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대기권에 진입했지만, 구름이 짙어 대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종간을 당기지 않고 빠르게 하강한다. 폭풍 속에서, 빗방울인지 우박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캐노피를 마구 두드린다. 엑소슈트의 기상 관측 시스템에 따르면, 이 폭풍은 곧 소멸하겠지만 금방 또 다른 폭풍이 찾아올 것이다. 지각 가까이 도달하자, 콜벳이 자동으로 기수를 올리며 호버링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문득 구름이 출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보이는 거였다.
바다다.

콜벳을 자동 조종 모드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설치된 착륙용 해치에 올라가 레버를 당긴다. 해치가 밑으로 내려가자 시계가 넓어진다. 양쪽 하드포인트에 새로 설치한 빔 어레이가 시야를 조금 가리지만, 그래도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영하 92도의 대기와 수시로 몰아치는 과냉각 폭풍 아래, 고요한 바다가 잠들어 있었다. 음성 알림과 함께 HUD에 메시지가 뜬다.
“극한 기온 감지.” 온도계는 영하 92도를 가리킨다. 나는 엑소슈트의 생명유지 장치와 온도 방호 모듈을 완전히 충전하고, 아래로 뛰어내린다.
...

주의: <노 맨즈 스카이> 스토리의 핵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세는 나이로 10살이 된 <노 맨즈 스카이>
2016년 출시된 헬로 게임즈의 <노 맨즈 스카이>는 올해 한국식 세는 나이로 10살이 됐다. 그 사이, 게임 그 자체는 물론이고 게임을 둘러싼 서사도 숱한 변화를 겪었다. 한때 과장 광고의 끝판왕, 나아가 ‘PR 악몽’이라고까지 불렸던 게임은 어느새 ‘반성과 구원’ 서사의 대표 주자가 됐고, 이제야말로 누군가 이 이야기를 묻어두고 묘비에 ‘진부함’이라고 쓸 때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 글이 그 관짝의 못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만큼 <노 맨즈 스카이>의 끊임없는 업데이트 소식은 일종의 연례 행사처럼 되어버렸다. 약속한 것을 지켰네, 할만 한 게임이 됐네, 이런 것이 추가됐고 저런 것도 가능해졌네, 뭐? 탈 수 있는 메카가 추가됐다고? 갑자기? 그런 소식들이 들려온 지도 어언 몇 년, 2025년 8월 27일의 ‘보이저스’ 업데이트로 게임은 출시 후 가장 높은 동시 접속자 수(무려 10 만 명이 넘는!)를 찍으며 스스로 기록 갱신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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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의 핵심은 간단하다. 콜벳이라 불리는 중형 우주선이 추가됐는데, 이 우주선은 이전의 단좌형 전투기에 가까운 1인용 우주선이 아니라,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진짜배기 ‘배’다. 그 외관부터 내부 구조를 마음대로 조립하는 건 물론, 내부도 마음껏 장식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고 다닐 수도 있다.
나만의 함선을 타고 드넓은 우주를 항해하는 것은 이른바 우주 탐험 생존 장르의 핵심 판타지였고, 많은 사람들이 2023년 출시된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의 <스타필드>를 기대한 이유이자 아직도 출시되지 않은 <스타 시티즌>의 펀딩이 그래도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스타필드>는 항해와 탐험이라는 요소가 상당히 결여된 게임이었고, <노 맨즈 스카이>는 출시 9년만에 기술적인 업적을 달성하며 <스타필드>의 존재 가치를 거의 지워버렸다.


생각해보면 <노 맨즈 스카이>는 어느 순간 단순히 ‘과장 광고 했다 두들겨 맞고 뒤늦게 반성해 절치부심 약속 지킨 게임’을 넘어섰다. 현재의 <노 맨즈 스카이>는 2016년 출시됐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됐고 또 되어가고 있으며, 그 정체를 단순히 인터넷 이곳 저곳의 게시물을 뒤지는 것만으로 파악하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다.
이를테면, <노 맨즈 스카이>에서 ‘초반에 돈 쉽게 버는 방법’에 대한 글은 그 글이 쓰인 시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수도 있고, 이제는 더 쉽게 버는 방법이 생겨났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많은 라이브 서비스 게임이 그렇듯, 10년짜리 동접자 그래프의 서로 다른 피크에서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은, 과장 좀 보태면 실은 서로 다른 게임을 플레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각자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경험한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내지는 바뀔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게임의 기본 설정이다.

# 16분이라는 시간
*이하 스포일러 주의
<노 맨즈 스카이>에는 아무도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결말이 매우 혹평받는 메인 퀘스트가 있다. 별로 길지 않은 이 이야기의 요점은, 이 게임 속 세계가 실제로도 그렇지만 설정상으로도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내부적으로 결함이 있는. 기억을 잃은 채 어느 행성에 불시착해 우주를 탐험하며 - 끊임없이 발진기 연료와 워프셀을 만들어가며 - 수수께끼를 파헤치다보면, 플레이어는 ‘16’이라는 숫자와 ‘아틀라스’라는 존재의 이름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된다. 밝혀지는 사실은, 아틀라스는 이 시뮬레이션의 감시자 혹은 실행자로서, 시뮬레이션에 오류가 생길 때마다 이를 리셋해왔지만,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망가진 상태. 그리고 16은 다름 아닌, 다중 우주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남은 시간 16분을 뜻한다.

모든 진상을 알아낸 상태에서 플레이어에게는 2개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아틀라스를 대신해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뮬레이션을 리셋하는 것이다. 말은 리셋이지만 그저 다른 은하계 - 게임에는 256개의 행성이 아니라 은하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 에 모든 부품이 망가진 함선과 함께 또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또 하나의 선택은 재미있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이 16분의 카운트다운이 이상하다는 것을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는데, 16이라는 숫자를 처음 마주하고 아틀라스의 진상을 마주할 때까지의 여정이 족히 수 시간은 걸리기 때문이다. 아틀라스가 존재하는 우주와 이 시뮬레이션된 세계의 시간은 동기화되어 있지 않다. 아틀라스에게는 16분인 것이, 어쩌면 플레이어와 이 시뮬레이션 속 존재들에게는 영원일 수도 있다.
그 무엇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뭘 해야하나? 그때쯤 되면 깨닫는 사실은, <노 맨즈 스카이>가 처절할 정도로 목적이 없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대표주자인 <마인크래프트>부터 시작해 많은 생존 게임들이 그래왔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그냥 ‘존재할 뿐’이고, 그 목적은 언제나 플레이어가 스스로 만들거나 발견해야 한다.
행성을 탐험하고, 기지를 건설하고, 새 기술을 배우고, 좋은 모듈을 발견하며 최적의 배선을 궁리하고, 멋지고 성능이 좋은 함선과 화물선을 파밍하고, 다양한 엑소크래프트를 제작하고, 멋진 콜벳을 만들 부품을 찾아 땅을 파고… 지난 몇 년간 헬로 게임즈가 해온 일은, 이 문장의 쉼표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무언가를 추가하며, 이 목적 없는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과정이었다.


플레이어들은 평균적으로 이 게임을 몇 시간이나 플레이할까? 수 시간? 수십 시간? 또 누군가는 수백 수천 시간을 태워왔을 이 오류 투성이 시뮬레이션이, 헬로 게임즈에게는 최소 9년, 그 개발 기간을 합치면 10년이 넘는 세월의 여정이었을 터. 우리는 분명 같은 우주의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
혹은, 과연 그런가? 전에 필자는 <디아블로 3>의 개발을 다룬 비디오 에세이에서, 하나의 게임을 만드는 데에 10년이 넘는 세월을 바치는 행위의 의미와 후과에 대해 질문한 적 있다. 여전히, 그 답은 미지의 영역에 남아있지만, 적어도 헬로 게임즈는 실패하거나, 포기하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숱한 오류와 실수를 껴안고 계속 존재해왔으며, 심지어 후속작도 발표했다.
지난해 공개된 헬로 게임즈의 신작 <라이트 노 파이어>는 행성 규모의 판타지 생존 게임 - 일종의 자기복제라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지만 - 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개발은, 팬들의 호평을 받은 2024년 ‘월즈’ 업데이트부터 이어진 <노 맨즈 스카이>의 극적인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소규모 팀인 헬로 게임즈는 <라이트 노 파이어>의 개발 과정에서 획득한 노하우와 기술을 그대로 <노 맨즈 스카이>에도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가 미래의 부름을 듣듯,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동안, 망가졌던 과거의 우주도 같이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아마도 <라이트 노 파이어>가 출시되는 그 날까지, 혹은 출시된 이후에도 <노 맨즈 스카이>는 계속 변화할 것이다. 관짝의 못이 되길 바라며 시작한 이 글도 이정표의 한 단계에 불과한 무언가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 지금, <노 맨즈 스카이>의 구원에서 마지막 교훈을 쥐어짜본다면, 그건 다음과 같다.
왼쪽 스틱에서, D패드에서, W키에서 손을 떼지 마라.
계속 존재하라.

# 이어서
…
같은 항성계의 고조 28/G5는, 비록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초고열 호우가 내리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사정이 나은 행성이었다. 녹지에 착륙한 후 분석 바이저를 켜니, 먼저 온 여행자들이 남겨놓은 수많은 전초기지 마커들이 화면을 수놓았다. 하지만 저기 가더라도 그들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주는 넓고 우리는 상대성 이론에 따라 각자의 시공간을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저 기지를 건설한 여행자는 지금 여기로부터 수천광년 떨어진 항성계, 아니면 완전히 다른 은하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수년 전의 일이지만, 나에게는 어제 일어난 일일 수도,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나는 망가진 콘솔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녹슨 금속과 점액을 떼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출력된다.
“9년 늦은 리뷰 점수: 16/1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