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단순히 잘 만든 게임이 아닌, 우리 이야기를 담은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베트남 게임쇼 '게임버스(GameVerse)'의 하이라이트는 첫날 오전에 열리는 포럼이다. 이 행사에는 베트남 정부와 게임 업계 탑티어 인사들이 총 출동한다. 베트남 게임계가 어떤 상황이며, 무슨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지난해 포럼에서 베트남 게임계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퀄리티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에 집중했다. 올해는 전혀 달랐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었다. 그 대답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게임'이었다. /베트남 호치민=디스이즈게임 시몬(임상훈 기자)
[게임버스 2025 특집]
①오토바이로 나짱에서 호치민까지, 낭만이 살아 있는 게임버스 2025
②세계 1위 다운로드 베트남 게임이 이제 '베트남다움'을 찾는 이유
③43만 개발자 베트남은 '산업 협력' 원했는데, 한국은 '규제 노하우' 들고 갔다
④[포토뉴스] 게임버스 2025, 한국과 쇼걸, 경품과 불쌍한(?) 내 눈
중국을 제친 베트남 게임의 글로벌 성과

베트남 게임 산업을 총괄하는 문화체육관광부 방송전자정보국 국장 레꽝뜨조(Le Quang Tu Do, 사진)는 게임포럼 개회사에서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 대비 두 배 규모인 100개 부스가 운영되고, 미국, 한국, 중국 등 다국적 기업이 처음으로 공식 참여했습니다. 한국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처음으로 베트남 행사에 주목했으며, 5개 외신사가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이는 베트남 게임산업이 세계 중심으로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그의 자신감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구글플레이 동남아시아 생태계 책임자 주세페 스타솔라(Giuseppe Stasolla)가 공개한 수치가 이를 뒷받침했다. "2024년 한 해 동안 베트남산 앱과 게임의 구글플레이 해외 다운로드 수는 57억 건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 발표에 힘을 실은 것은 아이케임 글로벌(iKame Global)의 대표이자 베트남게임개발자연맹(VGDA) 회장인 응우옌꾸엣(Nguyen Quyet)의 발표였다. 2024년 기준, 베트남산 게임은 중국을 제치고 전세계 다운로드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베트남 게임의 글로벌 성과는 구체적인 게임 타이틀로도 입증됐다. 베트남 개발사가 만든 <스크류 퍼즐>, <버스 아웃>, <퍼펙트 타이디> 등은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다운로드 1위를 차지했다. <1945 에어포스>, <메직 타일 3>, <워터 소트 퍼즐>, <카 레이스> 등은 장르별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다.
베트남 게임사 아이케임 글로벌과 ABI은 지난해 다운로드 규모로 세계 10위 안에는 올랐다.이 같은 성과 덕분에 이제는 한국, 중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 게임 회사들이 베트남 게임 개발사를 찾아오고 있다. 구글, 애플, 메타, 틱톡 등 글로벌 플랫폼과 유니티, 앱러빙, 애드저스크, 앱스플라이어 등 B2B 업체들이 베트남 게임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응우옌꾸엣 회장은 이런 변화를 설명했다. "유럽과 인도 등지의 글로벌 게임사들이 베트남 개발 생태계를 배우기 위해 직접 방문하고 있습니다. 특히 AI와 하이브리드 캐주얼 게임 비즈니스 모델, 로컬 콘텐츠 생산 방식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베트남 게임사들은 맨땅에서 시작해 2019년을 기점으로 '서바이벌 단계'에서 '비약적 도약(Breakthrough) 단계'로 전환됐다. 그리고 2025년 현재 글로벌 다운로드 1위를 달리고 있다.
"다운로드 1위에도 베트남의 얼굴은 없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게임계는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게임 퍼블리셔이자 국영기업인 VTC 그룹의 응우옌응옥바오(Nguyen Ngoc Bao)) 총괄이사는 발표에서 핵심을 찔렀다.
"현재 세계에서 베트남 게임의 다운로드 수는 많지만, 그 안에 베트남의 얼굴은 없습니다. 베트남의 전통, 가치, 영웅, 전설이 담긴 게임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검은사막> '아침의 나라'처럼 <우치 더 웨어페어러>가 성공하길.
이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성공 사례와 대조적이었다. 중국은 <몽환서유>를 통해 전통 요소를 주류 게임 콘텐츠로 성공적으로 끌어냈다. 일본은 사무라이, 신사, 가부키 같은 전통 문화를 다양한 게임에 녹여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중국의 '원더링 중국' 프로젝트
중국이 국가 주도로 문화 게임을 육성한 과정은 베트남에게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됐다. 2000년대 초반 넷이즈의 <몽환서유>가 중국적 테마의 상업적 가능성을 입증했고, 이는 이후 정부가 게임을 문화 홍보 수단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본격적인 국가 지원은 2016년 중국 국가신문출판총서의 '원더링 중국'(原創中國風遊戲)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중국 정부는 전통 문화 요소를 반영한 게임에 인증과 자금 지원을 제공했다. 매년 선정된 20~50개 게임들은 판호 심사를 익스프레스로 통과했고, 개발비와 해외 마케팅비를 지원받았다.

그 결과가 <원신>, <검은신화: 오공>, <천애명월도 모바일> 등이다. <원신>은 리월 지역을 항저우와 장가계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고, <검은신화: 오공>은 서유기는 물론 명나라 소설과 둔황 벽화까지 반영했다. 이 게임은 중앙 정부와 항저우 시정부로부터 개발비를 지원받았다.
베트남의 첫 시도와 좌절
베트남도 과거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2010년 VNG가 개발한 <순천검>(Thuận Thiên Kiếm)은 15세기 레 왕조 창시자 레러이(Lê Lợi)의 전설을 기반으로 한 MMORPG였다.
레러이는 용왕으로부터 받은 신비한 검으로 명나라를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이끌었다. 이후 하노이 호수의 거대한 거북에게 이 검을 돌려주었고, 그 호수는 지금도 '호안끼엠'(還劍, 돌려준 검)이라 불린다.

하지만 이 게임은 초기 주목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과금 구조, 콘텐츠 부족, 기술적 한계로 조기 실패했다. 이후 베트남 게임 업계는 자국 문화 콘텐츠보다 <플래피 버드>류 하이퍼캐주얼 게임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2025년, 다시 시작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2025년 게임버스에서 이런 흐름이 본격적으로 드러났을까? 답은 베트남 게임 산업의 성장 단계에 있다. 중국 정부가 게임 개발에 자신감이 생긴 2016년 '원더링 중국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처럼, 베트남도 게임 개발 역량이 강화된 2024년부터 '베트남의 문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지난해 문화 기반 게임 콘텐츠 지원 펀드 논의가 시작됐고, 올해 게임 업무가 정보통신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됐다. '문화'가 더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이다.
게임 개발 역량이 성장하면서 문화적 고민이 시작하는 단계는 다른 산업과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도 ①68년 포드 차량 조립생산 → ②75년 국내 최초 모델 '포니' 생산 → ③80~90년대 자체 엔진 생산, 플랫폼 구축 → ④2006년 BMW 출신 디자이너 영입을 통한 디자인 강화 같은 단계적 전진을 통해 조립회사에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로 도약했다.
몽골 침입사를 게임으로 만드는 이유
게임포럼에서 이런 흐름을 상징하는 대표적 프로젝트로 <하오키동아>(Hao Khi Dong A)가 소개됐다. 고수(Gosu)의 자회사인 기호트 스튜디오(Gihot)가 개발 중인 이 게임은 13세기 쩐(陳) 왕조의 몽골 제국 저항사를 바탕으로 한다.
'하오키동아'는 단순한 게임 타이틀이 아니다. 이는 몽골 제국의 침략을 세 차례 막아낸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Dong A'는 쩐(陳) 왕조의 한자를 '동(東)'과 '아(阿)'로 나눈 것으로, 'Hao Khi Dng A'는 '쩐 왕조의 기개'를 의미한다.
특히 몽골 제국의 2차 침입 당시 원나라 수군을 기습공격해 전함 대부분을 불태우거나 침몰시킨 '쯔엉즈엉 대첩'(1285)은 베트남 역사에서 외세 침략에 맞선 대표적 승리로 기억된다. 한국사의 귀주대첩이나 살수대첩과 비슷한 위상이다.
중요한 것은 'Hao Khi Dong A'가 역사책 속 전쟁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에서는 국가적 단결과 자긍심의 상징으로 자주 쓰인다. 특히 축구 국가대표팀 승리 후 거리 행진인 'di bao'에서 이 구호가 크게 울려 퍼진다.
<하오키동아>를 개발 중인 Gihot 스튜디오
공식 팬페이지에서 게임 운영진은 이렇게 밝혔다. "이것은 개인이나 조직의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커뮤니티 프로젝트이며, 국가 전체의 정신을 결정짓는 프로젝트라고 믿습니다."
정부의 공식 지원
이런 흐름 뒤에는 베트남 정부의 명확한 정책적 뒷받침이 있다.
[정부 지침] 엔터테인먼트 게임 제품 개발 지원에 관하여 (2024년 8월 29일)
"베트남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세계 발전 추세에 부합하는 사이버 공간(엔터테인먼트 게임 분야) 소프트웨어 제품 및 전자 게임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추가적인 메커니즘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검토, 보완 및 제안한다. 베트남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문화 산업 제품 개발을 촉진한다."
비엣레거시 람후인팟(Lam Huynh Phat) 이사는 한국의 <나 혼자만 레벨업>, 중국의 <검은신화: 오공>을 사례로 들며 "게임은 강력한 문화의 흐름이며, 베트남 문화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이머이 대로에서 울린 호치민의 꿈
올해 게임버스가 열린 SECC(Saigon Exhibition & Convention Center)의 입지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년 푸토 체육관에서 벗어나, 호치민 신도시 푸미흥으로 무대를 옮긴 것이다.
푸미흥은 호치민에서 가장 계획적으로 조성된 신도시로, 한인 밀집 거주지가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대로의 이름은 ‘응우옌반린’이다. 베트남 개혁개방(도이머이)을 주도한 지도자의 이름을 딴 이 도로에서, 베트남 게임 산업의 도약을 알리는 행사가 열린 것은 우연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다. 개방과 전환의 상징적 무대에서, 베트남은 게임 산업의 다음 단계로의 전환을 본격화했다.
베트남게임개발자연맹(VGDA) 회장이자, 아이케임 글로벌 대표 응우옌꾸엣은 발표 마지막에 호치민의 글을 인용하며, 베트남의 게임을 통해 베트남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베트남의 산과 강은 아름다워질까요? 베트남 국민들은 오대륙의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영광의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요?"
이는 김구 선생의 '문화강국' 이념이 연상되는 문구다. 케이팝, 케이드라마로 자신감이 생긴 우리나라가 백범의 소망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을 다시 이야기하듯, 이제 베트남도 호치민의 유지를 게임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2025년 게임버스에서 베트남 정부와 퍼블리셔, 개발사가 모두 한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마치며
베트남 게임산업은 이제 단순한 '다운로드 1위'를 넘어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경쟁력을 찾고 있다. 13세기 몽골 침입을 막아낸 '하오키동아'의 기개가 21세기 게임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베트남이 꿈꾸는 문화 강국으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첫 걸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돌아온다. 한국 게임 안에는 '한국의 정체성'이 얼마나 담겨 있는가? 케이팝과 케이드라마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시대, '우리 이야기'가 담긴 퀄리티 게임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