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프래그마타>의 출시 소식을 듣자마자 다운로드를 시작했다. 설치 용량은 약 35GB. 예상보다 큰 용량이 아니라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10GB가 넘는 게임을 새로 시작하려면 적잖은 심리적 저항감이 있었다. 작정하고 엔딩을 볼 목적이 아니라면, 새 게임을 설치할 때마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하드 용량의 압박에 못 이겨 채 끝내지 못한 다른 게임을 지워야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기다려 다운로드한 게임이 재미라도 없으면, 다운로드한 시간보다 플레이한 시간이 더 짧은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즘 이런 상황에 무뎌진 것은, 마음먹고 8TB짜리 대용량 HDD를 장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최신 게임들이 10~20GB의 용량을 가볍게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AAA급 대작은 100GB를 훌쩍 넘기 일쑤고, 수년간 업데이트가 누적된 라이브 서비스 게임이 모르는 새 수십 GB를 차지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제는 인디 게임조차 1GB 미만으로 나오면 용량이 착하다며 반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준비해 보았다. 2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웹, 플래시 게임이나 그에 준하는 저용량 게임을 USB에 담아 이 컴퓨터 저 컴퓨터 옮겨가며 즐기곤 했다. 만약 지금도 용량이 '100MB 이하'인 게임들이 있다면 어떨까? 용량 압박 없이 지우지 않고 영구 소장하며 언제든 가볍게 꺼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스팀 인기 게임들을 소개한다./작성=유형권(게임 블로거), 편집=한지훈 기자

1. Animal Well
키워드: 2D / 레트로 / 플랫포머 / 어드벤처 / 메트로배니아 / 1인 개발
개발: Billy Basso
출시일: 2024년 5월 9일
용량: 33.26MB
가격: 25,000원
한글화: 지원 O
일반적으로 '저용량 게임'이라고 하면 조악한 그래픽과 부족한 콘텐츠를 떠올리기 쉽다. 요즘 유저들에게 하드디스크 용량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선택권이 있다면 당연히 더 질 좋고 풍부한 콘텐츠를 갖춘 게임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므로, 이제 '저용량'이라는 키워드 자체는 유저들의 이목을 끄는 마케팅 문구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퍼즐 플랫포머 게임 <애니멀 웰>은 이런 편견을 보기 좋게 깨부순다. 33MB라는 용량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픽셀 그래픽을 자랑하며, 한정된 맵 안에 재치 있는 아이디어들을 꽉꽉 눌러 담아 지루할 틈 없는 밀도 높은 레벨 디자인을 선보였다. 보통 이 정도 퀄리티를 보여주는 비슷한 장르의 게임들이 평균 400MB에서 3GB 사이의 용량을 차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게임이 보여주는 최적화의 수준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있다.
현재 스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100MB 이하의 게임 중에서는 꽤 고가로 판매되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평균 플레이 타임이 7~15시간에 달하는 만큼, 담겨있는 콘텐츠의 볼륨을 생각하면 결코 부담스럽거나 돈이 아까운 가격은 아니다.
2. Downwell
키워드: 2D / 레트로 / 낙하 / 액션 / 플랫포머 / 로그라이크 / 흑백
개발: Moppin
출시일: 2015년 10월 15일
용량: 41.1MB
가격: 3,400원
한글화: 지원 X
로그라이크 장르는 한정된 콘텐츠를 반복해서 플레이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하기 좋아, 다른 장르에 비해 평균적인 설치 용량이 낮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비교적 단순한 그래픽을 띠는 <브로테이토(Brotato)>조차 200MB 이상의 용량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100MB 이하의 로그라이크 게임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다운웰>은 붉은색과 흑백 단 세 가지 색상만을 사용하여 용량 부담을 극한으로 줄였다. 게임 플레이 역시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낙하 액션' 하나에 집중해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 게임으로 훌륭히 접근한 사례다. 세로로 긴 화면 비율을 사용하는 만큼 모바일 플랫폼으로 즐기기에도 아주 쾌적하다.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는 점은 아쉽지만, 게임을 진행하는 데 텍스트가 개입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 플레이에 지장이 없으니 참고하자.
3. VVVVVV
키워드: 2D / 레트로 / 플랫포머 / 어드벤처 / 사이드뷰 / 하드코어 / 1인 개발
개발: Terry Cavanagh
출시일: 2010년 9월 8일
용량: 70.35MB
가격: 5,600원
한글화: 지원 O
<슈퍼 헥사곤>과 <다이시 던전>으로 유명한 1인 개발자 테리 카바나(Terry Cavanagh)의 초기작이다. 장르상으로는 플랫포머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인 '점프' 대신 '중력 반전' 능력을 활용해 맵을 정밀하게 이동해야 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졌다.
앞서 소개한 <애니멀 웰>과 비교하면 엔딩까지 걸리는 평균 플레이 타임이 2~3시간으로 짧고 용량도 소폭 큰 편이다. 하지만 2010년 출시 당시 '중력 반전'이라는 획기적인 콘셉트로 여타 플랫포머 게임들과 차별화된 매력을 선보이며 유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단순히 용량만 따지면 같은 개발자의 <슈퍼 헥사곤>이 21MB로 더 작지만, 해당 타이틀은 완전한 하이퍼 캐주얼 게임에 가깝기에 조금 더 어드벤처 느낌이 살아있는
4. 10,000,000
키워드: 2D / 레트로 / 퍼즐 / 어드벤처 / 3매치 / 던전 / 판타지
개발: EightyEightGames
출시일: 2013년 1월 16일
용량: 82.11MB
가격: 5,500원
한글화: 지원 O
똑같은 콘텐츠를 반복해서 도전하는 방식이라고 하면 흔히 로그라이크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보다 더 정직하게 자원을 모으고, 스펙을 올려 정면으로 돌파하는 디자인을 가진 게임들도 적지 않았다.
<10,000,000>도 그중 하나다. 3매치 퍼즐 룰에 던전 어드벤처를 결합한 이 게임은, 탐험 도중 몬스터에게 당해 거점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동안 모은 자원으로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된 성장을 바탕으로 다음 스테이지를 한결 수월하게 공략해 나가는 방식이다.
단순히 3매치 룰을 섞은 가벼운 게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나 아는 익숙한 퍼즐 방식에 RPG식 성장을 약간 가미한 것만으로도 진입장벽을 크게 낮추고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5. Gnomes
키워드: 2D / 레트로 / 타워디펜스 / 탑뷰 / 로그라이크
개발: Dystopian
출시일: 2025년 4월 5일
용량: 76.02MB
가격: 9,900원
한글화: 지원 O
20년 전, 웹과 플래시 게임 시절을 주름잡던 터줏대감 중 하나는 바로 '타워 디펜스'였다. 실시간 피지컬 조작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데다, 한 번 전략을 세워두면 적을 막아내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방치형 요소가 있어 캐주얼하게 즐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도비 플래시 서비스가 종료되고 스마트폰 게임 환경이 고도화되면서 타워 디펜스 장르 역시 화려한 연출을 더하게 되었고, 이는 필연적인 용량 상승으로 이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100MB 이하의 타워 디펜스 게임을 찾는 것 자체가 상당한 검색 노동을 요하는 일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노움>은 타워 디펜스에 로그라이크 시스템을 결합해 콘텐츠와 용량을 모두 최적화해 낸 훌륭한 사례다. 스테이지마다 얻을 수 있는 보상의 편차가 크고, 타워 디펜스의 기본인 '벽' 오브젝트조차 플레이어가 직접 세워 적의 길목을 유연하게 통제해야 한다. 매 판 변수가 많고 플레이어의 전략적 컨트롤이 요구되는 만큼, 체감 난이도도 꽤 높고 파고들 여지가 많은 게임이다.
6. Papers, Please
키워드: 2D / 레트로 / 포인트 & 클릭 / 입국 심사 / 시뮬레이션
개발: Lucas Pope
출시일: 2013년 8월 9일
용량: 86.52MB
가격: 11,000원
한글화: 지원 O
인디 게임에 관심 있는 유저라면 한 번쯤 들어보거나 직접 플레이해 보았을 명작, <페이퍼, 플리즈> 역시 알고 보면 설치 용량이 100MB를 넘지 않는 초저용량 게임이다.
출입국 심사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이 작품은 2026년인 지금까지도 비슷한 대체재를 찾기 힘들 만큼 유일무이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나아가 현재 스팀에서 판매 중인 100MB 이하의 유료 게임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유저 평가 수를 자랑하는 기념비적인 타이틀이기도 하다.
가벼운 용량과는 딴판으로, 게임은 놀랍도록 현실적이고 복잡한 서류 심사 과정을 요구한다. 여기에 냉혹한 분쟁 지역을 배경으로 플레이어의 선택과 도장 하나가 어떤 묵직한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깊이 있는 스토리까지 훌륭하게 담아냈다.
7. SNKRX
키워드: 2D / 레트로 / 미니게임 / 슈팅 / 탑다운 / 로그라이크 / 1인 개발
개발: a327ex
출시일: 2021년 5월 17일
용량: 62.6MB
가격: 3,400원
한글화: 지원 X
<뱀파이어 서바이버>와 같은 구조를 가진 로그라이크 게임들의 평균 용량이 낮은 이유는, 복잡한 필드와 맵을 구현하는 데 큰 자원을 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적이 몰려오면 공격을 피해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모아 입맛대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핵심 루프만 존재할 뿐 맵을 탐험하는 '모험' 요소는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캐릭터의 외형이나 전투 연출마저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덜어내면, 단순한 사각형 도형들만으로도 충분히 몰입감 넘치는 전투를 보여주는
고전 게임 <스네이크>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이 게임은, 스테이지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유닛을 뱀의 꼬리처럼 뒤에 이어 붙이며 파티를 성장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스네이크>의 룰과 슈팅 로그라이크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를 내는지 궁금하다면 적극 추천하는 작품이다.
8. 140
키워드: 2D / 플랫포머 / 어드벤처 / 사이드뷰 / 리듬
개발: Positech Games
출시일: 2013년 10월 17일
용량: 83.33MB
가격: 5,600원
한글화: 지원 X
비트에 맞춰 변화하는 환경을 돌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리듬 플랫포머 게임이다. 가벼운 그래픽을 내세운 게임 중에는 주인공 아바타를 네모나 동그라미 같은 단순한 도형으로 표현해 '게임성' 본연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140>이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저용량 게임 중에서 흔치 않은 리듬 플랫포머라는 점은 확실한 매력 포인트다. 다만, 체크포인트(자동 저장) 구간이 상당히 드물게 배치되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일반 엔딩 이후에는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스테이지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만큼 데스 페널티가 매우 강력하다.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지만, 게임을 진행하는 데 텍스트가 필요한 구간이 아예 없기 때문에 언어 장벽 없이 누구나 쉽게 입문할 수 있다.
9. TIS-100
키워드: 2D / 텍스트 / 퍼즐 / 프로그래밍 / 하드코어
개발: Zachtronics
출시일: 2015년 7월 21일
용량: 47.87MB
가격: 7,800원
한글화: 지원 X
40년 전 즐기던 MS-DOS 시절이 절로 떠오를 만큼, 화려한 이미지 하나 없이 오직 텍스트만으로 룰을 파악하고 퍼즐을 풀어야 하는 독특한 게임이다.
가벼운 두뇌 게임 수준을 넘어 실제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지식을 어느 정도 요구하기 때문에, 게임 내에 준비된 가이드 문서의 분량도 상당하다. 애초에 코딩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화면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유저 타겟팅이 매우 확고한 타이틀이다.
여기에 한국어까지 지원하지 않다 보니,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이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한 유저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프로그래밍 소양을 갖춘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오갈 정도다.
10. Mcpixel
키워드: 2D / 레트로 / 포인트 & 클릭 / 어드벤처 / 코미디
개발: Sos Sosowski
출시일: 2012년 9월 26일
용량: 64.41MB
가격: 5,000원
한글화: 지원 X
스테이지 곳곳에 숨겨진 폭탄을 찾아 무사히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상식을 파괴하는 기상천외한 해체 방식과 엽기적인 개그 요소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퍼즐의 치밀한 논리보다는 황당한 연출이 주는 웃음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 덕분에 유저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B급 감성의 유머를 살리는 데는 화려한 3D 그래픽보다 투박한 픽셀 아트가 오히려 제격이었다. 결과적으로 픽셀 그래픽을 통해 특유의 엽기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면서도, 설치 용량에 대한 부담은 획기적으로 줄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영리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게임들 중, 알고 있는 게임이 몇 개나 있었는가? 인디 게임 팬들에게 유명한 <페이퍼, 플리즈>나 <애니멀 웰>을 제외하면 아마 생소한 이름이 많았을 것이다.
출시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고전도 있고, 10시간 미만의 짧은 플레이 타임과 저렴한 가격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타이틀이 주를 이룬다. 수백 GB를 요구하는 세련된 최신작들과 비교하면 겉보기에 투박할지 모르지만, 오직 게임 본연의 재미와 독창적인 시스템만으로 유저들의 굳건한 지지를 얻어낸 수작들이다.
혹시 지금 사용 중인 PC나 노트북의 사양이 낮고 남은 용량마저 부족해, 스팀 런처를 켜고 새 게임을 설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면 이 게임들의 존재를 기억해 두길 바란다. 컴퓨터 부품 가격이 해마다 오르는 요즘, 필자 역시 당장 쓰던 컴퓨터가 고장 나면 비슷한 스펙으로 다시 맞출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게임 라이프에 엄청난 제약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게임은 셀 수 없이 많고, 화려한 대작들에 가려져 미처 빛을 보지 못했던 원석 같은 명작들을 발굴할 또 다른 기회가 열릴 뿐이니까.
✍️ 유형권 - 게임 블로거
세상을 살며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게임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으며, 게임 개발사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자유인으로 블로그를 포함해 게임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