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내 일자리를 빼앗을까?"
게임 업계 종사자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질문이다.
넥슨코리아의 이지영 내러티브 기획자는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속 주인공 릭 데커드의 "내 경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는 대사를 인용하며 이 불안을 담담하게 꺼내 놓았다.
불안에 맞서는 방법으로 이지영 기획자가 선택한 것은 생성형 AI와 직접 부딪혀보기였다.
게임 내러티브 기획의 세 축인 세계관 설정, 시나리오 작성, 퀘스트 설계에 AI를 실무로 적용하며 몸소 발견한 것들, 'AI가 잘하는 것'과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을 이번 NDC 2026 강연에서 나눴다.

▶ 이지영 넥슨코리아 내러티브 기획자.
# 방대한 기반 자료가 결정하는 AI의 세계관 창조
이지영 기획자가 먼저 공유한 것은 세계관 설정 단계의 사례였다.
판타지 세계관 속 도박 도시 '엘데일'의 설정 기획에 AI를 활용한 결과, 179자의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약 2분 뒤 1만 2천 자 분량의 초안이 생성됐으며 그중 70%는 실무에 즉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과물은 단순히 2분 만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6명의 기획자가 5시간 이상 진행한 회의록, 인간이 쓴 아이디어 기획서, 타 도시 설정 기획서 포맷 등 13만 자 이상의 고맥락 자료가 있었다.
참석자들의 경력을 합치면 80년이 넘는 노하우가 담긴 데이터였다. AI는 이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빈 부분을 유창하게 채워냈다.


반면 같은 세계관 설정 파트에서 귀족 캐릭터 '하일든 자크'의 설정 작업은 달랐다.
기반 자료가 하나뿐이었고 캐릭터 관련 내용도 부족했던 탓에 AI는 시나리오 속 마법문의 대사를 하일든 자크의 대표 대사로 잘못 지정했다.
결국 AI 결과물의 품질은 인간이 제공하는 기반 자료의 맥락 밀도에 비례한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회의록을 잘 정리해 두는 것만으로도 초안 품질을 높일 수 있지만, 내용이 앞뒤 맥락에 맞는지 검토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 데이터 '평균화' 한계… 재미 판단은 인간의 몫
이지영 기획자는 시나리오 작성 단계에서도 AI를 활용했다. AI는 기존 대본을 다듬는 조수 역할을 나름대로 해냈다.
요청에 따라 재치 있는 비유나 예상치 못한 단어 조합 등 유머 기법을 분석해 프롬프트를 도출하고, 인간이 쓴 대사를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수정해 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유머 에피소드를 창작하는 시도에서는 반복적인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실패했다.
그 원인은 AI의 구조적 특성에 있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며 가장 그럴듯한 확률을 찾아 '평균화'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희극 이론에서 웃음은 기대에서 벗어난 예측 불가능한 의외성과 부조화에서 발생한다. 다음에 올 법한 뻔한 전개를 생성하는 데 익숙한 AI는 이러한 의외성을 스스로 설계하기 어려웠다.
이지영 기획자는 단순히 "더 웃기게 해줘"라고 지시할 것이 아니라, "길 가다 미끄러져서 몸 개그를 하게끔 해줘"처럼 구체적인 상황을 인간이 먼저 설계해야 함을 깨달았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판단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을 웃겨야 하는 인간 기획자의 몫이며, AI는 그 결정을 빠르게 수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 퀘스트 자동화, 기획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나
AI의 뛰어난 수행 능력은 반복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퀘스트 데이터 작업에서 가장 실질적인 효과를 보였다.
기획자가 자연어로 이야기 흐름을 작성하면, AI가 이를 변환하고 NPC나 아이템을 담당하는 각각의 AI 에이전트들이 알아서 데이터를 생성해 하나의 퀘스트로 통합했다.
실제 시범 구현 결과, 기획서 입력만으로 언리얼 엔진 맵에 몬스터가 배치되고 퀘스트 수락과 완료 조건 달성까지 플레이 가능한 수준으로 자동 생성됐다.
데이터 생성에 소요되던 시간이 상당 부분 단축되면서 기획자들은 게임의 플레이 감각을 조율하고 재미를 깊이 있게 고민하는 폴리싱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됐다.


복잡한 현실의 맥락과 문화적 차이, 라이브 게임의 운영 이슈 등을 AI의 토큰 안에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앞으로의 창작자에게는 수많은 맥락을 읽어내는 '통찰력'과 재미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상상력', AI의 결과물 중 최적을 고르는 '판단력', 그리고 의도를 정확히 지시하는 '표현력' 같은 역량들이 중요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지영 기획자는 기원전 387년, 사람들이 문자의 발명을 두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할 것이라며 우려했던 일화를 언급했다.
문자의 발명이 더 뛰어난 사고력의 발전을 가져왔듯, AI의 등장 역시 인류의 능력을 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가 어떤 도구를 쓰든 어떤 기술을 쓰든, 우리는 세계와 인간, 삶과 사랑, 감정과 감동을 전하는 스토리텔링의 꿈을 꾸고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스토리텔링을 함께 즐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