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개최된 '빌리빌리 퍼스트룩'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기대작 중,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주인공은 조금 특별하다.
중국 청두에 위치한 소규모 인디 개발사 '소드 판다 게임즈'가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공을 들여 개발 중인 액션 RPG, <소드 세이지: 어웨이크닝>(이하 소드 세이지)가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번 행사에서 체험한 수많은 AAA급 대작들과 쟁쟁한 타이틀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었던 게임 하나만 꼽아달라"고 청한다면 기자는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거창한 수식어나 화려한 포장 없이도, 오직 날카롭게 벼려진 액션의 완성도와 독창적인 손맛 하나로 현장에서 기자의 정신을 완전히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아직 국내 게이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원석 같은 작품이기에, 액션 RPG를 사랑하는 한국의 많은 게이머들이 부디 이 작품의 존재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유독 크다.
과연 <소드 세이지>가 어떤 독창적인 매력으로 기자의 눈과 손을 단번에 사로잡았는지, 시연 버전을 통해 확인한 그 짜릿한 액션의 실체를 소개해 본다.

# 암울한 다크 판타지가 아닌, 가볍고 명랑한 '선협 판타지'
보통 '소울라이크'나 하드코어 액션 RPG라고 하면, 꿈도 희망도 없는 암울한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드 세이지>는 이런 장르적 편견을 깨고 제법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게임의 무대는 중국 고전 기담인 '지괴(志怪)' 소설과 민담을 바탕으로 창조된 오리지널 선협 판타지 세계다.
중국의 옛 설화 속 뛰어난 검술을 가진 흰 원숭이 '백원공(白猿公)' 설화를 모티프로 삼았으며, 과거 백원공이 금지된 천서를 유출한 탓에 세계 곳곳에 끔찍한 자연재해와 요괴들이 창궐하게 되었다는 설정을 깔고 있다.
▶ 중국 설화 속 뛰어난 검술을 가진 원숭이 '백원공'과 그의 실력을 알아본 여인 '월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재앙을 대하는 세계관의 분위기다. 게임은 무너지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눈앞에 닥친 거대한 재앙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요괴에 맞서기 위해 인류가 독자적인 대항 기술을 발전시켜 온 흔적들이 맵 곳곳에 녹아 있으며, 어둡고 암울한 연출 대신 기이하고 다채로운 만남이 강조되는 일종의 '로드 무비' 같은 활기찬 호흡으로 모험을 그려냈다.
플레이어는 평범한 배경을 지닌 주인공 '배삼랑(裴三娘)'의 시점에서 모험을 시작한다. 예기치 못한 기이한 사건들에 휘말리던 그녀는 금지된 천서의 유출 뒤에 숨겨진 거대한 비밀을 파헤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우를 거치며 배삼랑은 스승의 뒤를 잇고, 끝내 사천 지방을 대표하는 새로운 '검성'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 본작의 주인공 '배삼랑'
# '피청입홍'이 만들어낸 <소드 세이지>만의 독창적인 공방
<소드 세이지>의 뼈대는 탐험과 성장이 결합된 액션 RPG다. 스킬 트리의 노드를 해금하고 무기와 부적 등의 장비를 세팅하는 기본적인 RPG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전투의 양상을 가르는 핵심 시스템은 따로 있다. 바로 무기 내구도와 카운터 메커니즘이다.
전투 중 무기의 내구도가 0이 되면 즉시 파괴되며, 파괴된 무기로는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고 공격력도 크게 떨어진다. 파괴된 무기는 검갑(剑匣)에 넣어 제련할 수 있다.
이러면, 다른 예비 무기로 실시간 교체해 전투를 이어가야 한다. 사용한 무기는 검갑 속에서 제련되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전투 중에도 무기를 수시로 바꿔가며 공방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중국 전통 검술에서 영감을 받은 '피청입홍(避青入红)'이라는 독특한 카운터 시스템이 더해져 빛을 발한다. 말 그대로 푸른색으로 빛나는 적의 공격을 정확한 타이밍과 방향으로 흘려내고, 붉은색 기운의 반격을 가하는 공방 시스템이다.
다른 액션 RPG처럼 회피와 구르기로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공격을 정면에서 유연하게 받아내고 빈틈을 노려 반격하는 빠른 속도의 호쾌한 전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흘리기에 성공하면 주인공에게 푸른색 잔상이 붙고
▶ 흘리기 직후에는 붉은색 기운 이펙트가 추가된 반격이 가능하다.
이처럼 독창적인 피청입홍 시스템의 실체는 생각보다 더 정교하다. 상술했듯, 이 게임에는 여타 액션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르기 같은 전통적인 회피 기능이 아예 없다. 적이 공격해오면 선택지는 셋 중 하나다. 정직하게 맞거나, 가드하거나, 혹은 흘려내거나.
공격을 흘려내는 메커니즘은 상당히 독특하다. 키보드와 마우스 기준, 방어 버튼을 누른 채 마우스를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피격 타이밍에 맞춰 정확히 흘리기에 성공하면 캐릭터의 몸에 푸른 기운이 돌며 적의 공격이 완전히 무효화된다.
핵심은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이다. 일반적인 적들의 공격은 방향과 관계없이 받아낼 수 있지만, 정예 적이나 보스는 상·중·하단 세 가지 방향으로 강력한 일격을 가한다.
이때는 공격 궤적에 맞춰 정확히 마우스를 조작해야 한다. 상단 공격은 위로, 중단 공격은 옆으로, 하단 공격은 아래로 마우스를 돌려야 공격을 흘려낼 수 있는 식이다.
이처럼 정확한 방향 조작을 요구하는 공격은 화면에 한자로 방향이 표시된다. 이 경고를 빠르게 파악해 올바른 방향으로 흘려내는 것이 <소드 세이지> 전투의 핵심이자 기본 소양이다.
▶ 일부 적들은 특정 방향의 흘리기를 요구하는 패턴을 사용한다. 패턴은 上/中/下로 표시된다.
▶ 표시된 방향으로 타이밍에 맞게 흘리면 패턴 파훼는 끝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공격을 흘려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공세를 무효화하는 것을 넘어, 흘리기 직후 확실한 반격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을 몰아치면 체력과 함께 스태거 게이지가 깎이는데, 이 게이지를 모두 고갈시키면 일반 공격보다 월등히 강력한 피해를 주는 치명타를 꽂아 넣을 수 있다. 결국 적의 공격을 부지런히 흘려내고 반격해, 쉬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는 것이 공략의 기본인 것이다.
흘리기가 필수적인 두 번째 이유는 일반적인 방어와 달리 무기 내구도를 소모하지 않아서다. <소드 세이지>는 스태미너 대신 내구도 시스템으로 공방의 호흡을 제어한다. 무기 내구도는 적을 공격하거나 가드할 때 감소하며, 오직 흘리기와 흘리기 직후의 반격만 내구도를 소모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내구도 감소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무턱대고 공격만 연타하다 보면 순식간에 무기가 파괴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콤보를 이어가는 중에도 틈틈이 남은 내구도를 체크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공격을 잠시 멈추고 검갑에 무기를 넣어 제련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 생각보다 무기 내구도가 금방 닳아 일반적인 전투에서도 무기 내구도가 바닥나기 십상이다.
이번 시연 버전에서 체험한 무기군은 한손검과 중검 두 종류다. 두 무기는 연계 공격의 형태가 완전히 상이하며, 스킬 트리의 노드를 개방함에 따라 새로운 콤보 루트를 해금할 수도 있다.
특히 같은 무기군이라 할지라도 무기마다 고유하게 붙은 스킬과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맞는 최적의 무기를 파밍하는 것이 필드 탐험의 핵심 목표로 작용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면서 <소드 세이지>만의 독창적인 전투 경험이 완성된다. 상대의 동작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해 흘리기 타이밍을 잡고, 공세를 받아친 직후에는 무기별 최적의 사이클로 빠르게 스태거 게이지를 깎아내야 한다.
반드시 대응해야 하는 상·중·하단 공세를 정확한 타이밍과 방향으로 받아치면서, 틈틈이 체력을 회복하거나 무기의 내구도를 관리하는 멀티태스킹이 요구된다. 다행히 스태거 게이지가 고갈되어 발생하는 그로기 시간이 제법 긴 편이라, 이때를 노려 부족했던 피해량을 채우거나 체력 또는 내구도를 충전할 수 있다.
▶ 스태거 게이지를 모두 깎았을 때 그로기 타임이 제법 길어서 피해를 누적하거나, 재정비할 틈이 생긴다.
# 6분 간의 대결로 확인한 새로운 액션의 정수
이번 시연에 대미를 장식한 히든 보스 '백원공'과의 대결은 <소드 세이지> 전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구간이었다. 검이 아닌 대나무 한 자루를 든 채 주인공을 독대하는 이 노년의 원숭이는 매서운 연격으로 플레이어를 거세게 몰아친다.
선동작이 다소 느려 공격 신호 자체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지만, 몇 번의 연격이 들어올지, 또 어느 방향으로 공격이 들어올지 첫눈에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패턴이 눈에 익기 시작하자, 배삼랑과 백원공의 대결은 촘촘하게 짜인 합을 주고받는 하나의 아름다운 춤처럼 변모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흘려내고 받아칠 때마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이펙트가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동작들이 물 흐르듯 이어지고, 검과 대나무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파찰음이 귓가를 때렸다.
백원공을 상대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오직 그의 미세한 움직임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홀린 듯 마우스를 쥔 손을 내저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무려 6분간 이어진 기나긴 공방 끝에 백원공의 무기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하며 시연이 마무리되는 순간, 등 뒤로 찌릿하게 밀려오는 전율과 쾌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듯 <소드 세이지>는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즐겨왔던 액션 RPG들과는 확실하게 궤를 달리하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것이 고작 25명 남짓한 소규모 인력이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게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부디 정식 출시 버전이 빠른 시일 내에 완성되어, 전 세계의 수많은 액션 게이머들에게 이 짜릿한 손맛을 온전히 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