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PC방과 e스포츠가 없었다면 오늘의 엔비디아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해 10월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서 한 말이다. 그는 영어 문장 속 'PC방'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한 음절 한 음절 또렷하게 발음했다.
글로벌 IT 무대의 중심에 선 인물이 공식 석상에서 한국어 고유 대명사를 직접 언급한 배경에는 엔비디아의 초기 성장사가 자리 잡고 있다. 엔비디아의 본격적인 성장기를 한국 시장과 함께했던 만큼, 그에게 'PC방'이라는 단어는 결코 낯설지 않은 익숙한 단어였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엔비디아와 한국 게임 산업의 역학 관계는 큰 구조적 변화를 거쳐왔다.
1990년대 후반, 엔비디아 CEO가 직접 용산 전자상가와 국내 게임사들을 발로 뛰며 자사 제품을 팔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 반대다. 국내외 주요 게임사들이 엔비디아의 하드웨어 인프라와 공급망을 확보하려 줄을 선다.
초기 시장 개척기부터 AI 생태계가 구축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연 젠슨 황과 엔비디아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을까. 용산에서 시작해 차세대 AI 파트너십으로 이어지는 발자취를 정리해봤다.

▶ (출처: 엔비디아)
# 편지 한 통에서 용산의 12톤 트럭까지
젠슨 황 CEO와 한국 시장의 인연은 1996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보낸 국제 우편 한 통에서 시작됐다.
당시 신생 기업이었던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는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구축과 비디오 게임 및 게임 올림픽 육성을 골자로 한 이 선대회장의 미래 비전 편지를 받고 처음 방한해 한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비전은 곧 현실이 되었다. 1998년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흥행을 기점으로 2000년대 초 전국 PC방 개수가 2만 개 규모로 급증하면서, 한국은 고성능 그래픽카드의 핵심 수요처로 부상했다.
젠슨 황은 직접 방한해 용산 전자상가를 찾았다. 그는 회사를 알리기 위해 개별 상가들을 돌아다니며 점주들과 대화를 나누고 명함을 돌리는 현장 영업을 전개했다. 대부분의 PC방용 PC가 용산 전자상가에서 조립·공급됐기 때문에, 소비자와 업주들의 피드백을 직접 듣고 시장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한 행보였다.

▶ <스타크래프트>.
1990년대 말 초기 3D 그래픽카드 시장은 3dfx의 '부두(Voodoo)' 시리즈가 주도했으나, 엔비디아가 리바(RIVA) TNT와 지포스 256을 선보이며 추격했고 2000년 말 3dfx를 인수했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는 ATI(현 AMD)와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엔비디아가 선보인 '지포스 FX' 시리즈가 발열과 소음 문제로 아쉬운 평가를 받은 반면, 경쟁사인 ATI는 라데온 9700과 라데온 9550 등을 흥행시켰다.
시장조사기관 존 페디 리서치(JPR)에 따르면, 이 시기 엔비디아는 글로벌 외장 그래픽카드 시장 1위 자리를 내주며 2004~2005년 한때 ATI에 최대 55.5%의 점유율 우위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후 엔비디아는 성능과 기능을 개선한 후속 제품군을 글로벌 시장에 출시했고, 국내 유통망에서도 치열한 공급 경쟁이 전개되었다.
MBC 뉴스와 인터뷰했던 용산전자의 상인은 "경쟁사인 ATI를 잡으려고 많이 홍보를 했었고, 그때는 그래픽카드가 12톤 트럭 단위로 매장에 입고되어 나갔을 정도"라고 당시의 치열했던 물량전을 회상했다.

▶ 지포스 256.
# TWIMTBP 프로그램을 통한 기술 공조
용산 유통망 중심의 하드웨어 공급 경쟁은 게임 콘텐츠와 하드웨어의 결합이 가진 파급력이 확인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 출발점은 2003년 출시된 엔씨의 3D MMORPG <리니지 2>였다. 당시 엔비디아는 경쟁사 ATI의 추격으로 점유율 수성이 시급했고, 엔씨는 고사양 게임 구동을 위한 인프라 확보가 과제였다.
초기 기획한 삼성전자와의 완제품 PC 공급 사업이 단가 문제로 난항을 겪자, 엔씨는 엔비디아의 '지포스 FX 5600' 그래픽카드 2만 장을 직접 매입해 전국 PC방에 16만 9,000원 특가로 공급하는 프로모션을 단행했다.
이 유통 공조는 상승세를 타던 ATI의 국내 점유율 확장을 정체시키고 엔비디아가 시장 1위 자리를 고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드웨어 업그레이드와 게임 흥행의 연쇄 효과가 확인되면서, 업계에서는 온라인 게임 출시에 맞춘 사전 기술 제휴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 <리니지 2>. (출처: 엔씨)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엔비디아는 자사 GPU 최적화를 보증하는 글로벌 프로그램인 ‘TWIMTBP(The Way It's Meant To Be Played)’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엔씨와의 물량 공조에 이은 다음 기술 협력 대상은 2004년 9월 전략적 제휴를 체결한 넥슨이었다. 양사는 3D 온라인 게임 개발 단계에서 지포스 FX 및 지포스 6 시리즈 기반의 기술적 호환성과 안정성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2004년 출시된 넥슨의 3D MMORPG <마비노기>를 시작으로 출시되는 주요 3D 타이틀에 지포스 환경 최적화를 보증하는 TWIMTBP 로고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술 지원과 제휴는 게임사의 규모나 주력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 2004년 회사소개 자료 중 TWIMTBP 관련 내용. (출처: 엔비디아)
2007년 출시된 네오위즈의 FPS 게임 <아바(A.V.A)>는 언리얼 엔진 3 도입에 따른 그래픽 최적화를 위해 개발 단계부터 엔비디아 기술진과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양사의 기술 협력 성과는 유저층을 겨냥한 ‘지포스 8600GT 아바 패키지’ 출시 등 하드웨어 마케팅 공조로 이어졌다.
나아가 엔비디아는 예당온라인의 <오디션>과도 제휴를 맺고 캐주얼 게임 최초의 전용 그래픽카드 패키지를 선보이며 시장 점유율을 넓혔다.

▶ <아바(A.V.A)>. (출처: 네오위즈)
특히 2008년 출시된 엔씨의 MMORPG <아이온>은 이 같은 기술 협력 구조가 지속된 결과물이었다.
대규모 인원이 한 화면에 모여 전투를 벌이는 게임 특성상 프레임 저하를 막는 그래픽 최적화가 요구되었으며, 엔비디아 기술진은 출시를 앞두고 자사 GPU 구조에 맞춘 렌더링 효율화 작업을 지원했다.

▶ <아이온>.
게임 구동 시 노출되는 TWIMTBP 로고는 해당 게임이 지포스 환경에 최적화되었음을 유저들에게 인지시키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결과적으로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전개된 기술 협력은 국내 온라인 게임 개발 환경이 지포스 칩셋을 기준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 주요 게임사들의 타이틀이 지포스 칩셋에 맞춰 최적화됨에 따라, 유저와 국내 PC방 유통망 역시 하드웨어 도입 시 엔비디아 제품을 우선 채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AI 시대의 주도권 변화와 차세대 기술 공조
과거 국내 PC방 유통망과 게임사들을 상대로 영업을 전개하던 엔비디아의 위상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역전되었다. 2026년 현재 엔비디아는 시가총액 5조 달러를 돌파하며 글로벌 시총 1위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젠슨 황 CEO는 지난해 10월 한국에 방문했다. 그는 방한 일정 중 엔비디아가 한국 게이머들과의 25년을 기념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한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젠슨 황 CEO는 이 자리에서 <스타크래프트>와 국내 PC방 문화, 주요 대형 게임사들의 타이틀을 직접 언급하며 한국 시장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국내 기업 총수들을 무대로 초청해 각 사의 협력 관계를 소개하고 현장 관객들과 소통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젠슨 황 CEO는 "한국의 PC방과 게이머가 엔비디아의 초석이었으며,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 지난해 10월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 참석한 젠슨 황 CEO.
과거에는 엔비디아가 자사 칩셋의 보급을 위해 국내 유통망과 개발사를 찾아다녔다면, 현재는 국내 주요 게임사들이 차세대 AI 기술력 확보를 위해 엔비디아와의 협업을 정식 프로세스로 편입하고 있다.
이러한 주도권 변화는 국내 주요 게임사들의 AI 기술 협업 방식에서도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지난 2025년 4월, 크래프톤 김창한 대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엔비디아 본사를 방문해 젠슨 황 CEO와 회동을 가졌다.
엔비디아를 찾는 국내 게임사의 움직임은 과거 하드웨어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기업으로도 이어진다. 엔씨 김택진 대표는 6월 7일 서울에서 젠슨 황 CEO와 단독 회동을 갖는다.
2008년 <아이온> 출시 당시 그래픽 최적화를 함께 고민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피지컬 AI와 로봇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의제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이다.
회동 소식이 전해진 당일 엔씨 주가가 14% 이상 급등한 것은, 시장이 이 파트너십에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