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전 세계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게임사들은 '콘솔 전쟁'을 펼쳤다. 이 전쟁의 판도에 따라서 업계의 지형은 크게 뒤바뀌었다. 오늘날은 소니와 닌텐도, 그리고 엑스박스(Xbox)의 3강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엑스박스의 위기설은 물론이고 물리 기기에 대한 회의론까지 왕왕 제기되고 있다.
과거의 콘솔 전쟁에서는 닌텐도와 세가, 소니가 차례로 주도권을 쥐고 경쟁했으며, 그 과정 중 수많은 게임기들이 명멸했다. 지금은 이 전쟁의 변방에 밀려났지만, 세가는 가장 독특한 궤적을 남긴 기업 중 하나다. 가정용 게임기 SG-1000으로 시작해 메가 드라이브의 북미 대흥행, 어려움을 딛고 출시됐던 세가 새턴과 최후의 '동귀어진'이었던 드림캐스트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한국에 1쇄를 발매한 <세가 게임기 40년의 기록: 1983~2023, 세가 게임기 투쟁사>(이하 세가 게임기 투쟁사)는 세가의 40년 동안 콘솔 도전에 대한 기록물이다. 1994년 세가에 입사해 지금까지 근무 중인 오쿠나리 요스케가 자신의 경험담과 사내 문서 등을 교차 검증하며 쓴 책으로 일본에서 <세가 하드 전기>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을 때, 현지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바 있다.
이 책은"세가 콘솔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포스트모템이면서, 동시에 격변하는 게임 하드웨어 산업에서 세가라는 기업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교과서다.

이 책은 한국에서 2023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세가 하드 투쟁사’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이후, 펀딩 참여자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게임 생태계의 곳곳에 남아있던 세가(한국에서는 정확히 삼성전자) 팬보이 출신들의 환호 속에서 준비되었고,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고라 또한 세가의 팬보이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짧게 살펴본 바와 같이, <세가 게임기 투쟁사>를 단순한 팬북의 범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세가의 직원이 직접 세가의 허락을 득해 출시된 반(半) 공식의 문서로 철저한 자료 수집과 문헌 검토, 그리고 세심한 분석을 통해 하나의 기업사를 정리해낸다. 책은 SG-1000에서 시작해 마스터 시스템, 메가 드라이브, 세가 새턴, 그리고 드림캐스트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기종을 다룬다.
각 장은 해당 콘솔이 개발된 기술적 배경, 경쟁 기종과의 성능 비교, 출시 당시의 시장 반응, 마케팅 전략, 그리고 궁극적인 성패에 대한 평가로 구성된다.

이 책이 돋보이는 지점은, 개별 콘솔을 단순히 스펙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이를 둘러싼 조직 내 의사결정 구조와 업계 환경을 함께 분석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메가 드라이브의 북미 시장 성공 뒤에는 세가 오브 아메리카(SoA)의 파격적인 마케팅이 있었고, 반대로 세가 새턴의 조기 몰락에는 본사(SoJ)와 SoA 간의 전략 충돌과 커뮤니케이션 단절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식의 맥락 제공이 대단히 인상 깊다.
누구보다 더 깊은 당사자성을 지니는 저자는 때로는 회고를, 때로는 주석을, 때로는 공식 자료와 당대의 세평(世評) 등을 조합하며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이끌어 나간다. 세가가 내린 급진적인 결론들에 대해 (현직자 입장의 저자는) 다소 모호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때도 있지만, 큰 맥락을 짚는 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세가가 이 책의 출간을 허락한 것을 보면, 생각보다 이 회사가 그렇게 닫힌 회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세가 게임기 투쟁사>는 특정 하드웨어의 성능을 예찬하거나 과거의 명작을 회고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에 세가가 왜 여러 차례 기술적으로 앞섰음에도 시장에서는 실패했는지, 어떤 구조적 실수가 반복되었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세가의 실패는 게임 산업 내부의 정책 결정 과정, 로컬라이징 전략, 타사와의 제휴 실패, 제3자 개발사와의 불화 등 비기술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책에는 세가가 <드래곤 퀘스트 7>을 잃어버린 사연도 실려있다
이 책은 ‘망한 하드웨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경계한다. 드림캐스트는 최후의 세가 콘솔이었지만, 56k 모뎀 내장이라는 파격적인 설계와 독자적인 개발자 친화 플랫폼으로 후속 기기 설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결과적으로 콘솔과 인터넷을 연결하려던 드림캐스트의 시대를 앞서간 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후발 주자들은 이 사례를 참고해 인터넷 연결이 기본이 된 다음 콘솔 시대를 열었다.
편집 구성 면에서도 책은 과거 광고 이미지, 컨셉 아트, 내부 메모, 당시 매체 리뷰 등을 풍부하게 삽입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풀 컬러로 보는 재미가 있으며, 해당 하드웨어에 대한 저자의 총평과, 주요 타이틀이 사진과 함께 실려있어 추억을 자극한다.

자료사진이 많은 편이다
다만, 책의 성격상 독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배경 지식이나 '팬심'을 요구한다. 저자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가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콘솔 '투쟁'의 흐름 속에서 같이 호흡한 게이머가 아니라면 해당 책의 내용이 다소 심드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당대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글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세가는 <쉔무>, <판타지 스타 온라인>, <시맨> 등을 남긴 드림캐스트 이후 콘솔 전쟁의 최전선에서 벗어나 비주기적인 복각 활동에 주력한다. 1994년부터 세가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저자 오쿠나리 요스케는 "드림캐스트는 세가 가정용 게임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최후의 하드"라고 평하면서 "결코 성공한 하드는 아니었으나 이 '꿈의 원석'은 세계에 영향을 주고 그 뒤의 비디오 게임의 역사, 온라인의 역사의 남은 명(名) 하드"라고 평가한다.
위 평가에 가슴이 울리는 게이머라면 <세가 게임기 투쟁사>는 가슴 벅찬 책이 될 것이다. 또는 기자처럼세가 콘솔이 왜 실패했는지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좋은 교보재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