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중문화의 다층적인 면모는 반일감정과 일본산 콘텐츠에 대한 선호에도 엿볼 수 있었다. 항일 승전 80주년을 맞아 반일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모으고, 거리에서는 애국주의적 구호가 쏟아지는 한편, 같은 거리에는 <귀멸의 칼날> 코스프레와 포켓몬 팝업 스토어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반일 감정과 일본 서브컬처 소비가 동시에 공존하는 풍경은 중국 문화 산업의 복잡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중국의 게임, 콘텐츠 산업은 이제 기업 단위를 넘어 도시와 지역 차원으로 클러스터화되고 있다. 항저우에서 만난 넷이즈의 초대형 캠퍼스, 선전에 건설 중인 ‘텐센트 아일랜드’는 게임사가 단순한 개발 기업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통째로 흡수하는 거대한 생태계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게임을 ‘도시의 얼굴’로 활용하고 있다.
▲ 푸동과 푸시를 나누는 상하이 황푸강
반일감정과 코스프레
중국에는 CCTV가 17번까지 있다. 항저우와 상하이의 호텔에서 머물 때 잠시 TV를 틀면 끝없이 이어지는 CCTV 방송에 혀를 내둘렀다. CCTV의 행렬이 지나가도 지방방송을 비롯한 여러 TV 채널이 있었지만, 그래도 중국을 대표하는 방송사라고 한다면 단연 중국 중앙 텔레비전, CCTV다.
살펴보니 CCTV에서는 각 번호마다 특정 주제를 전문적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뉴스 채널에서는 종일 뉴스를, 스포츠 채널에서는 종일 스포츠를, 어린이 채널에서는 종일 어린이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방식이다. 기자가 제일 애청했던 건 6번 영화였다. 일정 내내 항일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모자른 중국어로 더듬더듬 들어보면 공산당과 국민당이 힘을 합쳐 일제를 몰아내는 내용의 영화였다. 선악의 구분이 명확하게 연출됐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을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었다.
▲ 중국 공산당의 분투를 그린 연속극 <욕혈영광>(浴血荣光). 원한다면 하루 종일 CCTV에서 이런 역사물만 볼 수 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는 시퀀스가 하나 있다. (채널을 돌리다가 본 거라서 앞 장면을 알 수 없는데) 어느 촌로의 딸이 일본군에게 붙잡혀갔다. 직접적인 묘사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본군이 그녀를 위안부로 강제 동원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다급한 마음에 공산당을 찾아가 딸을 구해달라고 호소하고, 이 일에 비분강개한 공산당 유격대원들은 일본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녀를 안전하게 구출했다. 중국어를 하나도 몰라도 나오는 장면만으로 이 모든 내용과 메시지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CCTV 6번의 중간 광고에는 새로 개봉할 영화에 대한 소개도 있었는데, 7월 말 개봉해 많은 관객을 모은 <난징사진관>의 예고도 나왔다. 이 영화는 지난달 큰 화제가 되었다. 일제의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하는 이 영화는 중국의 시민들이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무려 7,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하나의 영화를 관람한 것이다. 9월에도 만주사변과 731부대의 생체 실험 등을 소재로 한 <731>이 개봉할 예정이다.
▲ 한국인 전체 인구보다 많은 중국인이 관람한 영화 <난징사진관>. 출장 중 미디어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항일 승전 80주년을 맞이하면서 지금 중국의 반일감정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영화를 관람하고 고취된 관객들이 '일제를 무찌르자'는 구호를 외치는 한편, 쑤저우에서는 일본인 관람객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주중 일본대사관도 자국민을 대상으로 안전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시진핑, 푸틴, 그리고 김정은이 나란히 선 9월 3일 전승 80주년 열병식은 바로 이런 맥락 위에서 열린 행사였다. 일본 정부는 각국 정상에게 이 행사를 가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 내 반일감정이 최고조로 치닫았음에도 일본산 콘텐츠가 중국에서 대단히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 한국에서의 '노노재팬'과 유사한 운동이 발흥할 만도 한데, 기자는 일정 중에 <귀멸의 칼날> 코스프레한 사람을 과장 하나도 안 하고 100명 단위로 보았다. 게임이나 서브컬처 행사를 주로 취재했기 때문 아니냐고 반론할지도 모르겠지만, 대로변이나 일반적인 상점가에서도 코스프레를 한 사람을 정말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중국이다. (중국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중국에서 코스프레는 대단히 보편화되어 있다.)
반일감정과 애국주의가 역대 최대치라는데 일본산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으로 길거리가 가득찬 모습은 기자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중국 내 방학을 맞이해서 항저우에서는 포켓몬 TCG 대회가 열렸고, 서호 앞 상점가 또한 포켓몬으로 가득 꾸며졌다. 포켓몬 팝업 스토어에는 장사진이 들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국은 넓디넓어서 반일감정으로 무장한 이들과 일본산 서브컬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반일감정은 반일감정이고 일본산 서브컬처는 또 그것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짧은 출장 동안에는 섣불리 이 문제에 관해서 단정지을 수 없었다.
▲ 기자는 어디 가서 좀처럼 코스어의 사진을 찍지 않는 편인데,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 항저우 서호의 쇼핑 거리는 포켓몬이 도배하고 있었다.
▲ 마침 TCG 대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 폭우가 쏟아져서 줄을 서지 않고 포켓몬 스토어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런 팝업이 서호 부근엔 대단히 많았다.
퇴근하지 않는 개발자, 캠퍼스에 섬까지 짓는 게임사
중국 제2의 게임 개발사로 꼽히는 넷이즈는 항저우에 위치하고 있다. 항저우 방문의 주된 목적은 <연운>(옛 연운십육성)의 체험 및 인터뷰 등이었다. <연운> 중국의 오대십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픈월드 액션 RPG로 오는 11월 15일 글로벌 출시를 앞두고 있다. 해당 게임은 중국에서 이미 출시되어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의 실제 역사를 게임 속에 녹여냈으며, 당대의 복식과 건축 양식을 재현하기 위해 적잖은 공을 들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넷이즈는 항저우를 찾은 전 세계 미디어를 위해서 본사 캠퍼스 투어를 열었다. 지난 2월에도 글로벌 미디어를 대상으로 <프래그펑크>의 발표회를 열 때 같은 투어를 진행한 적 있다. 자사의 초대형 캠퍼스를 널리 홍보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넷이즈 게임의 대형 배너와 블리자드와 갈등, 그리고 화해를 상징하는 둠해머 조형물을 지나면 못해도 수천 명이 넘는 개발자들이 일하는 '캠퍼스'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넷이즈는 제1 캠퍼스로도 모자라 제2 캠퍼스까지 지었으며, 이것으로도 모자라 광저우에도 캠퍼스를 신설했다.
▲ 항저우 넷이즈 캠퍼스 입구
여느 대학의 교정 못지 않은 넷이즈 캠퍼스에는 직원을 위한 체육시설은 물론 카페와 식당, 편의점에 마사지샵까지 있다. 넷이즈가 직접 개발한 마사지 로봇은 시각 인식 알고리듬을 사용해 체형을 스캔, 이용자에게 딱 맞는 지압을 해준다는 설명을 들었다. 가장 앞에서 설명에 듣던 기자가 체험에 당첨됐는데, 기자가 느끼기에는 사람한테 직접 받는 마사지만 못했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넷이즈 출신의 아무개에게 해주었더니 "과거에도 넷이즈 캠퍼스에 마사지샵은 있었고, 로봇 대신 전문 마사지사가 상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회사 투어, 오찬, 게임 체험, 인터뷰 등을 마치니 해질녘이었다. 그때까지 넷이즈 캠퍼스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정식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넷이즈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996) 방식으로 일하는 회사인지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중국의 게임·IT 기업은 엄청난 노동 강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고 넷이즈는 여러모로 그 선두에 있는 기업이라는 점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편의점부터 수면실까지. 넷이즈 캠퍼스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거의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있어서 사무실 밖을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기자는 커리어 내내 이것이 좋은 게임 개발 문화인지 물어왔지만, 이미 그렇게 하는 외국 개발자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이 캠퍼스에서 보수적인 일본 모바일게임 시장을 뚫은 <제5인격>이 나왔고, 동접자 25만 명을 모은 <원스 휴먼>이 나왔고, 깜짝 흥행에 성공한 <마블 라이벌스>가 나왔다.
▲ 가이드는 탁구 코트와 사내 리그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수준급의 리그가 펼쳐진다고 그랬다.
▲ 정말 크다. 국내 게임사 사옥 몇 개를 합쳐놓은 사이즈.
▲ 직원이라면 로봇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고.
▲ 복지포인트를 이용해 편의점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 수천 명의 임직원이 근무하다 보니 사내 방송국도 활성화된 모습.
넷이즈와 더불어 중국 게임 산업을 이끌고 있는 텐센트는 어떨까? 이들은 캠퍼스 규모를 넘어서 아예 섬을 짓고 있다. 2019년 텐센트는 선전 바오안구에 땅을 사고 2021년부터 '펭귄 섬' 또는 '텐센트 아일랜드'라고 불리우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우리 돈으로 6조 5,0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해 선전 앞바다에 인공섬을 올리고 그곳에 개발기지는 물론 직원 아파트와 상업단지, 공공시설, 학교 등을 전부 유치시키겠다는 계획이다. 텐센트 요인들은 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텐센트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나 게임 제국이 되어버린 중국 개발사를 상대로 공정한 경쟁을 해보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일까. 이미 텐센트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한국 게임사를 찾기 어렵지 않은가. 한국 게임사 핵심 관계자는 "이미 A부터 Z까지 그들(중국)이 더 잘하게 된 지 수년이 흘렀다"라며 "이미 모두가 이를 인정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라고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A부터 Z까지, 중국에는 <오공>이 있고 급성장세의 미니게임씬이 있다. 중국 미니게임 씬에서는 별도로 취재한 기사들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 텐센트가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맞아 문을 연 'e스포츠' 호텔. 투숙객은 실력 테스트를 비롯한 게임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고.
▲ 공사로 한창인 선전 텐센트 아일랜드의 조감도
게임을 도시의 얼굴로 만들기
기자가 상하이에 머물 때 화두 중 하나는 쉬후이구의 "메타버스 네오월드" 프로젝트였다. 새로 문을 연 게임박물관으로부터 시작해 구이린 공원까지 1.9km 구간을 전부 '2차원 IP게임' 조형물로 꾸며 일종의 테마파크처럼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이다. 미호요를 필두로 릴리즈게임즈, 요스타, 하이퍼그리프, 해피엘리먼트 등의 게임사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길이 1.9km에 달하는 쉬후이구 네오월드에는 <붕괴 3rd> 거대 조형물이 들어섰으며, <명일방주> 테마의 공공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한국도 <블루 아카이브>나 <니케>나 <브라운더스트 2>의 인기 캐릭터들을 한 데 모아 뭔가 만들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남시를 움직일 수 있을까?
광화문의 게임문화축제나 성남시의 GXC 2025 같은 것 말고 상설적으로 게임 팬들이 방문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당장 그 일을 제일 잘하는 기업으로는 한국의 크래프톤이 떠오른다. 이들은 지금 성동구 성수동에 신사옥을 짓고 있을 뿐 아니라, 펍지 성수라는 공간을 상설 운영 중이다. 이미 크래프톤은 같은 동네에 여러 부동산을 매입해 이 곳을 클러스터화하려 하고 있다.
▲ 상하이 "메타버스 네오월드"의 조감도
마치며: 우리는 이만한 거버넌스를 가졌는가
짧은 출장 동안 마주한 중국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거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게임 기업들은 세계를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으며, 그 규모는 이미 한국 개발사의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제2의 오공'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시장의 상황은 발전했고, 내수 시장은 용암 같은 에너지를 뿜고 있다.
외부인 방문객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했다. 그럼에도 거대 기업의 캠퍼스와 인공섬, 그리고 도시 전체를 무대로 만든 네오월드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중국식 콘텐츠 산업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과연 한국은 이런 장기적인 안목의 거버넌스를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