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퀘어 에닉스가 도트와 3D를 결합한 HD-2D의 매력적인 아트를 앞세워 또 하나의 신작을 완성했습니다. <모험가 엘리엇의 천 년 이야기>는 리메이크나 시리즈가 아닌 신규 IP에, 턴제 대신 실시간으로 펼치는 액션 RPG라는 점에서 도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저는 바로 이 새로운 시도에 마음이 끌려 기대를 품게 됐습니다.
게임의 배경은 '야만족'이라고 불리는 마물들의 위협이 만연한 세계입니다. '휴더' 왕국은 '휴리아' 공주의 가호 마법에 의지해 안위를 유지하고 있죠. 이야기는 모험가 '엘리엇'이 미지의 유적을 조사하면서 시작되며, 플레이어는 엘리엇이 되어 '시간의 문'을 넘나들며 시공을 누비는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작성=깐(게임 리뷰어), 편집=한지훈 기자

# 후반부에 폭발하는 서사 구조의 명암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그리는 전형적인 왕도물의 서사는 설정과 초반 정보로 흐름과 결말이 전부 예상될 정도지만, 스퀘어 에닉스다운 JRPG 감성을 자아내는 특징이기도 해 마냥 나쁘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뒤에 언급할 시청각적 아름다움과 맞물려 서정적인 판타지로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답이 너무 빤히 보여서 주인공의 몰래 카메라인가 싶을 정도의 이야기인 데 비해, 전개의 템포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습니다.
► 오프닝만 봐도 느낌이 오는 서사는 예상대로 왕도물 그 자체였다.
사실상 페이크 엔딩이자 후반부의 시작인 첫 엔딩을 마주하기까지, 서사적인 진전은 거의 없이 여러 시대 주민들을 살피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첫 엔딩 이후에야 그간 짐작했던 진실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그제야 처음 기대했던 스토리가 헐겁게나마 이어지기 시작하고 깔려 있던 복선들이 하나둘 회수됐고요.
덕분에 엔딩 이후의 이야기는 그 이전에 비해 훨씬 재밌게 따라갈 수 있었고 마지막 엔딩까지 보는 동기가 됐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숙제라도 하듯 급하게 해결해 버리는 전개는 속도든 짜임새든 많이 아쉬웠습니다.
► 첫 엔딩을 보기 전까지, 엘리엇은 과거 시대의 탐색과 조사를 주로 하게 된다.
# 마음을 어루만지는 서정적인 아트
전개 못지않게 탐탁지는 않았던 서사를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시청각 미학의 완성도 덕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말을 하고 있으면 거부감이 드는 내용이 아닌 이상 흥미진진하게 듣게 되는 것과 비슷했달까요.
유명 성우들의 풀 더빙으로 읊어지는 대화는 상황에 따라 표정과 자세가 달라지는 일러스트 연출을 더해 생동감을 높였습니다. 일러스트는 부드러운 채색이 돋보이는 그림체라 서정적인 감성이 배어 있었고요.
그야말로 눈부신 HD-2D 스타일의 독창적인 그래픽은 이번에도 찬사를 보낼 만합니다. 주요 장소에서 달라지는 카메라 앵글은 현장감을 극대화하고,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과 베어낼 수도 있는 들풀은 달려 나가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음악이 너무 좋다' 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만드는, 다채로운 선율의 오케스트라풍 사운드트랙은 감정적 몰입을 끌어올리는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 역시나 아름다운 HD-2D 스타일의 그래픽.
► 일러스트는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등장한다.
# 모험에 활기를 더하는 '요정 페이'의 지원
플레이는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먼저 모험의 동반자인 요정 페이는 서사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 생김새도 목소리도 하는 행동도 전부 귀여운 페이.
페이와는 딱 게임에 익숙해지는 시점인 튜토리얼이 끝날 즈음에 만나게 되는데, 흩뿌려지는 아이템을 줍거나 부활을 시켜주는 등 이전까지는 불편하게 여겼거나 할 수 없던 일들을 해 주며 재미의 변곡점이 되어 줍니다. 모험하며 배워 나가는 페이의 여러 마법들로 탐험할 수 있는 곳들도 많아지고요.
페이는 자동으로 엘리엇을 따라 움직이지만 필요할 때 컨트롤러 기준으로 오른쪽 스틱으로 조종할 수 있고, 2인 플레이로 페이를 직접 조작할 수도 있는 협력 플레이도 가능합니다.
여담으로 아주 깜찍한 목소리의 페이는 쉴 틈 없이 조잘거려 함께하는 모험이라는 걸 매 순간 느끼게도 하는데요. 옵션에서 대화 빈도를 줄여도 그리 얌전해지진 않고 엘리엇의 기합 소리도 잦은 편이라, 간혹 원치 않을 때조차 시끌시끌하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습니다.
► 페이의 능력으로 엘리엇 혼자 갈 수 없었던 곳들을 통과할 수 있게 된다.
# 메트로배니아식 탐험이 있는 시공간 여행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하는 탐험의 구조는 새로운 무기나 도구, 능력을 획득하면서 과거에 가지 못했던 장소를 탐색할 수 있게 되는 메트로배니아식 문법을 따릅니다. 어느 시대에는 폐허였던 장소가 다른 시대에는 건재해 길이 이어지는 식으로, 시대를 교차하며 탐색 범위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 폭탄은 벽을 뚫는 도구로도,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도 쓸 수 있다.
다만 막혔던 곳을 처음 나아가는 쾌감은 훌륭하지만, 같은 장소를 재방문하는 과정의 구현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네 시대마다 똑같은 지도와 길을 개척해야 해서 무척 번거롭게 느껴졌거든요. 시대마다 차이가 크다면 괜찮았겠지만, 마을을 제외하면 지도를 확인해야 분간이 될 정도로 시대별 차별점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탐험 지역이 그리 넓지 않아 피로도가 높지는 않았고, 수집 요소 추적의 편의성과 비밀 통로를 찾아내는 재미가 반복의 지루함을 상쇄했습니다. 고양이 찾기는 수집할수록 왕국이 고양이로 채워져 이 게임에서 가장 열을 올리게 만드는 콘텐츠이기도 했고요.
► 지도의 안개는 시대마다 새로 걷어내야 한다. 보물 상자 등의 위치가 다르지만 길의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사이드 퀘스트들도 단순한 심부름들에 수도 많지 않지만 보상이 쓸모 있어 성취감이 있었고, 지역마다 다른 기믹과 테마를 활용한 유적 던전들은 구성도 보상도 좋아 어디든 즐겁게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 왕국에서 고양이를 50마리나 돌볼 수 있다. 직접 전부 찾는다면!
# 턴제의 스타일을 살린 실시간 액션
전투 시스템은 실시간 액션을 기반으로 하지만, 효과음과 이펙트부터 액션 선택까지 은근히 턴제의 감각이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기는 두 가지를 장비하고 버튼을 길게 눌러 필살기를 발동하는 방식으로, 폭탄이나 화살 같은 소모성 아이템도 무기의 일환으로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가드는 즉각적인 반응보다 공격을 끊고 미리 준비해야 효과를 볼 수 있고요. 일반적인 실시간 액션과 다르게 일시정지 메뉴에서 세팅을 한다든지 짧은 준비 단계를 거쳐야 하는 점에서 옅긴 하지만 턴제 전투처럼 느껴졌습니다.
► 7가지 무기 중 두 가지를 장비해서 사용한다. 길게 누르면 무기 별 필살기가 나간다.
동시에 실시간 액션으로서의 재미도 확실합니다. 고전 게임들처럼 타겟 고정과 회피가 없고 적과의 접촉 대미지가 있어, 정교하게 거리를 조절하고 필살기 타이밍을 잴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접촉 대미지는 피격 없이 적을 연속 처치할 때 발동돼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드롭 보너스' 때문에 유독 신경 쓰게 되는 부분이었는데, 회복약 구비나 부활 비용으로 돈을 계속 소비하게 만드는 시스템과 엮여 잡몹들과의 전투에서도 재미를 더해주곤 했습니다. 적의 등 뒤나 기절한 순간을 노려 치명타를 가하는 짜릿함도 좋았고요. 보스들도 기믹을 활용하는 녀석과 패턴에 대응이 필요한 녀석이 고르게 등장해 재밌었습니다.
► 피격 당하지 않고 적을 연속 처치하면 처치 시 더 많은 보상을 얻는 '드롭 보너스'가 발동되기도 한다.
► 보스전도 기믹 파악이 필요한 경우와 패턴 대응에 착실해야 하는 경우 등 꽤 다양하다.
# 레벨 없이 장비와 마석으로 성장하는 엘리엇
성장 시스템은 레벨 없이 장비 설정과 체력으로만 결정되기 때문에, 레벨 게이트로 인한 반복 플레이와 강도 높은 파밍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퍼즐 풀이나 전투를 치르고 체력 조각을 얻는 '생명의 성소', 페이의 능력을 배울 수 있는 '마력의 사당', 연속 전투를 벌이고 유용한 보상을 얻는 '시련의 성당'을 필드에서 발견하면 곧바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등급의 무기와 효율 좋은 액세서리도 필드 탐색과 퀘스트를 통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요.
성장이 쉬우면서 체감도 커서 가장 큰 재미를 주는 강화 요소는 '마석' 시스템입니다. 필드에서 입수하거나 마석 파편을 모아 랜덤으로 생성하는 마석들은 무기별로 다양하고 강력한 효과를 부여합니다. 높은 등급의 마석을 구하고 마석함의 등급을 높여 더 많은 마석을 장비해 더욱 강해질 수 있고요.
공격에 속성을 부여하거나 필살기 공격의 양상을 바꾸는 건 물론, 부메랑이 비행하는 동안 다른 무기가 더 강해지는 것처럼 무기 간의 시너지를 내기도 합니다. 무기마다 워낙 개성이 뚜렷하고 쓰임새도 좋지만, 마석 세팅까지 더해 효과를 변형하고 극대화 하는 건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입맛에 맞는 전투를 펼치는 희열이 상당하더라고요.
► 마석 가루를 모아 만들 수 있는 마석은 성장의 핵심이다.
► 무기마다 나뉘어 있고, 단순 성장부터 속성을 더하거나 연계 강화를 일으키는 것들도 많다.
# 총평
<모험가 엘리엇의 천 년 이야기>는 스퀘어 에닉스의 <젤다의 전설> 같기도 합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용사와 공주의 이야기라는 콘셉트부터 시작해, 체력 성장, 전투와 퍼즐 풀이의 스타일, 사당의 역할과 지역별 유적 구성 등 <젤다의 전설> 시리즈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거든요. 후반부에서는 오마주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유사한 연출도 보였고요.
하지만 확실한 차별점들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수려한 HD-2D의 비주얼과 아름다운 음악, 세팅의 재미가 있는 성장 시스템은 이 게임의 대표적인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천 년의 세월에 녹아든 시간 여행 이야기도 뻔한 왕도물일지언정, 스퀘어 에닉스의 JRPG 감성의 결이 그리운 이들에게는 그 뻔함마저 낭만일 수 있습니다.
모든 엔딩을 보면서 모든 지역 탐색과 퀘스트를 완료하기까지 이 게임에서 보낸 27시간은 가끔 실망스러워도 대체로 즐겁고 늘 사랑에 빠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클래식한 감성을 듬뿍 묻혀 현대적인 플레이로 빚어낸 이 사랑스러운 게임을 서정적인 판타지와 탐험 중심의 액션 RPG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에게, 그리고 애묘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가은(깐) - 게임 리뷰어
폭 넓은 장르의 게임에서 가치 있는 경험을 찾고자 합니다. 제가 남기는 기록이 새로운 게임을 찾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