNS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의 문화에 기인하고 있다고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설명했다. 좋은 것을 ‘소유’해야 만족했던 기성 세대와 달리, 지금의 젊은 세대는 ‘체험’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김숙 대표는 넷플릭스 플랫폼이 여러 언어에 맞춰 ‘자막’과 ‘더빙’을 꾸준히 제공하고 있는 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시청 약자를 위한 것을 넘어서서, 다른 언어 문화권에 콘텐츠가 전달되고 소비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도 봉준호 감독이 과거 ‘자막’에 대해 이야기했던 “1인치의 장벽을 넘어서면, 보다 훌륭한 많은 영화를 즐기실 수 있다”던 <기생충> 수상 소감을 인용하며, 영미 문화권 소비자들은 자막 콘텐츠를 소비 안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넷플릭스의 더빙과 자막으로 동일한 콘텐츠도 더 넓은 시장에 닿을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단순히 언어의 장벽만 넘어선 것이 아니다. 그는, 흑인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 중엔, 흑인 뮤지션이 백인 소년 소녀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 됐던 ‘마이클 잭슨’과 흑인도 지적인 면모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증명한 ‘오프라 윈프리’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던 견해도 있었다며, “문화 콘텐츠의 힘이 수많은 인권 운동가들이 했던 것보다 어쩌면 더 큰 인식 개선의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케데헌>의 흥행도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남길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미국, 유럽의 10대 청소년들의 방에 ‘아시아인’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했다는 건, 지금 세대가 자라난 미래엔 기존의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들이 더 많은 기회가 열릴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앞서 이병헌 배우를 비롯한 수많은 스타들이 헐리웃에 도전했으나, 백인 여성과 아시아 남성의 연애 서사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던 서구권 문화에, <오징어 게임>, <케데헌> 등의 글로벌 흥행작이 변화의 바람을 불어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자막과 더빙으로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한국 문화라는 소재를 '체험'의 형태로 녹여낸 <케데헌>
# 한국다움은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의 콘텐츠 생산은…
한국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차례 나왔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K팝’ 또한 사실 음악적 근원을 따져보면 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고궁이 나오거나 갓을 쓰고 있다고 다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한국적이라 믿는 소재들은 ‘소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케데헌>에서도 희생을 통한 구원 서사, 우애를 가지고 있던 친구들의 화합,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강조됐던 것처럼 “우리가 더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가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대로 미국적인 것 또한 특정 소재가 나와야만 미국적인 게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 높이 두는 가치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는 견해였다.
짜장면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중국 음식’으로 불리고 있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한국에서 소비되는 한국 문화의 하나인 것처럼, 파인애플을 넣은 피자를 이탈리아 사람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것까지도 피자인 것처럼, 어떠한 콘텐츠가 꼭 국내에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특정 소재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한국적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케데헌>은 소재도 돋보인 작품이었지만, 앞으로 한국 문화를 다룰 많은 작품들이 소재에 묶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진 시대에 플랫폼과 창작자가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데에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와 김숙 대표가 입을 모았다. 유튜브, OTT 등이 새로운 시장을 열어준 측면도 있지만, 핫해진 장소의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해 상권이 계속 옮겨갔던 사례들처럼, 지금 잘 나가는 콘텐츠 플랫폼도 공생 없이는 공실이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김숙 대표는 <오징어 게임>, <케데헌> 등의 작품이 연이어 글로벌 흥행을 하면서, 국내 콘텐츠 제작자들이 이전엔 쉽게 약속을 잡기 어려웠던 해외 업체와 접점을 만들거나 협업을 하는 사례가 전보다 더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동시에, 제작비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국내 제작 산업이 수월하지만은 않은 것도 현실이라서 글로벌 도약을 위한 과도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김숙 컬쳐미디어랩 대표
끝으로 기자는, 영화 시장에선 <마리오>, <소닉>, <마인크래프트>가 드라마 시장에서는 <라스트 오브 어스>, <폴아웃>,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아케인> 등의 게임 기반 영상 콘텐츠의 흥행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웹툰 웹소설 원작의 활발함과 달리) 국내 게임 씬에선 아직 이와 같은 내러티브 드리븐 타이틀의 확장이나 세계관과 상상력을 강조한 미디어 믹스가 과도기에 있는 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 사진은 <라스트 오브 어스>. 해외라고 다 잘하고 있는 건 아니고, 우리도 최근 PC 콘솔 도전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러티브와 상상력이 약점이고, 국내의 게임 기반 미디어 믹스도 같은 약점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
게임 기반 영상 콘텐츠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이와 같은 답변을 줬다.
“게임 콘텐츠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구성을 보면 애니메이션과 뮤지컬의 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미션을 클리어하는 측면에선 게임적인 요소도 담겨져 있거든요.”
“게임의 세대가 등장하면서 영화나 드라마의 문법이 바뀌었어요. 창작자들이나 현장에 있는 분들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분들도 가끔 계신 것 같은데, 과거엔 서사의 구조가 캐릭터들의 전체 이야기, 어떤 사연이 있었고 지금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기본적인 구조로 담겨 있었고, 저희가 이야기하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으로 다뤄졌죠.”
“그런데 게임에는 플래시백이라는 게 없습니다. 서사 구조도 사실은 어떠한 세계관이 제시되면 앞으로 전진하는 방식이에요. 최근에 잘 되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의 편집과 제작 방식들을 보면, 주인공들의 과거 서사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케데헌>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과거 이야기로도 등장하긴 합니다만, 그것이 사실은 가장 결정적인 사례로서 제시가 되는 건 아니죠.”
“이러한 게임의 문법이 드라마적 문법으로도 굉장히 유효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그러한 문법들을 조금 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의 세계관이나 게임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과도 유사한 부분들이 많기도 하고요.”
“문화 산업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점이 조금 다를 순 있어요. 교향곡을 만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게임 음악을 하고 계신 것처럼, 게임도 시장이 굉장히 큰데, 거기에 확실한 시장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수많은 유능한 작가들이 게임 시장으로 향할 거라고 봅니다.”
▲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