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에서 리메이크/리마스터와 같은 ‘개선판’의 출시는 이제 전혀 신선한 화두가 아니다. 쟁쟁한 장수 IP를 가진 게임사 중 이런 개선판 카드를 꺼내 들지 않았던 기업이 외려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유비소프트가 지금껏 자사 작품의 개선판을 내놓은 적 없었다는 사실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비는 신작들의 평가가 구작들의 평가를 뛰어넘지 못하게 된 기간이 이제 거의 10년에 달한다. 당연히 내로라하는 과거 성공작들의 위엄에 다시 기대보고 싶어질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여태껏 그런 시도를 실제로 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 (이하 ‘리싱크드’)의 출시는 시리즈의 팬뿐만 아니라 업계 전반의 이목을 끄는 지점이 있다. 수년째 극심한 경영악화로 벼랑 끝에 몰린 유비소프트에게는 반드시 부활의 신호탄이 되어줘야 할 타이틀이다. 그러나 유비의 행보에 실망해 온 일각에선 추억을 파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시각을 내비치는 것도 사실인 상황.
다행히도, 출시에 앞서 실제로 플레이본 <리싱크드>는 제작진이 느꼈던 고민의 결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잘 정돈된 방향성을 지닌 타이틀이다. 원작을 기계적으로 무성의하게 직역하는 대신, 원작이 주던 즐거움을 현대적 디자인에 맞춰 차곡차곡 의역해 낸 정성과 솜씨를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완성된 최종 결과물이 진정으로 ‘현대적’인지에 대해선 다소의 의문부호 또한 남는다./작성=가마괴(리뷰어), 편집=한지훈 기자

# 기술 발전을 활용하는 방식
<리싱크드>의 인게임 세계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최신 작품들에 사용된 ‘앤빌 엔진’으로 제작됐다. 여기서 발생하는 무수한 개선점 중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와닿는 것은 도시 및 바다 환경의 복합적 개선, 그리고 이를 통한 몰입감 향상이다.
중복되는 지점이 거의 없이 다채롭고 방대하게 꾸며진 도시들은 이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다. 덕분에 유저들은 번잡한 도시에서 홀로 신출귀몰하는 강력한 암살자의 낭만을 누릴 수 있었다. <리싱크드>의 도시는 원작보다도 더 미려해진 디테일과 창의적 건물 레이아웃, 자연스러워진 NPC들로 시청각을 즐겁게 자극한다. 당연히 그 안을 누비는 쾌감 또한 커졌다.
광막한 바다의 묘사 또한 원작의 매력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요소다. <리싱크드>의 바다는 향상된 물과 너울 표현, 번개나 물기둥과 같은 자연현상 묘사를 통해 항해와 해상전의 낭만을 원래보다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
▶ 분위기가 확 살아난다.
유비소프트가 그간 쌓아 온 기술적 발전을 시청각적 분위기 향상에만 활용한 것은 아니다. 게임플레이 깊이를 더하는 데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원작의 경우, 암살/잠입 테마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은신 시스템이 꽤 단선적이고 제한적이었던 편이다. 대표적으로 웅크리는 자세를 자유롭게 취할 수 없었고, 은신 판정은 적의 시야가 오브젝트 및 덤불로 가려졌는지에만 영향받았다.
이번 타이틀은 현대적 은신 시스템에 맞춰 더 다양한 변수가 적용되게끔 했다. 주인공이 발생시키는 소음, 주변의 밝기, 기상 조건 등의 추가적인 요소가 발각 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 원작에는 (의외로) 없었던 자유로운 웅크리기 기능까지 더해지면서, 이제 플레이어들은 더 다채롭고 몰입감 있는 은신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
▶ 조명과 소음도 신경쓸 요소가 됐다.
# 과감한 재구성
그런데 사실 <리싱크드>에 적용되는 기술적 개선들은 대부분 그 자체로는 게임플레이의 깊이를 온전히 심화할 수는 없는 유형이다. 그에 상응하는 퀘스트 및 레벨 재설계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들이 소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한들, 적과 적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떨어져 있다면 그 의미가 대폭 줄어든다. 여전히 유저는 암살 시의 소음으로 발각될 걱정 없이 적들을 하나씩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작의 동선을 그대로 따른다면 게임플레이 혁신에도 한계가 따른다. 실제로 개발진은 새 시스템에 맞춰 퀘스트와 맵의 상당 부분을 재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이번 게임에 도입된 또 다른 혁신 요소인, ‘심리스’ 게임플레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원작의 퀘스트 설계는 특정 미션에 대해 은신/암살을 플레이하도록 강하게 유도했던 바 있다. ‘비동기화’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이들 미션에서는 주인공이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하려 시도할 경우, ‘비동기화’ 메시지와 함께 사실상 게임오버가 발동되는 식이었다.
▶ 도구와 상황을 이용해 마음대로 미션을 풀어낼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다르다. 비동기화 개념은 사라졌고, 이제 유저는 어떤 미션이든 원하는 접근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 맵 디자인 또한 양쪽 게임플레이가 모두 유의미한 재미를 선사할 수 있도록 복합이고 균형적인 형태로 새롭게 설계되었다.
물론 개활지가 많거나 은신 요소가 다량 배치되어 있는 등, 특정 유형의 플레이에 더 유리하게끔 설계된 듯한 구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는 유저의 행동을 전적으로 통제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지형지물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요구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런 구간에서 ‘덜’ 적합해 보이는 방향으로 플레이하더라도, 진행이 불가능해지거나 불유쾌해지는 경향은 없다.
▶ 여러 적이 있어도 원하는 대로 플레이한다.
# 고도화된 전투
그런데 여기까지의 내용을 읽었을 때, 원작을 기억하는 유저는 일부 우려를 느낄 수도 있다. 암살 구간에서 전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원작의 전투는 그 깊이 측면에서 호불호가 상당히 갈렸었기 때문이다.
원작의 전투는 반격 버튼 하나로 거의 모든 적을 물 흐르듯 제압할 수 있어, ‘압도적 살상 능력을 지닌 암살자’라는 원초적 낭만을 느끼는 데는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는 당시로서도 지루하고 반복적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을 정도로 단점 역시 뚜렷했던 시스템이다.
하물며 원작이 나온 2013년 이후로 전투 시스템의 트렌드는 크게 바뀌어 왔다. 적의 행동을 읽어야 하는 타이트한 공방 중심의 전투가 현재는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상태다. 원작의 전투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자충수가 될 수 있다.
다행히 개발진 역시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듯, <리싱크드>의 전투 시스템은 원작에 비해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부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싱크드>는 적들의 유형·배치·거리와 날아오는 공격의 유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다음 행동의 순서를 결정해야 하는 현대적 공방 시스템을 차용했다.
▶ 예상했겠지만 빨간 공격은 방어가 안되고 피해야만 한다.
그러나 교전이 상당히 길게 이어지는 최신 <어쌔신 크리드> 게임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본 공격과 기술 및 장비를 사용해 적의 자세(방어)를 무너뜨린 뒤 암살(처형)을 발동해 적을 즉살하는 것이 주된 패턴이기 때문에 훨씬 시원시원한 전투가 벌어진다.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적의 수도 훨씬 많아 속도감이 높은 편이다.
원작에서는 후반부에 나오던 로프 다트를 초반에 주거나, 새로운 다리 걸기, 걷어차기 등의 스킬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선택지를 줌으로써 전투가 단조로워지는 것을 막는다. 이들 기술은 특별한 쿨타임이나 발동조건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연계할 수도 있어 호쾌한 플레이를 가능케 해준다.
이러한 변화들은 원작에 비해 더 세련된 전투 경험을 선사하면서도, 다수의 적을 전광석화로 제압하는 특유의 낭만을 내려놓지 않기 위한 절충 시도로 보인다. 결과는 꽤 성공적인데, 여기에는 지능적으로 대응하는 적 NPC의 AI도 큰 몫을 하는 듯하다.
NPC들은 너무 뻔한 공격이나, 반복적인 트릭에는 잘 당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너무 먼 거리에서부터 다가가며 발차기를 시도하거나, 한가지 기술을 반복해서 걸면 잘 당해주지 않는다. 이는 비교적 소규모의 가벼운 접전에서도 항상 적당한 긴장을 느끼게 해주는 긍정적 요소이며, 전투가 커졌을 때는 일당백의 만족감을 선사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 여러명을 상대할 때의 맛도 잊지 않는다.
# 콘텐츠의 계승과 확장
은신, 전투 시스템처럼 큰 규모의 리모델링이 이뤄진 영역이 있는가 하면 원작을 대체로 계승하되 다소의 확장과 수정을 가해 본래 재미를 심화한 부분도 많다.
대표적인 것은 함대 전투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선수포나 현측포, 혹은 후면의 화약통 발사대가 활성화되는 기본 전투 시스템은 그대로다. 포의 종류나 역할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다만 조준 시 버튼 하나로 각 포대의 탄종을 바꿀 수 있게 되어, 전투의 리듬은 다소 빨라진 감이 있다. 적 함선들의 침몰까지에 걸리는 시간도 다소 짧아진 인상이다.
전편에 없던 ‘부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이들을 고용하면 새로운 전투 기술이 해금되도록 만든 시도 또한 흥미롭다. 부관을 얻으면 원작에 있던 충각 돌격 외에, 피격 순간 (패드기준) X버튼을 누르면 피해가 줄어드는 방어 기술 등이 추가된다. 부관들은 더 나아가 총 10여개의 완전한 신규 스토리를 제공해 이들을 얻는 과정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 부관 캐릭터의 스토리가 추가됐다.
유비소프트의 약점으로 꼽히는 ‘공허한 오픈월드’ 문제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도 특히 가상하게 다가온다.
가령 이번 작품에서는 은신처에 다양한 기능을 하는 시설물들을 만들고 일부는 업그레이드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어쌔신 크리드> 작품들의 RPG 요소를 조금 참고해, 별도의 능력치와 특전을 지닌 아이템을 월드에서 찾는 시스템도 삽입되어 있다.
이들 요소에 의한 성장은 간격이 조밀한 편이어서 매번 괄목할 만한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효능감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밸런싱되어 있다. 그리고 상당수 탐험 활동이 자원이나 아이템을 제공하면서 이러한 성장으로 연계되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드넓은 월드의 탐사가 제법 흥미롭게 느껴지는 편이다.
▶ 다양한 활동이 제법 의미있게 느껴진다.
# 진정 ‘현대적’ 작품일까
<리싱크드>는 13년 된 고전 타이틀의 묵은 때를 상당 부분 잘 벗어던진 작품이다. 원작이 나오던 당시에는 놀라움으로 다가왔을, 혹은 당연하게 여겨졌을 요소들이 현대에는 더 이상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간파하고, 이를 현대적 문법에 맞춰 구현한 역량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의 감각은 원작을 명확히 추억하고 있는 팬층에만 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리싱크드>에 적용된 변화들은 어디까지나 지나치게 올드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다잡는 것에 초점을 맞췄을 뿐, 현세대 게임들에 비교해서도 진일보한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리싱크드>는 종종 젊은 감각과 올드한 감각이 뒤엉키면서 어색한 순간들을 창출해 낸다. 앞서 설명한 전투 시스템이 그 예시다. 고전적 ‘일당백’ 판타지와 현대의 빡빡한 공방전을 균등하게 배합해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현대적 평균치에 빗대어서만 평가해 보면, 게임이 최고 난도에서도 허탈할 정도로 쉽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적들의 배리에이션이 상대적으로 적고, 특정 기술이나 도구에 대한 적의 카운터 액션이 부족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슷한 전투 시스템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배트맨 아캄> 시리즈의 후기 작품들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 원작 스토리가 주는 몽환적(n) 느낌을 다시 느끼게 된다.
스토리라인에서도 요즘 추세에 맞지 않는 올드함이 드러난다. 메인 스토리는 원작을 그대로 따르는데, 편의적으로 축약되거나 생략되는 부분이 워낙 많아 논리적 정합성이 다소 떨어지고 인물들에게 진지하게 몰입하기가 힘들다.
근래의 대작 싱글 게임들이 대부분 밀도 높은 이야기로 승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처럼 ‘건성건성 ’에 가까운 이야기 전개에 반해 콘텐츠 해금 속도는 요즘에 어울리지 않게 느린 점도 특기할 만하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이번 작품이 처음부터 ‘원작 충실’을 철저히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예정되어 있었던 한계로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개발진이 핵심적으로 노리는 것이 ‘올드팬’의 복귀라면, 실패로 간주하기도 힘든 기획이다. <리싱크드>가 <어쌔신 크리드> 팬덤을 결집해 추가적 리메이크의 가능성을 열고, 더불어 유비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가마괴 (리뷰어)
가마괴는 까마귀의 옛말입니다. 반짝이는 걸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