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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접칼럼] 텐센트 게임제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7

생존: 중국의 수치, 텐센트의 실패

임상훈(시몬) 2016-07-05 18:14:03

텐센트가 슈퍼셀을 인수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한국 게임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 텐센트는 한국 게임과 회사를 벤치마크하며 커왔습니다. 많은 질문을 들었고, 답변을 해줬습니다. 역전됐습니다. 이제 우리가 묻고, 벤치마크해야 할 때입니다. 10여 년 봐왔던 텐센트 이야기를 씁니다. 허접한 글이지만, 질문하고 벤치마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디스이즈게임 시몬(임상훈) 

 

1. 생존: 중국의 수치, 텐센트의 실패

2. 수성: 중국 게임 시장의 정리와 텐센트의 1위 등극

 

# 우리만 몰랐던, 중국의 수치


2003년, 한국 온라인게임 중국 시장 점유율 80%!


우리는 좋았다. 들떴다. 못 봤다. 그들의 노여움을.


중국 정부는 화가 났다. 문화 콘텐츠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영화, 드라마, 가요, 소설, 어디를 둘러봐도 전례가 없었다. 국가적 수치였다. 안이했다. 2~3년 사이 훅 들어와, 이렇게 확 퍼질 줄이야.


최근 사례와 비교해보자. 2014년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인기였다. 그래봐야 점유율이 얼마나 됐을까? 중국 정부(중국신문출판광전총국)는 바로 외산 드라마 규제를 강화했다. 최소 2~3개월 걸리는 사전 심의를 도입했다. 인터넷 시대에 그 정도 시간이면 불법 다운로드 쫙 퍼진 후다. 여파는? 한국 드라마 가격이 3분의 1로 떨어졌다.

 

 

대책은? 미리 제작해 심의를 먼저 받는 거였다. <태양의 후예>는 사전 제작돼, 중국 인터넷에 동시 방영됐다. <함부로 애틋하게>, <사임당, 빛의 열기> 등이 사전 제작되는 이유다.


이런 정서가 있는 나라가 온라인게임 시장 점유율 80%를 내줬다니...


담당 공무원은 위, 아래로 압박이 심했을 게다. 골치 아픈 현상은 또 있었다. 우후죽순 게임 운영사들이 생겨났다. 200개가 넘은 회사들이 과당 경쟁을 벌였다. 한국 게임의 계약금과 로열티가 올라갔다. 허접한 게임도 들어왔다. 외화 낭비였다.


텐센트도 그런 200여 개의 고만고만한 회사 중 하나였다.

 

 

# 초보 게임 퍼블리셔 텐센트의 실패


2003년, 텐센트는 돈을 벌고 싶었다.


텐센트는 인터넷 메신저 최강자였다. QQ는 국민 메신저였다. 잘 되는 만큼 트래픽, 설비 비용도 늘었다. 돈은 안 들어왔다. 그때는 그랬다. 최초의 인터넷 메신저 ICQ가 AOL에 인수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컸다. MSN도 마이크로소프트쯤 되니까 운영할 수 있었다.

 

 

텐센트는 차이나모바일 SP(서비스 제공업체)와 싸이월드와 세이클럽을 베껴 만든 아바타 꾸미기(QQ show) 등으로 돈을 벌었다. 메신저 운영 비용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투자나 수익 확보에 매달렸지만, 쉽지 않았다.

 

이때 ‘갑’ 입장으로 텐센트 창업자 마화텅과 연이 닿았던 한국인이 몇 있다. 한참 지난 뒤 땅을 치고 후회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아쉬운 기억이 떠오르는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미르의 전설2>는 마화텅에게 길을 보여줬다. 온라인게임은 확실히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텐센트는 메신저와 시너지를 기대했다. 맞는 판단이었다.

 

 

2003년 3월 <세피로스>(이매직) 수입 계약을 했다. 카이스트 출신들이 언리얼 엔진으로 만든 3D MMORPG였다. 승부를 걸 만했다. 11월 출시. 실패했다. 깔끔하게.

 

너무 서둘렀다. 서버는 불안했고, 클라이언트는 최적화가 안 됐다. 왕빠(PC방)에서 게임이 안 돌아가는 PC가 더 많았다. 두 회사 모두 초보였다. (이후 텐센트는 매우 혹은 너무, 신중하게 바뀐다.)

2003년, 중국 정부는 분노했고, 텐센트는 실패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들도, 우리도. 그들 각자의 대책이 어떤 시너지를 낼 지.



# 무시무시한 판호의 위력


중국 정부의 대책은 간명했다. ‘외산 게임은 규제하고, 국산 게임은 장려한다.’

 

2004년 내내 외산 게임 관련 절차가 늘고, 규제가 많아졌다. ‘외산 게임’이라고 썼지만, 사실상 한국 게임이었다. 2004년 신문출판총서(현 신문출판광전총국)가 개최한 게임산업발전보고 회의에서는 ‘특정한 국가(한국, 편집자 주)의 게임이 중국 게임시장을 독점할 수 없도록 정책을 동원하여 자국의 민족 산업 발전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허접칼럼] 시몬, 신문출판총서를 만나다

 

규제의 핵심의 ‘판호’(서비스 라이선스)였다. 판호는 심의를 거쳐 나왔다. 국산 게임에 비해 외산 게임은 심의가 오래 걸렸다. 판호가 많이 늦게 나왔다. 외산 게임이라도 메이저 업체에 비해 마이너 업체의 발급 시기는 많이 밀렸다. 언제쯤 나올지도 당최 알 수 없었다.


판호가 안 나와 서비스를 못한 한국 게임이 생겨났다. 판호가 늦어져 운영 계획이 틀어진 회사도 속출했다. 메이저 업체에만 할당된 판호 쿼터가 있다는 소문이, 메이저 업체 소싱 담당자들을 통해 흘러나왔다.


정부가 이렇게 챙겨줬으니, 업체도 갚아야 했다. 보답하는 길은 하나였다. 국산 게임 개발. 큰 업체들은 단기간에 결과물을 보여줘야 했다. 베끼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산자이(山寨) 게임’이 등장했다.


[허접칼럼] 짝퉁, 카피 혹은 산자이 ① 

 

 

# 산자이 게임의 등장, 텐센트의 '창조적 모방'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외산 게임은 <미르의 전설2>와 <오디션>이었다. 샨다와 나인유는 두 게임으로 떴다. 두 회사는 <전기세계>와 <슈퍼댄스>를 만들었다. 자기들이 서비스하는 게임의 짝퉁이었다. 욕을 많이 먹었다. 한국 개발사와 법적 분쟁이 일어났다. 그게 중국 정부와 척을 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피로스>를 실패한 텐센트는 자체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게임 개발에 경험이 있는 회사는 아니었다. 만드는 게임은 샨다나 나인유와 다를 바가 없었다. 모방이었다. 2004년 12월 나온 <QQ탕>은 <비엔비>를 베꼈다. 이후 나온 <QQ비차>, <QQ현무>도 <카트라이더>와 <오디션>을 모방했다.

 

[취재] 어느 게 진짜 카트라이더야?

 

모방하는 것까지는 같았다. 결과는 달랐다. 앞에 ‘QQ’가 들어간 게임은 성공했다. <QQ탕>은 론칭 1년여 만에 동시 접속자 70만을 돌파했다. 샨다가 서비스하던 <비엔비>의 기록(68만)을 넘었다. <QQ비차>와 <QQ현무>도 <카트라이더>와 <오디션>을 제쳤다. 수많은 다른 짝퉁들도 제쳤다. 넥슨의 피해가 가장 컸다.


국민 메신저 QQ의 역할이 컸다. 타이틀도 좋았다. 텐센트는 잘 베꼈고, 시장 상황과 유저 니즈에 맞게 잘 변형했다. ICQ를 베낄 때부터 그랬다.

 

모방에 대해서는 중국 내부에도 비판이 많았다.

 

이에 대해 텐센트는 '창조적 모방'이라고 대응했다. 2008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나온 내부 간행물에서 창업자 마화텅은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기업들이 고양이를 보고 고양이를 그대로 그리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반면, 텐센트는 고양이를 보고 나서 그 모방품으로 사자를 그렸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

 

텐센트는 빼어난 모방과 QQ의 플랫폼 파워를 통해 10위권 언저리의 게임 퍼블리셔가 됐다. 선전의 메신저 업체를 무시하던 상하이와 베이징의 게임 퍼블리셔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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