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이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게임이 여럿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재밌는 점은 올드 IP라 불릴 만한, 역사가 긴 시리즈의 혁신이라 부를 만한 타이틀이 많았다는 것이죠.
앞서 1편과 2편에서 숏폼과의 경쟁 속 라이트 게이머가 줄어든 현상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코어 게이머들이 어떤 타이틀에 더 뜨겁게 반응했는지 그 경향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편 말미에도 남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에 대한 힌트는 생각보다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 40년 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가 내어주고 취한 것
<드래곤 퀘스트 7 리이매진드>는 여러 의미에서 화제작이었습니다. 좋았다는 유저들과 아쉬웠다는 유저들의 양 끝 온도감이 달랐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절대다수의 유저들은 호평을 남겼습니다.(2,176개 스팀 리뷰 중 89% 긍정) 이번 작품으로 40년 된 시리즈에 처음 입문했다는 사람도 적잖게 있었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많았죠.
JRPG 장르 하면 바로 연상되던 답답한 감각을 최대한 덜어냈습니다. 디오라마풍으로 새롭게 빚어낸 비주얼과 귀를 사로잡는 사운드, 원작에서부터 호평을 듣던 절망적인 세계의 묘사도 잘 전달됐죠.
아쉬움을 표현한 쪽은 <드퀘> 시리즈를 오래 지켜봐왔던 올드 팬들입니다. 너무 과하게 친절하다거나, 전략의 깊이가 원작보다 얕아졌다는 의견이 있었죠.
사실 <드퀘 7 리이매진드> 개발진도 이런 반응을 분명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4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 가장 필요한 '혁신'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드퀘>에 새로운 유저들을 들이는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숏폼 시대에 스트레스를 받는 구간이 너무 긴 것을 지양한 점도 한몫을 했죠.
JRPG의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파이널 판타지>가 기술적 혁신을 매번 강조해왔다면, <드래곤 퀘스트>는 전통적인 디자인 안에서도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전략의 깊이를 강조해온 편이었습니다.
그런 특징 덕에 마니아층이 확고히 있긴 했어도, 최신 게임들의 편의성과 비주얼에 익숙한 신규 유저가 문턱을 넘고 <드퀘>에 입문해 턴제 전투의 깊이를 즐기긴 쉽지 않았죠.
스퀘어 에닉스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퀘>를 통해 아버지 세대에서 아들 세대로 유대감을 이어가는 구도의 웹 드라마 스타일 광고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아저씨들의 전유물"로 남을 뻔한 보수적인 시리즈가, 자신들이 가장 오랫동안 지켜온 영역을 과감히 바꿀 용기를 냈기 때문에, 이번 <드퀘 7 리이매진드>가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드퀘 7 리이매진드>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다리를 잘 놓은 작품이 됐다고 봅니다. 기존 팬들이 원하던 전략적 깊이까지 후반부에 배치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기야 했겠지만, 새로운 토끼를 잘 잡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죠.
# 시리즈 역대 최고의 호평 <포켓몬 포코피아>
3월 현재 가장 뜨거운 게임을 꼽으라면 역시 <포코피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포켓몬스터> 자체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IP이기 때문에, '혁신'의 유무와 관계 없이 판매량은 매번 잘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번 <포코피아>는 조금 다릅니다.
게임의 형식과 플레이 구성 측면에서 보면 <동물의 숲>, <드래곤 퀘스트 빌더즈 2>, <마인크래프트> 등 여러 게임의 장점을 한 데 모아둔 모습입니다.
역시나 조합 자체가 사기(?)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이미 익히 아는 재미를 거슬리는 부분 없이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게임 업계분들이 가장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포켓몬> IP를 활용하는 측면에서도, 포켓몬들의 귀여움을 최근 발매된 그 어떤 시리즈들보다도 더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메타몽이 사람의 모습이 되어 황폐화된 세계를 포켓몬들과 함께 재건한다는 콘셉트도 여러 설정과 연출, 플레이 기믹을 통해 계속해서 알고 싶은 신선한 세계관으로 전달되고 있죠.
그 결과 메타크리틱에서도 역대 시리즈 중 최고 평점을 기록하고, 스위치 2 기기와 <포코피아> 키 카드 품귀 현상까지 벌어졌죠. 4일 만에 220만 장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포켓몬> 시리즈 30주년을 맞이하며 선보인 <포코피아>의 도전은, 앞서 <드퀘 7 리이매진드>가 보여준 혁신과는 또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불가사의 던전> 시리즈 등에서도 포켓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포켓몬의 모습으로 모험을 하는 시도를 했었고, 여러 타이틀에 걸쳐 <포켓몬>들의 생태계에 대한 설정을 쌓고 또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도전의 영역이 많았습니다.
이끼 낀 잠만보, 방전된 창백한 피카츄 등을 보며 신선하다고 느끼는 것도, 시간이 지난 미래에 기후변화로 인해 관동 지방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 포켓몬들만 살아남게 됐다는 설정을 보며 흥미를 느끼는 것도, 개발진과 유저 모두 앞선 작품들에 대한 경험 누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켓몬들만 있으니 전투 없이 평화로운 유토피아 <포코피아>가 됐다는, 유저들의 농담 섞인 반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트레이너와 함께 전투한다는 공식이 항상 익숙했기 때문에, 이 변주도 재밌게 다가오는 것이죠.
장르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고, 설정을 바꾸고, 새로운 살을 붙이는 등 개별 포켓몬의 정체성만 남기고 꽤 많은 부분을 과감하게 변경해보는 시도를 한 것이 <포코피아>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장르의 대표주자인 <뱀서>가 신작 <뱀크>로 나아가면서
게임 좋아하시는 분들은 뱀서류라는 장르명을 매우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장르의 창시자가 아닐 순 있어도, 사람들에게 이 장르를 각인시킨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끈 <뱀파이어 서바이버즈>죠.
그 <뱀서>를 만든 폰클의 신작 <뱀파이어 크롤러>는, 완전히 다른 장르에서 새로운 경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뱀파이어 크롤러>는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맵을 탐색하고, 인카운터 전투와 아이템 획득 과정 등을 통해 덱빌딩 로그라이크 형태로 진행되는 게임입니다. <뱀서>와는 완전히 다르죠.
다른 개발사들이 <뱀서>의 특징을 가져올 때, 특징적인 플레이 메커니즘(탑뷰 시점, 화면 중앙에 플레이어블 캐릭터 위치, 적들이 몰려오고, 로그라이크 형태로 스킬 및 강화를 선택해, 오랜 시간 버틴다는 방식)을 주목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폰클은 <뱀서>의 정체성이, 저 여러 특징 전체가 아니라 '위협 속에서도 여러 적을 동시에 쓸어버린다'는 지점에 있다고 봤습니다. 감성만 놓고 보면 핵앤슬래시 장르의 묘사 같지만,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신작 <뱀파이어 크롤러>도 '위기 속 시원한 공격'이 전면에 있거든요.
<뱀서>에서 익히 봐왔던 캐릭터, 배경, 음악 등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오려 한 것도 눈에 띕니다. 개발진은 작년 말경에 기자와 따로 만난 자리에서 IP와 세계관을 특히 강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데모 공개만으로도 많은 이목을 끌고 화제가 됐고, 스팀 넥스트 페스트 당시에도 인기 데모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 형식적 틀보단 IP의 정체성을 남겨야
<드퀘>, <포켓몬>, <뱀서>의 신작 모두 [형식적 틀]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는, [IP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위에서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살을 붙일 부분은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디스이즈게임 창간 21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연작 기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심화된 숏폼과의 경쟁과 게임 이용률 감소, AI 기술의 부상, 들쭉날쭉한 국제 정세, 해마다 늘어나는 스팀 플랫폼의 신작 수 등 좋고 나쁜 신호가 많이 섞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자를 비롯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재미에 '깊이'와 '여운'이 있다고 생각하고, 게임에서의 좋은 경험에 대한 기억과 기대를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외풍이 있을지라도 게임을 만드는 분들의 유의미한 고민 끝에, 이 씬 안에서 더 좋은 게임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TIG 창간 21주년 특집 기사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
▶ ① 숏폼에 밀리는 게임? "영원한 제국은 없어요, 경계를 넓혀야죠" (바로가기)
▶ ② 넓은 의미에서 숏폼도 게임적 경험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바로가기)
▶ ③ 형식과 IP,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현재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