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본지에서 [덕후론]을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2023년 초에 30번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중단했던 덕후론을 3년 반이나 지나서 다시 연재하게 되었지요. 개인적인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시 연재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지난 3년동안 서브컬처는 더 많이 성장했어요. 3년전 써두었으나 연재하지 못했던 옛 원고를 뒤적이며 추가하거나 수정할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죠. 그러나, 대체적인 줄거리는 변하지 않았어요.
문화 자체는 생물같아서 점차 변화해 가고 있지만, 그 문화의 기원이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첨언할 부분이 거의 없었어요.
(물론, 그동안 필자의 배움이 성장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부족한 지식이어도 나누어야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연재를 재개하기로 했어요.
덕후론의 첫머리에서, 덕후는 ‘생계가 아닌 이유로 대중문화가 아닌 특정 분야, 즉 서브컬처에 심취하며 상당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덕후가 될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서브컬처문화를 만나 덕후가 된다’고 했었죠.
지금까지 덕후를 만드는 ‘성향’을 이야기했으니 이제 그들의 취향으로 선택된 콘텐츠, 기술, 산업 등 ‘서브컬처문화’를 이야기해 볼 차례예요. 그리고 이 문화는 지역들마다 특색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현대 서브컬처의 원천을 흔히 일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일본이 아니라 이를 덕중의 덕, 양덕의 나라 북미에서 찾아요.
그래서 이제, 북미의 서브컬처문화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해요.

▶ 마블 코믹스 〈엑스맨〉 vol.2 1호 표지 (1991)
지구에서 판매된 모든 코믹북 단일 판본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무엇일까요? 기네스북 기록에 따르면 1991년에 발행된 <엑스맨> vol.2 첫 번째 이슈예요. 이 책은 다섯 장에 걸친 컬러 표지라는 유행을 만들었고, 매그니토와 맞서는 엑스멘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이 성공으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캐릭터는 울버린이에요. 뒤늦게 엑스멘에 합류한 울버린은 안티히어로적이고 입체적인 성격 덕분에 이미 인기를 얻고 있었고, 이 베스트셀러의 두 번째 표지 인물이 된 뒤 더 크게 성장했어요.
마블은 울버린의 인기에 편승해 여러 코믹스에 그를 ‘Guest-Starring’으로 등장시켰어요. 판타스틱4, 닥터 스트레인지, 쉴드, 네이머, 캡틴 아메리카, 어벤져스, 심지어 당대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던 스파이더맨까지 울버린을 초대했어요.
2008년에는
일반 대중에게 울버린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인물은 휴 잭맨이에요. 원작의 울버린은 탈을 쓰는 캐릭터지만, 영화 속 휴 잭맨은 거의 탈을 쓰지 않았어요.
원작의 색을 가장 잘 살렸다고 평가받은 <데드풀과 울버린>에서도 아주 잠깐만 탈을 썼고, 이는 원작 팬을 위한 팬 서비스였어요. 원작 코믹스 팬들은 이 장면에 크게 환호했어요.
이렇게 현대 양덕 문화의 중심이자 마블 최고의 캐릭터가 된 휴 잭맨은 흥미롭게도 ‘Geek’이라는 말과도 연결돼요.

▶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속 휴잭맨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휴 잭맨은 2017년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 P.T. 바넘을 연기하기 위해 2009년부터 준비했다고 알려졌어요. 그는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36권의 책을 읽었고, 매일 12시간씩 춤을 추었으며, 촬영 전 10주 동안 매일 리허설을 했다고 해요.
그가 연기한 P.T. 바넘은 실제로 대형 순회서커스의 선구자였어요. 1870년 미국에서 기차까지 동원한 순회서커스를 시작했고, 메인 쇼를 기다리는 관객을 위한 ‘Side Show’를 운영했어요.
바넘은 서커스 이전에도 박물관에서 거인, 난쟁이 등 기형의 사람들을 전시하는 흥행사업을 했어요. 그의 ‘Freak Show’에는 기인들이 등장했어요. 이후 이 쇼에는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는 사람도 등장했어요.
이 인물을 쇼에서 ‘Geek’이라 불렀어요. 1947년 순회서커스 멤버들의 치정극을 그린 영화 <나이트메어 엘리>에도 Geek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몰락해 결국 Geek이 되는 과정을 보여줘요.
현대 덕후 중에서도 최고의 덕후로 꼽히는 기예르모 델 토로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몰라요.

▶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촬영 중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서커스는 남녀노소가 즐기던 미국 대중문화였어요. 순회서커스가 오면 가족 단위 관객과 아이들이 몰려들었어요. 아이들은 Geek이 정말로 그런 것을 좋아해서 먹는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저런 역겨운 취향을 가질 수 있을까?” 신기하면서도 역겨운 충격은 강하게 남았을 거예요. 아이들은 어른처럼 비판을 자제하지 않아요.
자신과 다르거나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아이들을 모욕할 때, Geek은 더없이 강한 멸칭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나라 영어사전에서 Geek과 Nerd는 모두 ‘괴짜’로 번역되지만, 대중적으로는 둘 다 ‘덕후’처럼 해석돼요. 그렇다면 Geek과 Nerd는 어떻게 덕후를 뜻하게 되었고, 둘은 무엇이 다를까요?
1950년, 닥터 수스라는 필명을 쓴 미국 아동문학가이자 만화가 테오도르 소이스 가이젤은
독특하고 괴기한 상상 속 동물들이 등장하고, 그중에는 사람처럼 생긴 동물도 있었어요. 미국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주변 친구의 외모를 놀릴 때 이 동물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Nerd’였어요.
참고로 닥터 수스가 만든 ‘그린치’ 역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예요.
▶ 책 <If I Ran the Zoo> 표지
처음 Nerd는 못생겼거나 옷을 이상하게 입은 친구를 놀리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친구들이 공부만 열심히 하거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을 거예요.
혹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따돌리며 놀렸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Nerd는 외모 비하에서 출발해 점차 성향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고, 지금의 의미에 이른 것으로 보여요.
Nerd의 다른 기원설도 있어요. 술자리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며, ‘술꾼’ 또는 ‘취한’이라는 뜻의 Drunk를 거꾸로 쓴 Knurd에서 왔다는 설이에요.
K가 묵음이 되면 Nurd가 되고, Nurd는 Nerd와 같은 발음과 의미로 여겨져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 다 어울리기보다 공부나 혼자만의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어요. 공부와 책에 몰두하는 수재가 Nerd라는 이미지도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그렇다면 이런 Nerd가 독특한 취미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앞에서 말했듯, 덕후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서브컬처를 취향으로 삼으면 덕후가 돼요. 즉 Nerd가 독특한 취미에 빠지면 Geek이 되는 거예요.
온라인에는 Nerd와 Geek을 비교되는 취향처럼 나누는 밈이 많지만, 사실 둘은 같은 기준의 개념이 아니에요. Nerd는 성향에 가깝고, Geek은 취향에 가까워요.
Nerd의 성향을 가진 이가 대중과 취향 차이가 크지 않으면 Nerd, 큰 차이가 있으면 Geek이라고 부르게 된 셈이에요. 다만 요즘은 두 단어가 큰 구별 없이 섞여 쓰이고, 서로 의미가 확장된 것으로 보여요.
▶ 2012년~2013년 트위터에서 'geek'과 'nerd'가 포함된 트윗 수십만 건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출처: Settles, B. "Geek"와 "Nerd"에 대하여. 2013년 6월 13일.)
이제 좋은 구분을 얻었어요. 지금까지는 ‘덕후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긴 표현을 써야 했지만, 앞으로는 그 사람을 Nerd라고 부르고, 실제 덕후는 Geek이라고 부르기로 해요.
Nerd와 Geek은 근대 양덕 문화를 지지하고 발전시켜 왔어요. 덕후 문화의 큰 줄기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계’와 ‘판타지’예요. Nerd가 기계나 판타지 문화를 자신의 취향으로 받아들이면 곧 Geek이 되었어요.
미국에서 기계와 판타지가 결합한 대표적 결과물은 ‘코믹스’와 ‘SF’예요. 코믹스는 DC와 마블이 중심이고, SF에 빠진 Geek은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에 열광했어요.
이제 DC와 마블을 중심으로 발전한 코믹스, 그리고 영상물을 중심으로 발전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역사를 통해 미국 덕후 문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볼 거예요.
▶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평가받는 드라마 <스타트랙>
✍️ 스칼렛오하라 - 비덕
덕후는 아니지만 주변에 덕후가 많아 덕후들과 어울리며 결국 그들을 경외하고 관찰하게 되었습니다.해리포터에서의 머글과 같은 포지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