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정치와 전쟁의 드라마예요. 지금은 SF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르 중 하나지만, 렌즈맨 시리즈가 나오던 시절만 해도 조롱받던 장르였어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말도 당시 미국의 ‘소프 오페라’, 지금으로 치면 막장 아침드라마에 빗댄 표현이었어요. 이 장르가 크게 발전하는 데는 뜻밖에도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의 우주덕후 기술자가 한몫했어요.
▶ 스탈린 흑백 사진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는 냉전과 군비경쟁의 시대로 들어갔어요. 스탈린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ICBM 을 원했어요.
V2 개발을 이끈 베르터 폰 브라운은 전쟁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고, 스탈린도 나치의 로켓 기술이 필요했어요. 소련은 독일 V2 개발 기술자들을 확보해 그 기술을 배우려 했어요.
문제는 1937 년 무렵 대숙청으로 유능한 로켓 기술자들이 대거 사라졌다는 점이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기술자 중 선택된 인물이 세르게이 코롤레프였어요.
코롤레프는 동독에서 나치의 로켓 기술을 익혔고, R-1 에서 R-7 에 이르는 로켓을 개발했어요. 그리고 R-7 단계에 이르러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 개발에 성공했어요.

▶ 소련의 로켓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레프(가운데).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런데 코롤레프는 우주덕후였어요. 그는 로켓을 만들면서도 늘 우주공간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R-7 이 인공위성을 우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는 ICBM 기술 개발을 위해서도 궤도 위성 발사가 필요하다고 공산당을 설득했고, 승인을 받아냈어요. 원래 위성 발사는 1958 년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미국에게 우주 1 착을 빼앗길 수는 없었어요.
코롤레프와 소련 정부는 계획을 1957 년으로 앞당겼고, 발사에는 ICBM 용 R-7 로켓이 쓰였어요. 애초에 코롤레프는 그러려고 R-7 을 만들었던 셈이에요.
1957 년 8 월, 코롤레프는 6,000km 탄도미사일 테스트에 성공했어요. 세계 최초의 ICBM 성공으로 기록된 사건이에요. 그리고 한 달 반 뒤인 1957 년 10 월, 스푸트니크 1 호를 R7 로켓에 실어 궤도에 올렸어요.
뱅가드 프로젝트로 인류 최초의 우주 진출을 꿈꾸던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이것이 ‘스푸트니크 쇼크’예요.
미국은 정부와 과학기술계 모두 충격에 빠졌어요. 석유, 금속 같은 광물과 곡물 정도를 수출하던 나라로 여겨지던 소련이 이제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핵무기를 실어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퍼졌어요.
미국은 곧바로 대응에 나섰어요. 이듬해 두 개의 큰 기관이 만들어졌는데, 둘 다 훗날 양덕 문화의 거대한 기둥이 돼요.
하나는 미래기술 연구기관 ARPA 이고, 다른 하나는 NASA 예요. ARPA 는 먼 훗날 인터넷의 시조 ARPANET 을 만들었어요.
▶ ARPA와 NASA 로고
NASA 는 ‘문 레이스’라 불리는 우주진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원래는 NACA 였지만,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NASA 가 되었고, 곧 사람을 우주선에 싣는 머큐리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1961 년 4 월,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보스토크 1 호에 태워 우주에 보내는 데 성공했어요. 미국은 다시 충격을 받았어요.
바로 다음 달인 1961 년 5 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0 년 안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사람을 우주로 먼저 보내는 경쟁에서 진 이상, 이제 목표는 달이었어요.
케네디는 아폴로 계획을 시작했고, 머큐리와 제미니 계획은 아폴로를 위한 준비 과정이 되었어요. 그리고 1969 년 아폴로 11 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어요. 스푸트니크 쇼크는 사라지고 미국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에요.
▶ 아폴로 11호.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아폴로 계획이야말로 양덕의 주요 콘텐츠인 스페이스 오페라를 대중에게 배달한 결정적 사건이라 할 수 있어요. 소수만 좋아하던 장르가 전 세계 덕후들에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TV 라는 미디어 혁명 덕분이었어요.
2차 대전 이후 TV 가 보급되고 우주경쟁이 뜨거워지자 영상업계도 동참했어요. 냉전적 프로파간다와 우주경쟁 분위기는 방송국의 SF 시리즈에도 영향을 주었고, 저예산 어린이물 중심이던 SF 는 점차 진지한 성인 타깃의 스페이스 오페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본래 스페이스 오페라는 아주 작은 시장이었어요.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의 <렌즈맨 시리즈> 초판 판매량은 각각 5 천 부 수준에 그쳤고, 하인라인의 <스타십 트루퍼스>가 흥행했어도 SF 소설 시장은 여전히 니치했어요.
우주 배경 시리즈도 대개 어린이나 청소년을 겨냥한 가벼운 프로그램이었고, <플래시 고든> 역시 가족 관객이 주 타깃이었어요.
하지만 1960 년대 아폴로 계획 이후 SF 작품은 크게 늘어났어요. 특히 1960 년대 후반에는 <듄>이 출간되고, <로스트 인 스페이스>, <스타트렉>, 같은 우주 배경 드라마가 등장했어요.
영화에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혹성탈출>이 개봉했어요. 두 작품 모두 아폴로 5, 6, 7, 8 호가 연달아 발사된 1968 년에 나왔어요.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틸컷
그중 양덕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단연 <스타트렉>이에요.
비행 조종사 출신 시나리오 작가 진 로든베리는 1964 년 여러 스튜디오와 방송사를 찾아다녔지만 계속 거절당했어요.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서부개척 이야기를 우주 버전으로 바꾸려 했어요.
처음에는 비행선 승무원 이야기였지만, 우주 붐에 편승해 배경을 우주로 옮겼어요. 그것이 <스타트렉>이에요.
NBC 는 1964 년 파일럿을 만들었지만 방영하지 않기로 했어요. 다만 다시 만들어보라는 여지는 남겼어요.
1965 년 9 월 CBS 의 <로스트 인 스페이스>가 인기를 얻자, NBC 도 우주 테마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이 경쟁이 <스타트렉>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셈이에요.
두 번째 파일럿은 1965 년에 제작되었고, 결국 1966 년 첫 시즌 방영이 성사되었어요.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어요. <로스트 인 스페이스>보다 인기가 낮았고, 두 번째 시즌 제작이 취소될 뻔했어요.
▶ <스타트렉: 디 오리지널 시리즈> 포스터
하지만 SF 팬들은 <스타트렉>의 진가를 알고 있었어요. 이 작품은 1967 년과 1968 년에 휴고상을 연속 수상할 정도로 지지를 받았어요.
<로스트 인 스페이스>가 시청률을 위해 가족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유머와 화려한 모험으로 변해간 반면, <스타트렉>은 본래의 컨셉을 유지했어요.
그 결과 팬층은 더 단단해졌어요. ‘트레키(Trekkie)’라는 명칭은 1968 년 <스타트렉> 팬진 Plak-Tow 8 호에 등장했어요. 이후 <스타트렉>의 열렬한 팬을 뜻하게 되었고, Nerd 나 Geek, 오타쿠처럼 한동안 경멸적 표현으로 쓰였어요.
대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SF 팬, 그리고 트레키들의 성화 덕에 <스타트렉>은 1969 년까지 세 시즌을 제작하고 1969 년 6 월 방영을 마쳤어요. 제작사 Desilu 는 Gulf+Western 에 인수된 뒤 1968 년 파라마운트 텔레비전으로 바뀌었어요.
방영 종료 후에는 신디케이션을 통해 지역 케이블과 해외에 판매했어요. 미국 지역 방송에서는 젊은 시청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영국 BBC 도 아폴로 11 호가 달을 향해 날아간 1969 년 7 월에 맞춰 방영해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후 일본, 네덜란드, 호주, 프랑스 등에도 판매되며 전 세계적 컬트 팬덤을 형성하게 되었어요.

▶ <스타트렉>의 '스팍'을 연기한 배우 레너드 니모이.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스칼렛오하라 - 비덕
덕후는 아니지만 주변에 덕후가 많아 덕후들과 어울리며 결국 그들을 경외하고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해리포터에서의 머글과 같은 포지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