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 게임을 가지지 못한 회사들은 아시다시피 한 10년 가다 보면 뭔가 자꾸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박용현 넥슨게임즈 대표이사가 던진 이 한 마디는, 장수 흥행작 없이 단일 프로젝트에 의존해온 개발사들이 시장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해왔는지를 압축한다.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 이경혁 게임 제너레이션 편집장과 나눈 대담 ‘서로 다른 게임을 동시에 개발한다는 것’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단일 프로젝트 구조의 한계를 직감한 넥슨게임즈가 다장르 병렬 개발 체제로 전환하기까지, 인력 운영과 라이브 서비스 관리의 현실적인 과제들을 박용현 대표가 직접 풀어놓았다.

▶ 이경혁 게임 제너레이션 편집장(왼쪽)과 박용현 넥슨게임즈 대표이사(오른쪽).
# 시장 양극화와 단일작 중심 모델의 구조적 한계
한국 게임 업계의 전통적인 개발 모델은 하나의 온라인 게임을 런칭한 뒤, 전체 개발 인력을 해당 게임의 라이브 서비스에 투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차기작 개발까지 보통 6~7년이 소요되어, 10여 년간 출시작이 두세 개에 그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메가 히트급 장수 IP를 보유하지 못한 제조사의 경우, 이러한 공백기를 버티지 못하고 시장에서 도태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
최근 글로벌 게임 시장은 모든 지표에서 정점을 찍는 초대형 타이틀과 유저의 특정 니즈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포커싱 타이틀로 극단적인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이로 인해 완성도나 개성이 애매한 중간 규모의 프로젝트들은 설 자리를 잃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었다.
넥슨게임즈의 다작 병렬 프로젝트 전개는 이러한 양극화 시장에서 기업의 리스크를 분산하고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실제로 넥슨게임즈는 현재 <V4>, <히트2>, <블루 아카이브>, <퍼스트 디센던트>, <서든어택> 등 5개의 라이브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총 5개의 신규 프로젝트를 동시에 준비 중이다.
MMORPG부터 서브컬처, 액션, 슈팅까지 다양한 장르를 동시에 가동하는 이러한 규모는 양극화된 시장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기업의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이다.
시장 일각에서 제기하는 '하나의 프로젝트에만 올인하는 선택과 집중이 효율적이지 않냐'는 시각에 대해 박용현 대표는 구조적 현실을 들어 반박한다.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은 모델은 강력한 '오너 드리븐(Owner-driven)' 기업 구조와 메가 IP를 보유한 특수한 상황에서만 리스크 감내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일반적인 기업 환경에서는 대박작 없이 10년의 개발 공백기와 자금 압박을 버텨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장르 병렬 전개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더 가깝다고 분석했다.

▶ 이경혁 게임 제너레이션 편집장.
# RPG 기반의 장르 확장과 내부적 걸림돌
넥슨게임즈의 장르 확장은 무연고의 영역이 아닌, 회사의 핵심 경쟁력인 RPG라는 기반 위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박용현 대표는 이를 한 발은 RPG에 걸쳐놓고, 한 발은 다른 장르를 탐색하는 형태로 설명한다. 실제로 루트 슈터 타이틀의 경우 슈팅 요소를 도입하되 그라인딩 구조는 RPG에 기반하며, 서브컬처 타이틀 역시 비주얼과 스토리의 취향 차이일 뿐 게임의 코어 시스템은 RPG 구조를 따른다.
또한 과거 타이틀인 <오버히트>의 일본 런칭 과정에서 축적된 서브컬처 유저에 대한 이해도와 로컬라이제이션 경험은, 이후 <블루 아카이브> 개발 프로세스에서 디렉터의 자율성과 요구사항을 정확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르 확장의 가장 큰 걸림돌은 외부 시장이 아닌 내부 인력 문제와 개발자들의 심리적 저항에서 발생한다.
한국 게임 업계는 지난 20년간 특정 장르에 집중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때마다 적합한 전문 인력을 수급하는 난이도가 매우 높다. 더불어 기존 장르에서 성공을 경험한 내부 개발자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요청할 때 발생하는 갈등도 관리자 입장에서 까다로운 문제다.
방향성 논의 단계에서는 쉽게 합의되더라도, 실제 업무가 개인에게 배정되는 시점에서 커리어 안정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프로세스가 꼬이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박용현 넥슨게임즈 대표이사.
# 제작은 PD, 리스크 처리는 대표
박용현 대표는 다수의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방식을 주사위에 빗대 설명한다. 주사위 눈의 평균값인 3.5가 실제 결과물에는 존재하지 않듯, 실무의 구체적인 알맹이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 시장 규모, 진입 타이밍, 완성도 기준 등 거시적인 가이드라인 설정에 집중하며, 구체적인 제작은 전적으로 PD와 디렉터에게 일임한다.
이와 함께 박용현 대표는 현장 중심의 트러블 슈팅과 경험 전파에 무게를 둔다. 지정석 없이 런칭이 임박한 프로젝트 팀 옆에 자리를 잡고 플랫폼, 퍼블리셔, 마케팅 등 실무 선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외부 리스크를 즉각 처리한다.
또한 한 프로젝트가 겪은 시행착오와 해결 프로세스를 시차가 있는 다른 병렬 프로젝트에 선제적으로 전파함으로써 회사 전체의 유산으로 축적한다.
여러 스튜디오가 공통 리소스를 두고 충돌할 때는 과도한 효율화로 인한 일정 병목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다소 비효율적이더라도 스튜디오별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현재 한국 게임 업계는 과거 20년간 최적화되어 온 서버 안정성이나 시스템 최적화 같은 기술적 기반 구축 중심의 개발 방식에서, 글로벌 유저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독창적인 예술적 완성도와 개성 표현 중심으로 거대하게 축이 이동하는 구조적 전환기를 겪고 있다.
기술적 시스템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익숙했던 기존 인력 구조와 새로운 시장 니즈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업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넥슨게임즈의 궁극적인 다음 목표는 <블루 아카이브>의 도전 과정을 발판 삼아, 신작 타이틀들이 초기 시장 진입 성과에 성공하는 단계를 넘어 유저와 오랜 기간 호흡할 수 있는 '장기 라이브 서비스 운영 역량'을 온전히 내재화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페이지를 먼저 뚫어내고 성공 경험을 축적하는 기업들이 향후 10년의 게임 시장 방향성을 결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