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연암 박지원은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이름을 올렸다. 국경을 넘어 연경과 열하를 기행하며 청나라의 문물을 직접 경험한 그는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기록물을 후대에 남긴다. <열하일기>는 그 자체로 귀중한 사료로 남아있다. 청을 오랑캐로 얕잡아보던 당대의 선비들에게 실학의 가치를 전달했다.
기자는 운 좋게 7월 23일부터 8월 1일까지 중국 항저우와 상하이에 머물며 현지 개발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열흘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기자는 <열하일기>와 연암을 떠올렸다. 막대한 내수시장을 근거 삼아 게임을 비롯한 각종 콘텐츠, 인공지능, 로봇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중국 아닌가.
연암과 기자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비웃을 일이 아니라 무례한 처사에 가까울 터. 기자는 다만 운이 좋게 가게 된 출장에서 중국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싶었을 뿐이다. 다만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한족 여인들의 전족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호질>을 통해서 중화주의를 풍자하는 등 덮어놓고 모든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두루 살핀다.
연암의 발끝도 미치겠지만, 조금이라도 닮고 싶은 마음에 중국에서 보고 겪은 것을 두서없이 정리해 본다.
▲ 항저우의 대표적인 랜드파크 '서호'
"중국에서는 딥시크를 써라"
기자가 방문한 중국 저장성 항저우는 뜨거운 도시였다. 출장 직전, 한국의 KBS는 <인재전쟁: 공대에 미친 중국>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내고 항저우를 비중있게 소개했다.
항저우는 지금 중국 첨단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량원펑은 AI 스타트업 '딥시크'를 발표하며 '딥시크 쇼크'를 불러 일으켰고, 지난달 유니트리는 소비자가 3만 9,999위안(약 780만 원)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발표했다. 저장대학교는 이러한 기술 인재가 모이는 요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국 대학생들은 의대가 아니라 공대 진학을 선망한다는 것이 해당 다큐멘터리의 내용이다.
▲ 항저우 소재의 저장대학교. 딥시크 등 유수의 혁신 기업을 탄생시킨 요람으로 중국인들이 선망하는 대학교로 꼽힌다.
실제로 출장 중 만난 중국인의 딥시크 사랑은 흥미로웠다. 현지인 한 사람은 VPN을 통해 '챗GPT'를 쓰는 기자에게 대뜸 "중국에서는 딥시크를 쓰라"고 채근했다. 이유인 즉, 미국 기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똘똘 뭉쳐 딥시크를 사용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기자와 그 사람이 우리(我们)가 되어야 하는지는 다시 따져봐도 모를 일이다.
기자의 AI에 관한 식견은 짧디짧지만, 이런 중국산 제품 사랑이 '단일대오'를 형성해 하나의 인공지능 모델에 대한 선호로 나타난다면 어마어마한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중화주의자 눈에 한국인은 미국 기업이 만든 AI에 데이터와 돈을 갖다 바치는 사람들인 것인가. 한국인의 챗GPT 사랑에 오픈AI는 서울에 지사까지 설립했다.
▲ 항저우 육소룡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유니트리. 현대자동차 산하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경쟁자로 부상 중이다.
7월 유니트리가 발표한 780만 원 짜리 R1은 '스포츠 전문' 로봇이다. 항저우 시내에서는 R1를 비롯한 유니트리 제품군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기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보지 못했지만, 유니트리를 비롯한 항저우의 로봇 스타트업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 곧잘 시연 행사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광장무를 하는 사람들 사이로 로봇들의 주먹다짐이 펼쳐지는 것이다. 기자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만나지 못했고, 메이투안(美团; 중국의 배달 앱)으로 음식을 주문하면 호텔 방까지 배달하는 로봇은 자주 만났다. 기사가 로봇에게 전달하면, 로봇이 방문 앞까지 음식을 배달해주는 방식이다.
이뿐 아니라 기자가 다녀온 항저우와 상하이에는 무인 자율주행 택시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드론 배달 또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일정 중 대륙에 초강력 태풍이 찾아와서 드론으로 상하이 황싱(黃興)공원으로 피자를 시켜먹겠다는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가이드는 "(드론 배달을) 처음에는 재미 삼아서 시켜먹는 사람이 많았지만, 편리해서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귀뜸했다.
▲ 기자의 숙소 앞으로 배달음식을 배달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로봇. 기종에 따라 얼굴 인증 등을 통해서 주문자를 확인하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
게임사이언스의 근거 '있는' 자신감
AI 기업 딥시크, 로봇 기업 유니트리 등 항저우는 유망한 기술 기업 6개를 묶어서 '항저우 육소룡(六小龍)'이라고 부른다. 육소룡 안에는 <검은 신화: 오공>(이하 오공)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게임사이언스가 포함되어 있다.
기자는 출장이 결정된 순간부터 여러 채널을 통해서 게임사이언스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우리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라는 답변만 받을 수 있었다. 대신 "게임스컴에서 발표가 있을 테니 기대해달라"는 전언과 함께 <오공>의 굿즈가 포함된 굿즈 꾸러미를 사무실로 받았다. 출장을 마친 뒤 동료 기자들과 함께 물건을 나누었다.
현지에서 만난 기자는 게임사이언스에 대해서 "이들이 모바일게임을 만든다고 했을 때 만난 적 있다"며 "<오공>을 처음 발표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외부 접촉을 하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관영 매체가 불러서 나가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형 전략을 쓰고 있다. 단언컨대 육소룡 중에 제일 조용한 것이 게임사이언스다.
▲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 중인 게임사이언스 사옥. 샹산예술공사 건물 한 동을 쓰고 있다.
개발사 게임사이언스는 '은둔형 행보'로 정평이 나있다. 2018년 <오공>의 첫 트레일러 공개 이후 이들은 자신이 할 말이 있을 때만 유튜브나 웨이보 등의 채널에 등장해 할 말을 하고 사라진다. 2023년 IGN이 게임사이언스에 "성차별 논란"을 제기했을 때도, 이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들은 도리어 공개적으로 투정을 부리기도 했는데, 펑지(冯骥) CEO는 <오공>이 2024년 더 게임 어워드에서 2관왕을 차지했음에도 GOTY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내가 괜히 왔다!"(我特么白来了!)며 노골적인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자는 이들의 행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들의 '사실상' 데뷔작 <오공>은 전 세계적으로 2,300만 장 넘게 판매된 것으로 추산된다. 양치(杨奇) AD는 한 공개 석상에서 "게임의 해외 플레이어가 30%에 달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못해도 600만 장이 대륙 밖에서 판매됐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만한 사이즈의 게임을 직접 만들어서 그렇게 많이 판매할 수 있는 게임사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있겠나.
▲ 항저우 중국미술학원에서 열린 <오공> 미술 전시회. 기자는 마지막날 관람할 수 있었다.
첫 트레일러가 발표된 뒤, 중국 전역에서 게임사이언스에 일하고 싶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무실 앞에 무턱대고 이력서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줄을 서기도 했다. 이렇게 전에 없던 엄청난 관심을 받자 게임사이언스 측은 "디자인 업무가 한창이고 개발이 긴박하게 진행 중이니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기를 바란다"(设计繁忙/研发紧张/非请勿入/多多见谅)라는 공지를 게시했다.
이 표시는 기자가 무작정 디디추싱(滴滴出行; 중국의 차량 공유 앱)을 타고 게임사이언스 사옥을 찾았을 때에도 붙어있었다. 게임사이언스는 항저우시에서 창의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육성한 공원 '샹산예술공사'(象山艺术公社)의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 회사는 사진 촬영도 금지하는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고 있어 앞에 서있는 것도 힘들었다. 조금만 서성거려도 경비가 쫓아나와서 "무슨 일이냐" 물었다.
한편, 가오더(高德地图; 중국의 지도 앱)에는 담을 넘어 회사에 몰래 출입한 사람의 후기도 남아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서 게임사이언스 사옥에 몰래 출입했고, 그 기록을 가오더에 인증했다. 일선 개발자들이 외부 활동을 자제하면서 도리어 감추어진 베일을 벗기려는 극성 팬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 게임사이언스는 꽁꽁 숨었지만
▲ 게임사이언스를 제외한 모두는 그렇지 않다. 사진은 샹산예술공사의 홍보물.
▲정말 어딜 가나 <오공> 상품을 만날 수 있었다.
게임사이언스가 조심하는 진짜 이유?
개발사는 자기를 숨기는데, 세상은 게임사이언스와 <오공>을 가만 놔두지 않고 있다. 중국 내에서 판매되는 펩시에는 <오공>의 천명자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항저우 중국미술학원에서도 몇 달 동안 <오공>의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1,000만 위안(약 20억 원)을 들여 만든 작품 600점이 현장을 수놓고 있었다. 참고로 그 중 일부는 지난 게임스컴에서도 소개됐다.
기자는 개발사가 이다지도 은둔 행보를 보이는 진짜 이유를 <오공>이 제시한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오공>은 서유기에서 삼장 일행이 불경을 얻으러 가면서 지나갔던 곳을 새로운 천명자가 찾아다니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과거 삼장과 오공 일행은 각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 줄 알았지만, 플레이어(천명자)가 만나는 곳들은 모두 엉망이 된 상황이다. 이를테면 게임의 첫 배경 관음선원은 불에 타서 없어졌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점에는 요괴들이 떠돌고 있다.
▲ <오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딜 가나 서유기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은 서유기 콘셉트로 꾸며진 패밀리마트
게임의 일반 엔딩은 선대 손오공의 육신을 물리치고 긴고아를 물려받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진 엔딩은 불교의 육근에 해당하는 여섯 히든 보스를 제거하고 오공이 (긴고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죽음을 채택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된다. 원전 '서유기'에서 오공은 투전승불로 천계에 오르지만, <오공>은 천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공>은 천명자가 천계의 뜻이 아닌 '자유'를 찾아 긴고아로부터 해방되는 이야기로 완성된다. 중국에서 이런 메시지를 담은 '검은' 신화가 천만 장 이상 판매되었으니, 이들이 몸을 사리는 것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기자는 천명자가 추구한 자유에 대해서 중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답을 구하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 중 누군가는 기자에게 <붉은사막>은 잘 나올 것 같은지 역으로 질문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검은신화'에 '붉은사막'이라니, 역시 태극권의 나라다.
게임스컴에서 '검은' 신화의 이야기가 '종규'로 확장되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 게임 또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지 눈여겨 볼 만하다. (계속)
▲ 차이나조이의 <붉은사막> 부스. 이 부스는 '제 2의 오공' 칭호가 따라다니는 <팬텀 블레이드 제로> 부스 버금가는 인기를 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