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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1929년 5월 4일~ 1993년 1월 20일)
영국 출신의 배우로 아버지는 영국인 은행가, 어머니는 네덜란드 귀족으로 벨기에에서 태어났습니다. 때문에 유년기에 벨기에-네덜란드-영국으로 가며 성장했습니다. 아버지 성이 원래 러스톤이었으나 후에 햅번으로 개명하여 딸인 햅번도 이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1930년대 파시스트 열풍이 몰면서 나치에 빠져서 집을 나갔고, 오드리 햅번은 어머니를 따라 네덜란드를 이주했습니다. 그 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참고로 외가가 있던 곳이 아른헴... 머나먼 다리의 배경이 되었던 동네로 영국군이 대판 깨진 곳이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오드리 햅번은 영국군 부상병들을 도와줬었고, 이 때문에 전투에 휘말리기도 했었습니다. 이 당시 처절했던 기억 때문에 오드리 햅번은 평생 전쟁 영화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건강하지 않았던데다가 전쟁 중에 고생하여 영양실조에 합병증까지 걸려서 영국에 왔었을 때는 전쟁 난민 구호 홍보 모델이 될 정도로 상태가 많이 않좋았다고 합니다.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20살이 되기도 전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1948년 네덜란드 영화 '더치 인 세븐 레슨'에서 처음 영화를 찍었습니다. 발레리나로 활동을 하기도 했었으나 당시 큰 키(170cm)로 인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몇 편의 영화에서 얼굴이 예쁘장한 무명 배우로 조금씩 인지도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오드리 햅번, 24세, 로마의 휴일
24살 때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을 맡은 영화 '로마의 휴일'(1953년)에서 여주인공을 캐스팅하려고 했다. 원래 여주인공인 앤 공주역은 당대 최고의 미녀라고 칭송 받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맡으려고 했지만, 와일러는 오드리 햅번을 오디션에서 보고 여주인공을 지명함으로써 오드리 햅번은 생애 첫 주연을 맡게 됩니다. 영화는 대성공이었고, 그해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오드리 햅번은 여우주연상을 타게 되면서 단박에 대스타로 급부상합니다.
이듬해에는 영화가 아닌 연극 무대에 도전. 1954년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서도 성공적인 연기를 보여줘 그해 토니 어워드에서 여우주연상도 거머쥡니다.(영화와 연극 모두 휩쓴다는 건 엄청난 실력이라는 뜻) 오드리 햅번이 보여준 연기는 대부분 순수한 여성 역할이었는데 이는 배우의 이미지 때문에 그랬었다고 합니다.
헐리우드판 전쟁과 평화(1955년) 옆에 상대역인 멀 페러는 첫 결혼 상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게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미녀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어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는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본인이 사각턱이라는걸 불만스러워 했고, 본인이 "이런 얼굴로 영화 배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공식적인 인터뷰 기사가 없어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이런 얘기가 주변 지인들로부터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형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엔 성형 수술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경우에는 20세 때부터 영화사의 권고로 코를 좁히는 성형 수술을 시작으로 평생 30회에 걸친 여러 차례의 성형 수술을 받기도 했죠.
1964년 마이 페어 레이디 당시.
1961년 작 티파니에서의 아침. 오드리 햅번은 당시 패션 아이콘이라고 할 정도였고, 햅번 헤어스타일, 검은색 긴장갑 등은 당시 패션 유행 아이템이기도 했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점점 영화 출연 빈도가 줄어들었고,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혼은 그대 곁에(원제: Always)에서 카메오로 출연한 이후 모든 연예계 활동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이후가 중요. 연예계를 은퇴한 이후 오드리 햅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을 시작하며 제3세계의 어려운 이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유니세프 광고에는 항상 오드리 햅번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 어렸을 적 자신이 전쟁으로 고통을 받았던 기억 때문에 전쟁을 끔찍히 싫어했고, 전쟁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항상 찾아다녔습니다. 덕분에 아버지가 나치 동조자였다는 과거의 시달림은 완전히 묻혀져 버렸습니다.
말년에 아프리카 자원 봉사를 나섰던 오드리 햅번
1992년 10월, 오드리 햅번은 소말리아에서 봉사 활동을 마치고 스위스로 가던 도중 심한 복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미국의 병원까지 가서 내려진 진단은 대장암. 몇 차례의 수술을 거쳤으나 암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된 상태였었고, 의사는 소생 불가능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 후 스위스에 있는 본인의 집에서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993년 1월 20일, 잠든채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레고리 펙,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명복을 빌며 조화를 보냈고, 네덜란드 왕실에서도 추모 조화를 보냈습니다. 묘지는 스위스에 있는 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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