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MMORPG + PK = 토사구팽(兎死狗烹)
요즘 <썬온라인>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계속해서 정신없이 미션을 하다보면 시간은 잘가고 레벨은 올라가 있고 그런 느낌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일반 필드에서 퀘스트를 하다보면 짜증날 때가 많더군요.
저는 벨트헨 마을에서 저기 남쪽 바닷가 근처로 헉헉거리며 달려갔습니다. '경비대장이 XX를 잡아오라고 그랬지? 아 저기가 거긴가보다' 열심히 달려간 내 눈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기 퀘스트 하시나요? 같이 하실래요?'
묵묵부답입니다. 혹시나 중국인인가 해서 살펴보았는데 그것도 아닌 듯 합니다. 한글로 된 이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음...... 조선족일 가능성도 있을테지만 잠수를 하는 듯 해서 그냥 무시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보스 몹을 잡아서 경비대장에게 알려주면 레벨업을 하기 때문에 '어서 나와라' 그러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 분 정도 기다렸을까? 눈 앞에 험상궂은, 사람도 아니고 돼지도 아닌 희안한 생물이 나타났습니다. 타겟을 잡고 공격하려는 찰나, 어라 방금 전까지 쥐죽은 듯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활기차게 움직였습니다.
'퀘스트 하시면 저도 좀 초대해주세용'
'hey may i join?'
'ni hao'
혼자서 되지도 않는 3개 국어를 구사하느라 진땀빼는 사이 그 사람들은 어느새 다시 가만히 서있는 마네킹이 되었습니다.
'오토구나.'
█ 오토사용자들의 등쌀
오토라는 것은 간단한 매크로 프로그램등을 사용해서 게이머가 직접 캐릭터를 조작하지 않더라도 몹을 잡고 회복도 하며 때때로 말도 하는 캐릭터를 말합니다. 모니터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으로 오토 플레이어를 식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운영자들도 그러한 사람들을 가려내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
어디를 가도 오토사용자들이 넘쳐났습니다.
퀘스트를 3개 정도 받았는데 가는 곳 마다 오토 플레이어들이 진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미쳐 보스몹을 잡기도 전에 '슈슈슈슉' 집중 사격으로 쓰러뜨려버리는 무인 캐릭터들. 저는 그들의 등쌀에 못이겨 퀘스트를 포기하고 홈페이지로 들어가 신고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운영자님.
퀘스트 몹 스폰장소에서 매크로 사냥을 하여
다른 사람들의 정상적인 퀘스트 진행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 서버의 각 채널 별 초보 필드에서 많이 벌어집니다.
현재 오름 스폰장소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각 서버/채널을 돌면서
빠른 조치 부탁드립니다.
글을 적고 나서 보니 'Best FAQ' 에 '오토사용자 제재 안하나요' 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모양입니다. 다음날 답변이 왔습니다.
신고를 접수하여 주신 후에 즉각적으로 해당 유저를 조치하는 부분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해당 유저를 일시적인 판단으로 오토프로그램을 사용하였다고 단정지어 관련없는 유저가
피해를 입는 일을 막기위함이오니 오토프로그램 사용자를 신고하여 주신 후
그 조치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는 점 너그러이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오토사용자들의 천국, 한국식 MMORPG
운영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토사용자들이 많은 게임들은 대체적으로 대동소이한 플레이 방식을 보입니다. 처음에 마을에서 캐릭터가 '샤방' 하면서 팬티 한 장(부끄부끄) 걸치고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마라톤이 시작됩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마을 밖으로 뛰쳐나가 몹을 잡습니다. 몹이 옷도 주고, 무기도 주고 물약도 줍니다. 어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그저 한자리에서 계속 사냥을 해도 먹고 살만합니다. 그렇게 잡아댄 몹이 일렬종대로 운동장 수백 바퀴는 됨직합니다.
<썬온라인>은 일부러 자기가 못 입는 옷과 못 쓰는 무기만 계속 주지만 대충 주워입고도 할만 하더군요. 제가 플레이하는 발키리라는 캐릭터의 경우는 한자리에서 근접 타겟만 잡고 공격을 하더라도 사냥이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뭐랄까 게임이 쉬워서 그런지 단순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토플레이가 가능할 만한 조건이 모두 갖춰줘 있더군요.
<썬온라인>에서 오토사용자들 중 대부분은 발키리들입니다.
결국 오토사용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게임,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좀더 세밀하고 잘 짜여진 사냥 과정으로, 혹은 돈과 아이템의 획득과정을 통해 오토플레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오토사용자가 적은 게임들, 특히 PvP에 중점을 둔 게임들을 한번 살펴봤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오토프로그램을 써서 즐길 수 있을만큼 호락호락한 게임이 아닐 뿐더러 오토프로그램처럼 단순한 패턴의 움직임을 보일 경우 다른 플레이어의 좋은 '장난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앞에서 말한 오토사용자가 많은 게임들(이걸 한국식 MMORPG라 부르겠습니다.)에는 PVP 가 없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썬온라인>이 업데이트를 하면서 PK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기존 리니지식 카오시스템일 뿐인데요. 이걸 활성화한다고 합니다. 이게 정말 재미있어서 그렇게 재미있는 것처럼 홍보하는 것일까? 지나가던 고레벨 게이머들을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모두들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1시간 동안 겨우 1명에게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PK 재미있던가요?'
'뭐 그런대로요'
'PK 시스템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네'
음, 뭔가 원하는 답이 안나옵니다. 그렇다고 유도질문을 던질 수도 없구요. 그 후로도 수십여분동안 돌아다니고 귓말도 넣어보고 했지만 모두들 바쁜지 대답조차 없었습니다. 결국 포기했습니다.
█ PK를 넣어 복날을 기념하다?
제 의견을 말하면 솔직히 이런 방식의 PK 는 재미없습니다. 먼저 치면 '너 나를 쳤다 이거지? 너는 이제 공공의 적이야' 그러구서 빨간 딱지가 딱하고 붙어버립니다. PK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인데요. 왜 이런 방식의 PK를 넣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딱! 무릎이 아픕니다.
답은 오토사용자 때문입니다. 응?
오토사용자와 PK 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자 제가 고레벨 게이머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몹만 잡으니 재미가 없습니다. 뭔가 자극이 필요합니다. 오호라 저기 오토사용자가 있구나! 자 열심히 달려갑니다. 벨트헨 마을 입구에서 남쪽 바닷가 텅빈 마을까지 껑충껑충 뛰어서 오토사용자를 한 칼에 내리칩니다. 아이템이 떨어집니다.
'아싸 좋구나!'
운영진은 오토사용자가 오토프로그램을 썼는지 상관안해도 게이머들이 알아서 잡아주니 좋고 저는 떨어진 아이템을 먹으니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고레벨이 되자 너도 나도 레벨업은 안하고 손쉬운 상대를 죽이러 다닙니다. 그 와중에 열심히 레벨업을 하는 다른 캐릭터들도 피해를 입습니다.
'PK범들 좀 잡아주세요'
원래의 게임이 절대로 PvP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PK 라는 것은 뭔가 게임과 아귀가 맞지 않게 됩니다. PK를 넣을 경우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한 경우가 더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 페널티라는 것을 넣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니지식 카오스룰입니다.
<데카론>에서 오토플레이는 일상화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불만이 터져나옵니다. '대체 PK를 하라는 거에요? 말라는 거에요?' 대답은 양쪽 다입니다. PK를 하되 오토사용자만 잡고 조용히 있어야합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 잡고 다니면 '휴, 인생 별거있나' 그런 말을 하게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게임은 게이머라는 좋은 사냥개를 부려서 교활한 오토사용자를 잡습니다. 그리고 페널티를 주어서 그 개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즉, 토사구팽(兎死狗烹)입니다. 게이머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 PK 시스템을 홍보하는 개발사의 간계에 넘어가게 됩니다.
█ 어쩔 수 없는 현실일까?
다른 게임은 어떨까요? 오토사용자가 넘쳐나는 게임들을 볼까요? 너도 나도 리니지식 카오스룰을 사용하는 PK 시스템을 넣고 마치 정말 재미있는 것처럼 홍보를 합니다. 여기 저기 웹진에 광고를 합니다.
'PK 시스템 도입, 함 싸워보자!'
광고에 혹해 다른 캐릭터를 죽인 게이머는 '카오잡아라'라고 소리치며 따라오는 군중에게 짓밟히고 때때로 손해를 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토 사용자는 운영진이 손댈 필요도 없이 잘 처리되고 있습니다. 순간의 영웅심리로 오토사용자를 때려눕힌 게이머는 뒤쫒아오는 자칭 '경찰'들에게 짓밟힙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쉽습니다.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는 게임이 많습니다. 왜? 그거라도 해서 조금 일탈을 즐겨보겠다는 게이머들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요? 오토사용자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방치하는 개발사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분명해 보입니다.
굳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더라도 오토사용자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오토사용자가 적은 게임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장점을 벤치마킹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오늘도 여기 저기서 오토사용자들이 쓰러집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외칩니다. '카오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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