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넥슨의 좀비 생존 신작 <낙원: LAST PARADISE>(이하 낙원)의 글로벌 클로즈 알파 테스트가 스팀을 통해 시작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플레이를 하기 전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같은 넥슨 자회사인 엠바크 스튜디오가 <아크 레이더스>를 통해 장르의 문법을 훌륭하게 정립해 내지 않았던가.
<이스케이프 프롬 타르코프>와 <아크 레이더스>가 지배하고 있는 이 하드코어한 시장에서 어설픈 퀄리티의 게임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심지어 그 대단한 번지의 신작 <마라톤>마저 긍정적인 게임성 평가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흥행 성과를 내지 못했을 정도로 냉혹한 곳이 바로 익스트랙션 슈터 시장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게임을 시작한 지 단 몇 시간 만에 내 안의 우려는 확신과 기대감으로 탈바꿈했다. 개인적으로 최근 플레이해 본 좀비 아포칼립스 배경의 게임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었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 익숙한 풍경, 현실성이 이끌어낸 강렬한 몰입감
개인적으로 익스트랙션 슈터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몰입감이라고 생각한다. 익스트랙션 슈터란 본질적으로 대단히 가혹하고 날이 서 있는 장르다.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긴장감이 플레이어를 무겁게 짓누른다.
거의 모든 익스트랙션 슈터 게임이 이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몰입도를 높인다. 한때는 쉽게 버려졌던 고물이 목숨 걸고 수집해야 하는 자원이 된 절박한 세계, 생동감을 상실해 칙칙해진 풍경, 짙게 깔린 적막과 이따금 이를 깨는 날 선 비명 및 총성 같은 것들이 좋은 예시다.
이 몰입감 부분에서 <낙원>이 채택한 전략은 굉장히 영리하고, 또 효과적이다. <낙원>의 배경은 한국, 좀 더 정확히는 서울의 종로구다. 낙원상가를 비롯한 실제 건물들이 게임 내에 동일한 위치에 구현되어 있고, 도로 위엔 파란색 포터 트럭과 초록색 시내버스 등 우리가 익숙하게 보던 차량들이 널브러져 있다. '제주산 흑돼지'가 적힌 가게 안 냉장고에선 고추장도 발견된다. 이 같은 요소는 플레이어, 특히 우리 같은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체감하는 게임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단숨에 좁혀 몰입감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 주말에 종종 들리는 낙원상가를 게임 속에서 와볼 줄이야.
▶ 역시 한국 주방에 빠질 수 없는 고추장. 외국 유저들은 이게 왜 귀한지 알까?
현실적인 세계관과 인간 군상의 모습도 한몫한다. 좀비 아포칼립스로 붕괴된 서울, 살아남은 이들은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어 문명을 재건했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이들은 시민들에게 등급을 매겨 철저히 계급에 따라 대우한다. 살기 위해 도시 밖에서 들어온 이들은 최하층민으로서, 좀비들이 득시글거리는 외부 통제구역으로 내던져져 물자를 수집해야만 한다. 부패와 억압, 폭력이 지배하는 이곳에 '낙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참으로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브로커에 의해 납치되어 낙원에 입성하게 된 주인공. 그를 대하는 처우를 보면 이 곳에 인권이란 돈 몇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게임은 초반부 튜토리얼 구간을 통해 이 같은 설정을 플레이어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시킨다. 튜토리얼은 '홍수경'이라는 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인트로 시네마틱은 뇌물에 각서까지 써가며 낙원에 입성하려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생존자들의 비참한 삶을 여과 없이 조명한다.
이후 튜토리얼을 통해 게임의 기본적인 조작법과 진행 방식을 익히고 나면, 홍수경은 탈출구까지 밀려 들어온 감염자들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른바 '페이크 주인공'을 내세워 게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가혹한 플레이 방식을 체득하게 만드는 대단히 치밀한 구성이다. 이렇게 형성된 처절한 몰입감과 절박함이, 플레이어를 위기일발의 세계에 제 발로 뛰어들게끔 만드는 것이다.

▶ 각서까지 써가며 낙원행 차에 몸을 실은 홍수경은
▶ 결국 감염자가 되어 죽음을 맞는다. 이게 초반 튜토리얼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다.
# 총기 없는 익스트랙션 슈터가 긴장감을 엮어내는 방식
게임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게임의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이어지는 게임 플레이에서도 긴장감 있는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었다.
게임은 3인칭 백뷰 시점으로 진행되며, 현대 서울이라는 배경에 걸맞게 각목이나 야구 배트, 식칼 같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접 무기들을 주로 사용하게 된다. 사제 총기나 권총 같은 무기가 등장하지만 이번 테스트에선 거의 만나볼 수 없었고, 설령 획득한다 한들 탈출 과정에서 압수되기에 수시로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 밸런스를 위해 총기는 탈출 이후 압수된다.
게임 내 등장하는 좀비(공식 명칭은 감염자)들은 맵 곳곳에 포진해 있다. 소리에 반응하는 이들은 마치 기괴하게 굳어버린 듯 구부정한 자세로 멈춰 있다가, 소리가 들리면 즉각 반응해 움직인다. 평소에는 특별한 활동이 없는 탓에 그 수가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동차 경보음이 울리거나 '스크리머'가 비명을 지르면 주변에서 순식간에 몰려와 플레이어를 덮치곤 한다.
끈질긴 추격자인 이들은 느리지만 집요하게 소리를 내는 플레이어를 뒤쫓는다. 건물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도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이닥친다. 개체를 하나하나 처치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이들이 군집해 있을 때는 플레이어를 계속 밀어붙일 뿐더러 물어뜯어 감염도를 높이기까지 한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굉장히 성가셔지는 역할이다.
▶ 문까지 부숴가며 추격하는 감염자들.
▶ 우르르 몰려오면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재밌는 점은 이들을 단숨에 처치할 수 있는 '제압'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감염자에게 발각되지 않았거나, 발각되었더라도 감염자의 등 뒤를 잡을 경우 제압이 가능하다. 덕분에 보다 안전한 탐색을 위해 앉은 채로 움직이는 잠입 플레이가 주를 이루게 되며, 스쿼드 플레이에서는 한쪽이 적들의 이목을 끌면 다른 한쪽이 뒤에서 하나씩 처치하는 전략적인 플레이도 가능하다.
▶ 감염자 뒤에 있을 때 발동 가능한 제압. 무기별로 다른 시원시원한 액션이 일품이다.
그렇다면 게임 내 또 다른 적인 다른 플레이어와의 전투는 어떨까? 상술한 대로 근접 무기를 주로 사용하는 탓에 흔히 말하는 '일방적인 딜교'는 어렵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선 나 역시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물론 얌전히 서서 서로 한 대씩 주고받는 방식으로 전투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교전 중 근처 유리창이나 자동차를 때려 소음이 발생하면 감염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렇게 감염자와 생존자가 한데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다 보면 누구 하나는 쓰러지게 되는데, 다운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소요되는 시간마저 꽤 길다. 소음으로 감염자들을 불러모으는 데다 보상마저 즉발적이지 않으니, 섣부른 교전은 여러모로 리스크가 큰 셈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혹은 앞서 <아크 레이더스> 같은 게임들이 쌓아 놓은 장르적 경험 덕분인지는 몰라도 마주쳤을 때 교전을 꺼리는 유저들이 적지 않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인게임 마이크로 인사를 건네거나 감정표현으로 춤을 추는 등 자신의 무해함을 온몸으로 호소하곤 했다. 앞서 플레이했던 다른 좀비 익스트랙션 슈터 게임들과는 확실히 결이 다른, 신선한 경험이었다.
▶ 우연히 만난 다른 스쿼드와 한국어로 인사하며 무해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 몰입의 뼈대를 완성하는 하우징과 성장
이 게임의 가장 독특한 킥은 아웃 게임의 영역에 있다. 이 위험한 탐사길에 플레이어가 스스로 오르도록 만드는 요소들, 즉 하우징과 성장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하우징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생활하는 집을 꾸미는 기능이다. 낙원 내 가구점이나 의뢰 보상으로 가구를 얻을 수 있고, 이를 원하는 대로 배치할 수 있다. 가구를 놓을 집의 크기는 시민 등급이 상승함에 따라 점차 커진다.
하우징의 핵심 역할은 탐사 전후의 재정비 과정을 돕는 것이다. 제작대에서 필요한 무기나 자원을 만들 수도 있고, 조리대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낙원>에선 포만감과 정신력 수치가 낮아지면 가방 용량이 감소한다. 이 때문에 게임 내에서 다양한(그래봐야 상한 빵이나 통조림 같은 것들이지만) 음식을 모으고 먹게 되는데, 이 음식들이 상하지 않게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순히 기능적 차원을 넘어, 미관적 측면에서도 하우징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비록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일지라도 현실에서도 못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그럴듯한 가구들을 하나둘씩 들이는 것에서 오는 보람도 결코 적지 않다.
▶ 획득한 가구를 원하는대로 배치할 수 있다.
▶ 냉장고는 음식의 소비 기한이 감소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꾸민 집에서는 '오전 활동'이 가능하다. 오후 활동은 탐사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오전 활동은 휴식, 학습, 노동, 심지어는 종교 활동까지 선택할 수 있다. 각 활동마다 소모되는 포만감과 정신력 수치가 다르고 얻을 수 있는 보상도 다르기에, 주어진 상황에 맞게 활동을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 소모되는 자원과 획득하는 보상이 제각각인 오전 활동들.
상술한 학습이나 인게임 플레이를 통해 경험치를 얻으면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다. 이러한 성장 시스템은 RPG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레벨을 올리면 특성 포인트를 얻게 되고, 이를 투자해 자신만의 빌드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다.
특성의 종류는 신체단련, 근접전투, 특수공작, 야전생존 등 총 4가지다. 특성별로 특화된 영역이 존재하며, 각 특성에는 액티브 스킬과 패시브 스킬로 이루어진 스킬 트리가 자리 잡고 있다. 액티브 스킬은 최대 2개, 패시브 스킬은 최대 8개까지 장착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스킬을 조합하는지에 따라 게임 플레이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이번 테스트에선 특성 초기화가 무료였기에 최대한 다양한 스킬을 직접 사용하고 조합해 볼 수 있었다. 새로 얻은 스킬의 효과를 시험해 보기 위해선 또다시 위험천만한 탐사길에 몸을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성장의 성취감과 다양한 스킬을 경험해 보는 쾌감은, 익스트랙션 슈터라는 장르가 주는 묵직한 부담감을 이겨내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 특성 및 스킬 시스템. 특성 포인트를 투자할수록 독특한 능력들이 새롭게 해금된다.
# 보석 같은 디테일이 빛나는 매력적인 K-좀비 게임
짧은 테스트였음에도, 이들이 담아낸 디테일은 보석처럼 그 위치에서 선명한 빛을 발했다. 마니악한 익스트랙션 슈터 장르, 그 안에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기존 게임들과는 확실히 다른 경험을 주고자 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아크 레이더스>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조심스럽지만, 기자의 답변은 "Yes"다. 게임의 세계관과 분위기 면에서도, 플레이 경험 면에서도 두 게임은 확실히 다르다. 아니, 오히려 이 게임과 비슷한 대체재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낙원>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와 콘텐츠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화면 앞으로 끌어당기는 이 게임만의 저력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번 알파 테스트가 해외에서도 꽤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스팀에서 4만 명에 육박하는 최고 동시 접속자 수를 기록하며 그 잠재력을 입증했다. 개인적으로는 보다 많은 이들이 한국의 향기가 진하게 밴 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 보았으면 한다. 좀비로 가득 찬 서울 한복판에서 골뱅이 통조림을 까먹고, 주방 한편에서 보물 같은 고추장 한 통을 찾아내는 경험. 이 역시 우리가 게임으로 수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K-컬처'가 아닐까?
▶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한밤 중 낙원상가 앞에서 K-꽃무늬바지를 입은 사람들과 춤을 추는 건 분명 이 게임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