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수십 마리 가량의 가축들을 관리하는 '목동'이라고 하면 풀이 가득 자란 산간의 넓은 벌판에 가축들을 풀어놓고 자신은 그늘진 나무 밑에 누워 풀잎이나 보리피리를 입에 문채 한가로이 있는 광경을 떠올리고는 한다.
여러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서 자주 볼 법한 낭만적인 풍경이겠지만, 사실 목축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자신을 따를 수 있도록 수십 마리의 동물을 길들이고, 동물 무리가 일정한 곳에 모여 있거나 한꺼번에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끔 통솔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이를 위해 무리 내 동물들에게 신뢰를 얻고 나아가 무리와 하나가 된 듯한 일체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목축이라는 일의 본질이자 진정한 의의일런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수많은 까다로운 일들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다 쉽고 재밌고 유익한 것으로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듯 목축이라는 일 또한 <허들링(Herdling)>이라는 게임을 통해 동물 무리의 신뢰와 유대를 쌓아나가는 과정으로 재창조됐다. 이제 동물 무리를 이끄는 일의 고단함과 그 속에 깃든 감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차례이다. /작성=쿠타르크 필자(인디게임 블로거),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기자
※ 주의: 본 리뷰는 일정 부분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무리를 이끄는 자의 역할과 책임은 언제나 막중한 법. 사진은 <타이니킨(Tinykin)>

▲ 내 손길에 응해준 무리여,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함께 가로지르는 낭만이여.
# 어린 목동이 되어 동물을 길들이고 나아가자
<허들링>은 <파: 외로운 항해(FAR: Lone Sails)>와 <파: 변화의 파도(FAR: Changing Tides)>를 개발한 스위스의 인디 게임 스튜디오 Okomotive의 신작으로, 어린 목동이 되어 칼리콘이라 불리는 동물을 길들이고 여러 마리의 칼리콘 무리를 이끌며 나아가야 하는 어드벤처 게임이다.
광활한 대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낸 비주얼과 사운드가 눈과 귀에 부드러운 자극을 제공하는 가운데 털 달린 물소를 보는 듯한 칼리콘의 생김새와 온순한 습성, 그리고 단순한 조작을 통해 칼리콘 무리를 이끄는 캐주얼한 게임 플레이가 돋보인다. 그 밖에 한국어를 지원하긴 하나 아무런 대사 한 마디 없이 진행되는지라 언어 의존도는 매우 낮다.
<파> 시리즈의 개발사가 제작한 게임이긴 하지만 두 전작과의 연계성은 그다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진 않는다. 철저히 사이드뷰를 고수했던 두 전작과는 다르게 이번작은 백뷰 시점을 채용했고, 강이나 바다 같은 물가를 배경으로 삼았던 두 전작과는 다르게 평야와 산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스팀펑크 풍의 기계공학적인 느낌이 다분했던 두 전작과는 다르게 자연적이고 주술적인 느낌을 다분히 풍기고 있다.
그나마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주인공의 존재라던가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한 세상 같은 미약한 공통점이 있긴 하나 정작 게임 내에 두 전작을 떠올릴 만한 요소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파>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라고 보는 편이 좀 더 맞을 듯하다.

▲ 탁 트인 대자연의 풍경. 가슴 한 켠이 뻥 뚫리듯 속이 후련해지는 풍경이다.

▲두 전작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사실상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라고 봐야할 듯하다.
게임의 제목인 'Herdling'은 영어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동물이나 짐승의 무리, 혹은 떼'라는 의미를 지닌 'Herd'라는 단어에 '-ling' 접미사를 붙인 일종의 새로이 창조된 단어라고 볼 수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칼리콘 무리를 이끄는 주인공의 역할이나 게임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보거나 무리에 속한 어린 개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혹은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팡이를 흔들어 칼리콘 무리를 이끄는 한편 그 칼리콘 무리에 섞여 함께 나아가는 주인공의 입장과 게임의 양상을 생각해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단어 선택 내지는 창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단어 선택의 수준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게임 플레이에서도 칼리콘 무리를 이끄는 것과 동시에 함께한다는 느낌을 꽤나 잘 살리고 있다. 처음 만난 칼리콘을 길들여 이름을 지어주고 음식을 먹이고 쓰다듬어주는 등 충분한 교감을 나누며, 그렇게 길들인 여러 마리의 칼리콘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본디 소라는 동물의 지능이 높은 편이라는 걸 반영하기라도 하듯 이 게임의 칼리콘 또한 대체로 주인공의 명령을 잘 따르기도 하고 일부 상황에서 주인공의 움직임을 돕거나 스스로 주인공 근처로 모이는 등 영리하고 영특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덕분에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칼리콘 무리가 마치 자신의 가축처럼 느껴져 점차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 덩치가 크고 온순한 동물 칼리콘. 정작 실제로 키우려면 꽤 힘이 많이 들지도.

▲ 잘 길들여 여정을 함께한 칼리콘 무리 또한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이기도 하다.
이렇게 길들인 칼리콘 무리와의 여정은 흥분되면서도 긴장되고, 상쾌하면서도 조마조마하다.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구간과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구간이 게임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탁 트인 벌판에 진입하면 아무런 위험 요소 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나아갈 수 있으며, 쇄도 명령을 통해 칼리콘 무리와 함께 먼 거리를 단박에 질주할 수 있다. 푸른 꽃을 밟아 무리 내의 칼리콘 수만큼 게이지를 채워 반복해서 쇄도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특유의 바람 이펙트와 경쾌하고 한뜻한 배경 음악이 더해져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시원시원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이 게임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좋을만큼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크나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이나 설산 같은 곳에서는 다소 신중한 움직임이 요구된다. 위험 요소를 제대로 피하지 못한다면 일부 칼리콘이 다치거나 혹은 아예 희생될 여지도 있으니 더욱 긴장하게 된다.
이렇듯 전반적인 흥분과 긴장의 완급조절이 제법 잘 이루어지는 편이다. 그리고 이것이 칼리콘 무리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끈끈한 유대로 이어져 게임에 보다 깊게 몰입하게 된다. '무리를 이끄는 자의 책임감'이나 '온순한 동물 무리와의 교감'이라는 소재의 게임으로써의 구현 및 재미와 의미의 창출이라는 측면으로 놓고 보자면 꽤나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경쾌하고 상쾌하고 유쾌한 칼리콘 무리의 질주. 이 게임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 살금살금. 칼리콘 무리가 소중하다면 움직임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 반드시 쾌적하지만은 않은 여정
다만 칼리콘 무리를 이끄는 게임 플레이가 언제나 쾌적하지만은 않다. 우선 직관성과 편의성이 살짝 부족한 조작감 때문에 그렇다. 칼리콘 무리에 이동 명령을 내리려면 무조건 칼리콘 무리의 옆이나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이로 인해 주인공의 포지션을 잡기가 살짝 까다롭고 무리의 이동 방향이 살짝 좌우로 틀어지거나 하는 상황도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무리를 일방적으로 끌고가기보단, 무리의 일부가 되어 함께하라는 의도로 구현된 조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보다 세밀한 조작으로 칼리콘 무리를 편하게 이끌 수 있는 조작 환경이 갖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또한 이런 하나의 개체로 여러 개체를 조종하는 게임에서 발생하는 소위 '무리에서 삐져나오는 개체'가 반드시 나오기 마련인데, 이 게임 역시 그런 숙명적인 한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다시 말해 말 안 듣는 칼리콘 한두마리 때문에 뜻밖의 문제가 생길 여지가 남아있다는 소리다. 최대 12마리의 칼리콘을 길들일 수 있는데, 무리 내 칼리콘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예상 밖의 문제 상황을 겪을 확률도 그만큼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 밖에 동선 설계에 있어서도 썩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진 못한다. 게임 진행 과정에서 어느 쪽으로 가도 딱히 게임의 흐름이 달라지지 않는 무의미한 갈림길이 생각보다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가야할 길을 플레이어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장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불필요하게 헤매는 시간이 늘어나 게임의 흐름이 끊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무리를 이끌고 보다 자유롭게 움직이라는 의도였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어느 정도 동선을 제한하는 편이 더 좋았을 듯하다.

▲ 가장자리에 가깝게 움직이는게 안전하긴 하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 무의미한 갈림길이 은근히 많다. 동선을 좀 더 제한하는 편이 괜찮았을 듯하다.
한편 무리 내에서 조금씩 늘어나는 칼리콘의 수와 더불어 장소의 변화 위주로 진행되는 게임의 스토리는 그 맥락이 제법 부드럽게 이어진다. 특히 장소의 변화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어둡고 삭막하고 좁디 좁은 도시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가득한 광야로 나아가는 초반의 흐름은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마냥 멀어보였던 설산이었지만 험난한 여정 끝에 그 설산에 마침내 도달한 중반 및 후반의 흐름은 반드시 가야할 이상향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도시에서 시작해 넓은 벌판과 울창한 숲과 가파른 산골짜기를 거쳐 설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충분히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다만, 게임의 맥락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구체적인 의미 부여 및 전달은 조금 미진한 감이 없잖아 있다. 모닥불 부근에서 잠든 주인공이 마주하게 된 꿈속의 장면 그리고 주인공과 여러 마리의 칼리콘이 노란 꽃의 힘을 빌려 복원해낸 벽화는 언뜻 보기에는 신비로워 보일 수 있어도 막상 그 의미를 추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 속 세계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오브젝트를 찾기도 쉽지 않다. 구체적인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저연적이고 주술적인 연출의 신비로움 그 자체에 집중하는 편이 좀 더 좋았을 듯하다.

▲ 도시에서 자연으로, 평야에서 산맥으로. 나름 자연스러운 장소의 변화라 할 수 있다.

▲ 의미를 추론하긴 어려워도 충분히 신비로워는 보인다. 그 신비로움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의 여정을 선보인 인디게임
<허들링>은 동물 무리를 이끄는 한편 그 동물 무리와 하나되어 함께한다는 느낌을 나름의 방식으로 잘 살려낸 준수한 인디 게임이다. 자연적이고 주술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는 세계관과 절경을 자랑하는 대자연의 광활한 풍경은 분명 매력적인 구석이 있고, 그런 대자연 속에서 충분히 길들인 동물 친구들과 함께 달려나가는 순간의 쾌감은 아주 뛰어나다.
여기에 동물 무리와 여정을 끝까지 함께하며 교감을 나누는 과정 또한 흥미로우면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만 미묘하게 불편한 조작과 헤맬 여지를 남겨놓은 동선 설계는 확실한 약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의미보다는 신비로움에만 집중한 연출은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다.
혹여나 <파> 시리즈를 플레이해본 이들이라면 이 게임이 <파> 시리즈와는 다소 다른 결을 보이는 게임이라는 걸 어느 정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배경과 분위기, 시점 및 조작방식 등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파> 시리즈를 떠올릴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한 기분을 바라는 이들이나 길들인 동물과 함께한다는 그 마음가짐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3시간에서 4시간 남짓의 짧은 플레이 타임도 가볍게 즐기고 끝마칠 수 있다는 관점으로 보면 꼭 단점으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소위 힐링 감성의 게임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 크고 온순한 칼리콘과의 소중한 교감 과정
- 질주의 흥분과 상실의 긴장이 번갈아 나타나는 절묘한 완급조절
- 무리를 이끌면서 또 무리와 함께하는 게임 플레이의 재미와 의미
-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저해하는 미진한 동선 설계
- 의미 부여보다는 신비로움 그 자체에 집중한 스토리텔링
쿠타르크 (블로거)
2014년부터 10년째 인디게임 리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1,000건이 넘는 게임 리뷰를 작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