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롱크스의 드윗 클린턴 고등학교는 미국 만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예요. 마블의 스탠 리, 그리고 만화계 명예의 전당인 '아이스너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남긴 윌 아이스너가 이 학교 출신이에요.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가 도넨펠드와 리보위츠에게 넘어갈 즈음, 가난한 유대인 가정 출신의 빌 핑거는 파티에서 고등학교 친구 밥 케인을 우연히 만나요.
둘은 드윗 클린턴 동창이었어요. 핑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 때문에 삼촌의 신발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고, 밥 케인은 이미 직업 만화가였어요.
그가 연재하던 곳이 바로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의 '뉴 어드벤처 코믹스'였죠. 케인은 잠깐 대화만으로 핑거가 엄청난 덕후라는 걸 알아챘어요.
작화는 뛰어났지만 스토리텔링에서 힘겨워하던 케인은 핑거에게 '고스트라이터' 일을 제안해요. 자신이 연재하던 <러스티와 친구들>의 대본을 써주면 돈을 주겠다는 거였죠.
작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핑거는 곧바로 수락해요. 이후 케인은 더 이상 대본을 쓰지 않았고, 핑거가 케인의 모든 작품 대본을 도맡게 돼요.

▶ 1933년 6월 빌 핑거의 졸업앨범 사진.
디텍티브 코믹스의 편집장 빈 설리반은 액션 코믹스의 큰 성공에 고무되어 앞으로 슈퍼히어로가 대세가 될 거라 예측했어요.
그는 코믹작가들을 모두 불러모아 슈퍼맨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 오면 바로 연재해 주겠다고 공약해요. 이때 '크림슨 어벤저', '샌드맨' 같은 슈퍼히어로들이 만들어졌어요.
케인도 솔깃했죠. 슈퍼맨과 달리 밤에 활동하는 영웅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배트맨'을 떠올렸는데, 그의 배트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오니솝터 같은 기계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어요. 케인은 이 아이디어를 의논하러 핑거를 찾아가요.
핑거는 케인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하려고 해박한 문화적 지식을 동원해요. 1920년대에 크게 흥행한 <마크 오브 조로>의 조로를 참고해, 낮에는 한량이자 부자이고 밤에는 자경단원이 되는 브루스 웨인의 설정을 만들었어요. 동굴 은신처 역시 조로의 비밀동굴에서 가져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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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크 오브 조로> 속 주연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스틸컷(1920)
나중에 케인은 자신이 조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지만, 두 사람의 성향과 능력을 보면 핑거가 만든 설정을 자기 영감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커요. 부하의 아이디어를 오래 고민하던 상사가 그게 처음부터 자기 것이었다고 착각하는 그런 류의 오해로 보여요.
원래 케인이 그린 배트맨 의상은 슈퍼맨의 파란색과 반대인 빨간색이었는데, 핑거가 밤과 어둠에 어울리게 모두 검은색으로 바꿨어요. 여기에 마스크 모양, 뾰족한 귀, 기계날개 대신 망토, 지문을 남기지 않는 장갑 등을 더했죠.
또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와 미국 장군 앤서니 웨인에게서 이름을 따와 '브루스 웨인'을 지어, 품격과 전사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냈어요.

▶ 스코틀랜드 애버딘 시의회 청사(구 마리셜 칼리지) 앞에 세워진 로버트 더 브루스 국왕의 기마상.

▶ 미국 장군 앤서니 웨인의 초상화.
설리반은 핑거가 만들고 케인이 가져온 캐릭터에 아주 만족했어요. 금요일에 낸 숙제를 월요일에 해결해 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했죠.
탐정 전문잡지인 디텍티브 코믹스에 잘 어울렸고, 비주얼적으로도 슈퍼맨과 겹치지 않고 대비되는 점이 훌륭했어요. 배트맨은 곧 인쇄에 들어갈 '디텍티브 코믹스 #27'에 싣기로 결정됐고, 이 이슈의 표지모델로도 정해졌어요.
핑거는 당시 인기 소설 <The Shadow>의 스토리를 참고해 빠르게 대본을 만들었어요.
케인은 설리반의 반응을 보며 배트맨이 대박을 낼 거라 짐작했어요. 그래서 디텍티브 코믹스와의 계약서에 한 조항을 추가하죠.
"배트맨의 캐릭터 소유권은 디텍티브 코믹스가 갖지만, 모든 로열티와 크레디트(이름 표기권)는 밥 케인이 가져간다"는 내용이었어요. 실질적으로 배트맨을 창조한 핑거에게 권리가 돌아갈 여지를 없애버린 거예요. 이 조항은 핑거가 가난 속에 죽을 때까지 철저히 지켜져요.
케인은 이 계약을 아버지와 의논했는데, 언론사에서 일하며 저작권의 중요성을 잘 알던 아버지는 시걸과 슈스터가 슈퍼맨 흥행의 열매를 얻지 못한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배트맨의 흥행과 케인의 금전적 이익을 완벽하게 연결하는 방법을 조언해 줬어요.
슈퍼맨을 창조한 제리 시걸과 조 슈스터는 그 권한을 130달러에 해리 도넨펠드와 잭 리보위츠에게 넘기고 말았죠. 핑거 역시 배트맨의 대부분을 창조했지만 그 대가는 케인이 건네는 소액의 원고료뿐이었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 홀로 쓸쓸히 사망해요.
1930~40년대는 보통 미국 만화의 황금시대라 불러요. 이 시대를 장식한 작품을 만든 건 핑거나 시걸, 슈스터 같은 덕후들이었지만, 보상을 받은 건 사업가들이었어요. 안타까운 시기이기도 했어요.
덕후들을 서로, 또 세상과 연결해 줄 네트워크가 아직 없었고, 르네상스 시대 천재들을 후원하던 선의의 후원자조차 없었으니까요. 이 부조리는 2000년대 네트워크의 발달로 어느 정도 해소돼요.
1939년 3월 30일 디텍티브 코믹스 #27이 발매됐고, 예정대로 표지에 배트맨이 실렸어요. 고든 경감과 친구 브루스 웨인, 그리고 배트맨의 관계가 등장하며, 살인범을 쫓는 탐정물로 시작해 영웅이 악인을 해치우는 히어로물로 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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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경매에 출품된 디텍티브 코믹스 #27. (출처: 헤리티지 옥션)
연재 이후 배트맨의 인기가 치솟자 디텍티브 코믹스는 표지에 반드시 배트맨을 배치하게 돼요. 처음엔 표지모델로 쓰거나, 글자로 에피소드를 언급하거나, 상단에 배트맨 아이콘을 다는 식이었죠.
그러다 #35부터는 이후 모든 이슈에 배트맨을 표지모델로 고정해요. 첫 등장 1년 뒤인 #38에서는 사이드킥 로빈의 등장과 함께 판매량이 두 배로 뛰었어요.
인기가 커지자 디텍티브 코믹스는 슈퍼맨의 전례를 따라 단독 코믹북 발행을 결정했고, 배트맨 단독 코믹북은 1940년 4월 25일 출판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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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트맨 단독 코믹북(1940)
해리 도넨펠드는 이후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 디텍티브 코믹스, 그리고 자신이 투자한 또 다른 회사인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를 모두 통합해 '내셔널 코믹스 퍼블리케이션즈'를 세워요.
최대 히트작인 슈퍼맨과 배트맨이 모두 디텍티브 코믹스 소속이었던 터라, Detective Comics에서 따온 DC가 회사 로고 한가운데에 박혀요. 그리고 1977년, 우리가 아는 DC코믹스로 이름을 바꾸죠.
1946년 이 회사에 합병되는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는 앞서 이스턴 컬러 인쇄소에서 역사상 최초의 코믹북 표준을 만든 맥스 게인즈가 도넨펠드의 투자를 받아 1939년 세운 회사예요. 이 회사 역시 훗날 크게 성공하는 히어로들을 많이 만들어 냈어요.
원더우먼, 플래시, 그린랜턴이 모두 여기서 탄생했고, 마블 <어벤저스>의 원조격인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도 이 회사의 잡지에서 탄생했어요.
✍️ 스칼렛오하라 - 비덕
덕후는 아니지만 주변에 덕후가 많아 덕후들과 어울리며 결국 그들을 경외하고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해리포터에서의 머글과 같은 포지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