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기자는 RTS 장르에 대해서는 완전 젬병이다. 그 쉽다는 '컴까기' 조차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을 정도다. 남들이 3:1, 많게든 5:1도 거뜬하게 상대하고 있을 때, 기자는 고작 AI 하나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 친구들과 함께 <스타크래프트>를 할때면 '입구막기', '랜덤 디펜스' 같은 유즈맵이나 겨우 즐기던 게 전부였다.
RTS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AI 정도는 호기롭게 쓰러뜨려 보고 싶다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뒤늦게 <스타크래프트 2>나 <스톰게이트>, 개발이 중단된 <배틀 에이스>의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이 높은 진입장벽만 절감했을 뿐이다.
그러다 발길이 닿은 곳이 최근 출시된 신작 RTS <제로스페이스>다. 신작 가뭄에 시달리는 장르에 단비처럼 등장한 이 게임에 눈길이 간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야말로 잘한다는 말을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약 12시간 동안의 게임 플레이 끝에, 그 기대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4개 진영, 6가지 용병 세력이 만드는 무궁무진한 변수
RTS 장르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대목은 단연 진영의 구성이다. 현재 얼리 액세스 기준 <제로스페이스>에는 '프로텍터레이트', '그렐', '군단', '줄' 등 총 4개 진영이 등장한다. 각 진영은 SF 스페이스 오페라 세계관에 어울리는 외형과 명확히 구분되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프로텍터레이트'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클래식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진영이다. 가장 직관적인 운용 방식을 자랑하지만, 보병과 기갑 유닛 모두 치료 및 수리가 가능해 뛰어난 전투 유지력을 보여준다. 유닛 생산 건물에 치유 효과가 내장되어 있고, <스타크래프트>의 보급고 역할을 하는 '보급 플랫폼'에 포탑 기능을 추가할 수 있어 수비 측면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인다.
반면 곤충형 종족 '그렐'은 <스타크래프트>의 저그가 떠오르는 공격적인 세력이다. 점막 대신 넓은 수풀을 퍼뜨려 영역을 확장하며, 다른 진영에 비해 유닛의 생산 및 이동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라 공격적인 운영에서 이점을 가진다.
▶ 우주방어에 특화된 인간 진영 '프로텍터레이트'
▶ 누가 봐도 저그 같은 '그렐' 진영. 가끔 수풀 안에 있을 때 유닛이 잘 안 보인다.
외계 지성 종족인 '군단'은 기대와는 달리 소모전에 특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번에 3기씩 대량 생산되는 기초 유닛 '스랄'로 초반 주도권을 잡고, 후반부에는 강력한 중기갑 탱크와 거대 비행선으로 화력을 퍼붓는 식이다.
마지막 진영인 '졸'은 기존 RTS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체계를 갖췄다. 그렐처럼 전용 영역 내부에서만 건물을 건설할 수 있으며, 일정 시간마다 건물에 유닛이 누적 생산되는 방식을 취한다. 생산할 수 있는 유닛의 가짓수는 적지만, 생산된 유닛을 합체해 고위 유닛을 조합해 내는 메커니즘이 인상적이다.
▶ 저렴한 유닛으로 소모전을 펼치다 후반에 강력한 탱크와 비행선으로 화력을 쏟아붓는 '군단'
▶ 유닛이 생성되는 것이 아닌, 저장된 유닛을 소환하고 유닛을 병합해 상위 테크 유닛을 생성하는 '졸'
진영 특성만으로도 개성은 충분하지만, <제로스페이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진짜 핵심은 6가지 '용병 세력'에 있다. 범용성이 뛰어난 '발카루', 기습과 자원 약탈에 특화된 '자유 해적단', 적 유닛을 조종하는 '아란디' 등 세력마다 각기 다른 고유 유닛과 패시브를 제공한다.
어떤 용병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진영이라도 빌드 타임라인과 전투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칫 정형화되기 쉬운 진영 싸움에 무수한 전략적 변수를 더해주는 <제로스페이스>만의 확실한 차별점이다.
▶ 아래 6개 진영이 용병 세력이다. 각 용병 세력마다 사용 가능한 유닛과 특성이 다르다.
# 초보자도 쉽게 빠져드는 RTS
게임플레이 측면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은 기자 같은 RTS 초보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입문 난이도 자체가 대폭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게임 내 자원은 '헥사이트'와 '플럭스' 2종류로 나뉜다. 헥사이트는 전초기지에 부착된 추출기에서 자동으로 수급되며, 플럭스는 채집 유닛을 통해 인근 광맥에서 채집한다. 채집 유닛은 최대 생산량이 정해져 있고 생성 즉시 광맥으로 자동 이동하며, 파괴되더라도 60초 뒤 자동으로 재생성된다. 자원 채취 최적화에 들어가는 초반 손길을 대폭 줄여 초보자도 곧바로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설계된 셈이다.
자원 관리의 부담을 줄인 대신, 게임은 '제어 타워'를 통해 끊임없는 교전을 유도한다. 맵 곳곳에 배치된 제어 타워는 중립 유닛을 처치하고 점령할 경우 지속적으로 경험치를 제공한다. 이 경험치로 진영 레벨이 오르면 핵심 특수 효과를 해금할 수 있으며, 어떤 효과를 빠르게 확보하느냐가 곧 빌드의 핵심이 된다. 자연스럽게 제어 타워 주변은 극초반부터 치열한 난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이 된다.
▶ 맵 곳곳에 배치된 제어 타워를 두고 쟁탈전이 자주 발생한다.
기본적인 경기 흐름은 전통적인 RTS와 궤를 같이한다. 진영별 특성을 가진 영웅을 소환하고 생산 시설을 구축해 병력을 갖춘 뒤, 적 전초기지를 모두 파괴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면 승리하는 구조다. 하지만 <제로스페이스>가 가진 진짜 차별점은 독보적으로 직관적이고 간결한 조작 체계에서 드러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모든 진영이 완전히 동일한 조작 체계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진영이 바뀌어도 건물의 역할과 유닛 등급에 따른 단축키가 통일되어 있다. 예컨대 어떤 진영을 선택하든 보급고는 W키, 보병 생산 시설은 D키, 기본 보병 유닛은 Q키로 생산된다. 종족을 바꿀 때마다 단축키를 새로 외워야 했던 기존 RTS의 고질적인 진입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춘 요소다.
자동화된 대기열 시스템 역시 조작 부담을 대폭 줄여준다. 건설 명령 시 단축키 없이도 대기열이 자동으로 등록되며, 생산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미리 생산 예약이 가능하다. 자원이 차오르는 대로 병력이 순차적으로 생성되므로, 교전 중에도 넉넉하게 대기열을 걸어두는 것만으로 안정적인 추가 병력 수급이 이루어진다.
▶ 대기열 시스템이 정말 친절하다. 자원이 부족해도 대기열을 걸 수 있어 급할 때는 넉넉하게 대기열을 걸면 멀티태스킹의 부담이 크게 준다.
그렇다고 해서 <제로스페이스>가 깊이마저 얕은 '싱거운 게임'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입문은 쉽지만 정점으로 올라갈수록 파고들 요소가 무궁무진하다. 어떤 영웅을 소환해 판을 짜는지, 레벨업 특성으로 어떤 스킬을 해금하는지에 따라 전략의 줄기가 완전히 달라지며, 고급 유닛들이 보유한 특수 업그레이드는 단번에 전황을 뒤집는 변수를 만들어낸다.
아무리 기본 조작과 생산이 간소화되었다 한들, RTS 본연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적재적소에 영웅과 유닛 스킬을 꽂아 넣는 전투 연출은 결코 만만치 않다. 쉬운 조작으로 진입장벽을 낮추고, 깊이 있는 전략과 교전 피지컬로 숙달의 재미를 살려낸 'Easy to Learn, Hard to Master'의 교과서적인 만듦새다.
▶ 경험치를 모아 레벨을 올리면 특성을 얻을 수 있고 특성을 통해 얻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어떤 특성을 찍고 스킬을 활용할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 "경쟁은 선택일 뿐"
사실 RTS 장르의 초보자 시점에서 게임의 접근을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결국 본인을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다. 초보의 탈을 쓴 채 먹잇감을 기다리는 개미귀신 같은 고인물들 속에서 승리의 쾌감을 만끽한다는 것은 허울 좋은 이상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제로스페이스>는 RTS 입문자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친절한 게임이다. 경쟁은 선택일 뿐, 강요되지 않는다. 실제로 십수 시간 동안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유저와 대전을 치르지 않았음에도, 싱글 플레이와 협동 콘텐츠만으로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RTS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싱글 캠페인은 아직 '절반의 완성'에 가깝다. 대형 기성작에 비해 인게임 컷신 연출이나 한국어 번역이 다소 투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레이어의 선택이 스토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와 다채로운 미션 기믹 등 내실은 단단하게 채워뒀다. 기본 틀이 훌륭한 만큼, 얼리 액세스 과정을 거쳐 연출만 보강된다면 충분히 흡입력 있는 캠페인을 기대해 볼 만하다.
▶ 스토리의 분기점이 있고 플레이어의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은 좋지만
▶ 가끔 이렇게 적절하지 않는 번역이 맥을 끊는다…
PvP 대전에 부담을 느끼는 유저를 배려한 AI 대전 시스템도 돋보인다. 단순한 AI 상대 연습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어의 숨은 MMR을 측정해 유저 수준에 맞춰 AI 난이도를 실시간으로 조정해 준다. 덕분에 일방적인 패배나 허무한 승리 대신, 내 수준에 딱 맞는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단계적으로 실력을 쌓아갈 수 있다.
다른 플레이어와 합을 맞추는 '서바이벌 협동' 모드도 마련되어 있다. 맵 중앙에서 시작해 낮에는 기지를 확장하고, 밤에는 밀려오는 그렐 군단을 막아내는 디펜스 형식의 모드다. 현재 얼리 액세스 기준으로는 하나의 맵만 존재하지만, 향후 업데이트를 통해 신규 맵이 순차적으로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독특하다고 느낀 콘텐츠는 '은하 전쟁' 모드다. 플레이어는 '키퍼 평의회', '에덴 협약', '흑요석 교단'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 그 일원으로서 다른 세력과 행성 점령 경쟁을 벌이게 된다. 행성을 점령하려면 해당 지역에서 AI 혹은 다른 플레이어와 협동해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스타크래프트 2>의 협동전과 가장 유사한 형태지만, 여기에 RvR 요소를 결합해 플레이의 명확한 동기와 목표를 부여한 영리한 설계가 돋보인다.
▶ 3개 세력이 우주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RvR 모드인 '은하 전쟁' 모드.
▶ 행성을 점령하기 위해 수행하는 미션이 다채롭다. <스타크래프트 2>의 협동전과 비슷하달까.
# 입문은 쉽게, 몰입은 깊게… 잘 다듬어지기를 기다리며
이처럼 <제로스페이스>는 RTS 입문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게임이다. 자원 생산 자동화와 직관적인 테크 트리, 전 진영 공통 조작 체계 덕분에 누구나 가볍게 접근해 즐기기에 적합하다. 동시에 용병 세력과의 시너지, 영웅 유닛의 전략적 활용, 유닛 상성과 빌드 연구 등 장르 본연의 깊이 있는 파고들기 요소도 충실히 챙겼다.
물론 완성도 면에서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번역 퀄리티 외에도 가장 눈에 띄는 단점은 정보의 시인성이다. UI가 작고 직관성이 떨어져 전황 정보를 즉각 파악하기 어렵고, 전장 내 유닛의 위치나 교전 상황을 한눈에 식별하기 힘들다는 점은 향후 개선이 필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이 게임의 미래에 기대를 걸게 되는 이유는 얼리 액세스 출시 이후 보여준 개발진의 진정성 있는 행보 덕분이다. 출시 직후부터 유저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패치를 이어가고 있으며, 정식 출시 전까지 신규 맵과 콘텐츠, 편의 기능을 보강하겠다는 로드맵도 명확히 제시해 두었다. 부디 남은 개발 기간 동안 피드백을 원동력 삼아 훌륭하게 완성되어, RTS 가뭄 속 많은 유저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신작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 다듬을 부분이 있긴 하지만, 초보가 즐기기에도 충분히 재밌다. "1:1 초보만"을 외치는 고인물이 없는 새로운 우주 전쟁에 발을 들여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