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경쟁과 다문화 유입이라는 시대 환경의 영향을 받았듯, 슈퍼히어로도 시대에 따라 캐릭터와 스토리 방향이 정해졌어요. 초창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미국의 환경은 금주법, 대공황,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어요.
제리 시걸과 조 슈스터의 <슈퍼맨>이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았듯 빌 핑거의 <배트맨>도 그랬는데, <배트맨>은 금주법의 영향이 <슈퍼맨>보다 훨씬 강했어요.
빌 핑거가 <배트맨>을 만든 1930년대 말은 전간기의 끄트머리였어요. <배트맨>이 <디텍티브 코믹스> #27에 등장하고 반년 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해요.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참호에서 모래주머니 벽을 마주한 연합군 병사. 기관총과 포병 화력이 지배한 참호전은 병사의 장비뿐 아니라 지휘관의 장비 휴대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출처: Indiana State Library and Historical Bureau·DPLA)
1차세계대전은 전쟁 양상을 완전히 바꿨어요. 전열보병은 사라지고 참호전이 시작됐죠. 미국은 1917년 참전하는데, 유럽대륙에 발을 딛고 싸운 건 처음이었어요.
당시 미국은 군사기술이 유럽보다 훨씬 뒤처져, 영국, 독일, 프랑스가 발전시키던 탱크, 항공기, 방독면, 강철헬멧이 없어 영국, 프랑스제를 그대로 썼어요. 기관총은 있었지만 전술적 중요성이 달라졌죠. 이 새 장비들은 대부분 대규모 참호전이 낳은 것이었어요.
참호전이 낳은 게 또 있어요. 1800년대에 한 팔을 잃은 영국 장교 사무엘 브라운이 권총, 검 등 여러 장비를 한꺼번에 휴대하려 고안한 '샘브라운벨트'예요.
영국군은 1900년대에 이미 장교 표준장비로 썼어요. 참호전에서 장교는 대규모 인력을 인솔하며 지도와 쌍안경으로 전술기동을 해야 했거든요. 미군도 적응을 위해 장교들에게 이 벨트를 보급했어요.
1918년 전쟁이 끝나자 미군이 귀환했고, 참전용사 다수가 경찰이 됐어요. 1920년대 금주법은 마피아에게 엄청난 돈을 공급해, 그 규모와 화력이 군사조직을 방불케 했어요.
이를 단속할 경찰도 더 강한 무장이 필요해져 허리벨트를 샘브라운벨트로 바꾸고 수갑케이스, 무전기 홀더를 더했죠. 장교의 상징이던 이 벨트는 경찰에게 권위적 이미지도 줬어요.
▶ 1921년경 미국 뉴욕에서 단속 요원들이 압수한 술을 하수구에 폐기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뉴욕시 경찰 부국장 존 A. 리치다. (출처: Library of Congress)
활개치는 마피아는 1920년대부터 형사물, 추리물의 전성기도 만들었어요. 잡지, 소설, 스트립 만화에 경찰, 형사, 탐정이, 그리고 샘브라운벨트를 찬 경찰이 흔히 등장했죠.
가드너 폭스는 <디텍티브 코믹스> #29부터 <배트맨>을 맡으며 샘브라운벨트를 새롭게 해석했어요. 이 벨트는 점차 다양한 장비를 담는 수납도구로 변모해 '유틸리티 벨트'라 불려요.
덕분에 <배트맨>은 '기술적으로 발달한, 과학수사를 하는 비밀탐정' 이미지를 얻고, 초능력 없이도 빌런을 제압하고 위기를 벗어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갖게 됐죠. <도라에몽>의 주머니 같은 역할이에요. 또 1차세계대전에 처음 등장한 항공기, 독가스는 곧 배트플레인과 닥터데스, 조커의 가스무기로 투영돼요.
전쟁은 설정뿐 아니라 활용에도 영향을 줬어요. 가장 인기 있던 <슈퍼맨>은 2차대전 때 전쟁 홍보에 쓰여, 정작 스토리엔 없는 히틀러가 표지에 나오고 참전도 안 한 <슈퍼맨>이 표지에서 탱크를 들어올렸죠. 정부의 전쟁 채권 광고에 <슈퍼맨>과 <배트맨>을 싣기도 했어요.
▶ 1942~1943년경 발행된 <월드 파이니스트 코믹스> #8 표지. 슈퍼맨과 배트맨, 로빈이 어린이들에게 전쟁채권과 우표를 판매하는 모습으로, 슈퍼히어로가 미국의 전시 동원과 선전에 활용된 방식을 보여준다. (출처: DC /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정리하면, 대공황은 약자들이 구원자를 갈망하게 했고 슈퍼히어로가 그 갈증을 풀었어요. 금주법은 마피아를 득세시켜 범죄조직 대 슈퍼히어로의 대결 구도를 만들었고, 전쟁은 새 디자인과 설정에 영향을 줬죠.
금주법이 폐지되고 대공황이 끝나자 2차세계대전이 터지며 애국 히어로가 등장해요. 미국은 1941년 말 진주만 폭격으로 비로소 참전했고, 그 전까진 고립주의로 망설였어요.
그런데 슈퍼히어로 작가엔 유대인이 많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참기 힘들었던 이들은 고립주의 분위기에도 코믹스에서 강하게 나치를 비판하고 공격해요.
1939년 창립된 타임리 코믹스는 1941년 3월판에 <캡틴 아메리카>를, 10월엔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가 <올스타코믹스>에 <원더우먼>을 데뷔시켜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한 바로 그 해죠.
두 캐릭터 모두 성조기를 디자인에 채택해, <원더우먼>은 성조기 의상을, <캡틴아메리카>는 성조기 의상과 방패를 들었고, 자연히 애국이라는 키워드를 갖게 돼요.
이전 히어로들은 전쟁상이 반영돼도 스토리에선 늘 국내에 머물렀지만, 이 해부터 국가의 적과 싸우기 시작해요.
<캡틴아메리카>는 창간호에서 히틀러 얼굴에 펀치를 날려요. <원더우먼>이 처음 나온 <올스타코믹스> #8에선,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미군 조종사 스티브가 나치와 싸우다 파라다이스 섬에 불시착하고, 아마존 여왕인 어머니가 미군을 도울 요원으로 <원더우먼>을 뽑아 미국에 보내요.
▶ 1941년 3월 발행된 <캡틴 아메리카 코믹스> #1 표지. 성조기 복장의 캡틴 아메리카가 히틀러를 가격하는 장면을 통해, 미국의 참전 이전부터 나타난 코믹스계의 반나치 정서를 보여준다. 조 사이먼·잭 커비 작. (출처: Marvel)
애국주의는 다른 스토리에도 나타나요. 같은 <올스타 코믹스>에 등장하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도 'Justice Society of AMERICA', 곧 정의는 아메리카에 있다는 거예요.
<올스타 코믹스> #3에 처음 등장한 이 모임은 같은 회사의 <플래시>, <그린랜턴>, <호크맨>, <아톰>이 결성했고, #4에서 "미국과 민주주의를 위하여!(For America and Democracy!)" 같은 애국 스토리를 받아요.
한편 1940년 초반은 <슈퍼맨>의 대흥행과 함께 수많은 슈퍼히어로가 탄생한 골든에이지의 시작이에요. 사실 골든에이지 슈퍼히어로 대부분은 <슈퍼맨>이 나온 1938년부터 <원더우먼>이 나온 1941년 10월 사이에 출현했어요.
앞서 언급한 히어로 외에 마블의 <네이머>, <휴먼 토치>, DC의 <아쿠아맨>, <그린 애로우>도 이때 나왔죠.
이들은 전쟁 특수를 타고 전 미국의 공적 나치를 상대로 활약하며 인기를 끌었어요. 그러나 너무 많아 시장이 포화됐고, 전쟁이 끝나자 인기가 시들해져 새 인기 히어로가 더는 나오지 않게 돼요.
이 시기 최고는 역시 <슈퍼맨>으로, 1940년 125만 부, 1941년 90만 부를 기록하며 크게 성공했어요. <슈퍼맨>보다 큰 인기를 가져본 유일한 히어로는 <캡틴마블>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마블의 캡틴마블'이 아니에요.
▶ 1940년 발행된 <올스타 코믹스> #3 표지. 플래시, 그린랜턴, 호크맨 등 골든에이지 영웅들이 결성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오브 아메리카’가 처음 등장한 호다. (출처: DC)
✍️ 스칼렛오하라 - 비덕
덕후는 아니지만 주변에 덕후가 많아 덕후들과 어울리며 결국 그들을 경외하고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해리포터에서의 머글과 같은 포지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