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라이크라는 장르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잡는 데는 여러 게임의 공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덱 빌딩 로그라이크의 교과서로 꼽히는 게임이 있다면, 단연 <슬레이 더 스파이어>다.
출시 당시 <다키스트 던전>과 <하스스톤>을 합쳤다는 의미로 '다키스톤'이라 불리기도 했던 이 게임은, 시간이 지나 '슬더스 라이크'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하나의 장르적 기준이 됐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는 게임이어서가 아니다. 한 번 클리어하면 끝이 아니라, 클리어하고 나서도 계속 하게 만드는 게임이다.
매 판 달라지는 구성이 주는 중독성도 있고, 난이도를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승천 모드 같은 파고들기 요소도 있다. 한 판이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남짓이지만 그 판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수백 시간이 돼 있다.
그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후속작 <슬레이 더 스파이어 2>가 마침내 앞서 해보기(얼리 액세스)로 출시됐다. 1편 정식 출시로부터 7년 만이다.
출시일은 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새벽 3시. 이른 시간에 출시했음에도 오후가 되자 플레이 인증 글이 올라오며 기다려온 팬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주말을 거치며 일일 최고 동시접속자 수는 3월 9일 기준 57만 4,638명까지 치솟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온 후속작은 어떤 모습일까. 직접 플레이하며 확인해봤다.

▶ (출처: 메가 크리트)
# 카드로 첨탑을 공략하라, 덱 빌딩 로그라이크
<슬레이 더 스파이어 2>(이하 슬더스 2)는 카드로 싸우는 턴제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턴에 손에 든 카드를 사용해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도를 쌓고, 적의 턴에는 예고된 적의 행동을 버텨내는 방식으로 전투가 진행된다.
배경은 <슬레이 더 스파이어>(이하 슬더스)로부터 1,000년이 지난 첨탑이다. 세계관을 공유하되 시간적 거리를 둔 설정으로, 전작을 모르더라도 새롭게 진입하는 데 무리가 없다.
플레이어는 경로를 전진하면서 전투와 이벤트를 겪고, 그 보상으로 카드, 유물, 포션을 획득하며 덱을 키워나간다. 상점에서 카드나 아이템을 구매할 수도 있다.

▶ 매 게임마다 달라지는 경로.
이렇게 덱을 갖춰가며 각 챕터의 보스를 상대하고,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이 목표다. 매 판 경로가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캐릭터로 시작해도 플레이는 매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덱은 공용 카드인 타격, 수비와 소량의 캐릭터 고유 카드로 구성된 기본 덱에서 출발한다. 전투와 이벤트를 거치며 카드를 하나씩 골라 추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카드의 효과와 조합을 파악하게 된다.

▶ 아이언클래드의 기본 덱. 공용 카드 9장과 전용 카드인 강타로 구성됐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익숙해질수록 자신만의 덱 구성 방향이 생긴다. 준수한 카드를 두루 갖춰 30장 이상의 두꺼운 덱을 짜는 방향도 있고, 특정 콤보에 필요한 손패를 빠르게 갖추기 위해 필요한 카드만 남기고 덱을 압축하는 방향도 있다.
매 판 획득할 수 있는 카드와 마주하는 이벤트는 무작위로 결정된다. 어떤 카드가 주어지느냐는 운이지만, 그 중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덱을 구성할지는 플레이어의 판단이다. 운과 전략이 어우러지는 것이 <슬더스> 시리즈의 특성이다.

▶ 카드를 한 장씩 더해가며 덱 컨셉을 정한다.
캐릭터는 총 다섯으로, 1편에서 돌아온 아이언클래드, 사일런트, 디펙트에 이번 편에서 새로 합류한 리젠트와 네크로바인더가 추가됐다. 각 캐릭터는 고유한 카드 풀을 가지며, 시작 유물과 이후 획득하는 일부 유물, 포션도 캐릭터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캐릭터라도 어떤 카드를 중심으로 덱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복 플레이로 이어진다.

▶ 신규 캐릭터 리젠트. '별'이라는 별도의 자원을 운용하는 것과 '단조' 키워드로 대검을 생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 신규 캐릭터 네크로바인더. '소환' 혹은 '종말' 키워드 위주의 덱을 구축할 수 있다.
<슬더스>를 플레이해봤다면 익숙한 얼굴도 만날 수 있다. NPC와 적 일부가 전작에서 돌아왔는데, 살짝 달라진 모습으로 재등장해 아는 얼굴을 새롭게 마주하는 재미가 있다.

▶ 압축벌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기술을 당하니 기억났다. 전작에서 유물 '곤충 박제'에 박제 돼있던 적이다. 전작의 유물은 적 엘리트의 크기와 체력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지녔다.
# 큰 틀은 그대로, 전투 경험은 새롭게
<슬더스 2>는 전작의 틀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요소를 여럿 추가했다. 그 중 하나가 인챈트다.
인챈트는 특정 이벤트를 통해 카드에 능력을 추가로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전작에서 카드를 직접 강화하는 수단이 재련뿐이었다면 <슬더스 2>에서는 인챈트가 추가되며 선택지가 늘었다.
초반에 만나는 인챈트는 공격이나 방어도 수치를 높이는 수준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성격이 달라진다.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지는 소멸 키워드를 없애주는 영혼 인챈트, 휴식 장소에서 카드를 복제할 수 있게 만드는 복제 인챈트 등 덱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인챈트들이 등장한다.

▶ '기민함'을 인챈트해 방어도 수치가 2 올라간 카드.
퀘스트도 흥미로운 요소다. 이벤트를 통해 특정 카드를 획득하고, 정해진 조건을 만족하면 큰 보상을 받는 방식이다. 다만 조건을 달성하기까지 그 카드는 덱 안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사용 불가 상태로 남는다.
원래도 손패 운이 아쉬운 순간이 많은 게임인데, 여기에 짐짝 카드를 하나 더 얹는 셈이다. 당장의 손패를 생각하면 피하고 싶고, 보상을 생각하면 욕심이 난다. 그 고민 자체가 재미가 된다.

▶ 퀘스트 카드를 획득 가능한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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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지를 고르면 퀘스트 카드가 덱에 포함된다.
보스도 새로운 기믹을 여럿 들고 나왔다. 체력을 깎고 방어도를 쌓는 기본기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을 만드는 보스들이 생겼다.
매 턴 이동 카드를 사용해 위치를 옮기지 않으면 카운트가 끝나는 순간 그대로 패배하는 보스가 있는가 하면, 특정 패턴에 진입하면 매 턴 체력 감소, 매 턴 손패 매수 감소 같은 디메리트 중 하나를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하게 만드는 보스도 있다. 전작에서도 보스마다 대처 방식이 달랐는데, <슬더스 2>는 새로운 기믹을 더해 그 다양성을 넓혔다.

▶ 자신이 죽으면 동귀어진하는 보스. 체력 및 방어도 대비를 안했다면 그대로 패배한다.
# 개선된 비주얼, 그리고 함께 오르는 첨탑
<슬더스 2>는 개발 엔진을 고도(Godot) 엔진으로 교체했다. 전작에 비해 게임 용량이 늘어난 만큼, 시각적인 변화도 눈에 띈다. 1편에서 캐릭터가 앞뒤로 움직이는 간단한 애니메이션 수준이었다면, <슬더스 2>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등 전투 모션이 추가됐다.
카드가 화면에 직접 구현되는 경우도 생겼다. 퀘스트나 특정 키워드를 통해 카드를 생성하면 그 결과물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 알을 부화시키면 그 생명체가 캐릭터 옆에 서 있고, 단조 키워드로 대검을 만들어내면 대검이 옆에서 비상하는 식이다.

▶ '단조' 키워드가 적힌 카드를 사용하면 캐릭터 옆에 대검이 생성된다.
편의성 개선도 이루어졌다. 지도에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됐는데, 멀티 플레이에서 경로를 제안할 때 유용하다.

▶ 주로 경로 표시에 사용되는 그리기 기능.
화면 상단에는 보스 아이콘이 상시 표시되도록 바뀌었다. 전투나 이벤트 중에 지도로 돌아가지 않아도 이번 막의 보스가 누구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 화면 상단의 아이콘을 통해 확인 가능한 이번 막의 보스.
스토리에 공을 들인 흔적도 보인다. 고대의 존재나 보스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생겼고,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풀리는 연대표도 단순히 콘텐츠를 여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간단한 배경 스토리를 먼저 감상하고 나서야 획득하는 방식이라, 자연스럽게 이 세계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다.

▶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마다 연대표의 역사가 해금되고, 역사를 감상하면 추가 요소를 해금할 수 있다.
전작에 없던 멀티플레이도 추가됐다. 최대 4인까지 함께 플레이할 수 있으며, 멀티플레이에 맞게 게임 전반이 조정된다.
인원수에 비례해 적의 체력이 올라가고, 보물 상자에서 유물이 나오면 인원끼리 나눠 갖는 방식이라 어느 유물을 누가 가져갈지 고르는 순간도 생긴다.
협력 요소도 갖췄다. 전투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으면 쓰러진 동료가 전투 후 부활하고, 적의 공격력을 감소시키는 카드를 발동하면 같은 전투에 참여한 모든 플레이어가 이득을 본다. 보유한 포션을 팀원에게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고, 멀티플레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카드도 존재한다.

▶ 최대 4인까지 함께 플레이 가능한 멀티플레이 모드. (출처: 메가 크리트 유튜브)

▶ '다른 플레이어'에게 이로운 효과로 구성된 멀티플레이 전용 카드.
# 7년 만의 귀환, 기대되는 정식 출시
<슬더스 2>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승부하는 대신, 검증된 틀 위에서 잘하는 것에 집중한 게임이다. 핵심 게임플레이가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독립 후속작이 아닌 DLC로 충분했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개선된 그래픽, 보강된 서사, 새로 추가된 멀티플레이는 확장이 아닌 후속작임을 표방하기에 충분했다. 7년 만에 만나는 더 나아진 ‘아는 맛’을 반길 이유는 충분하다.
<슬더스>를 경험했든 그렇지 않든, 전작 없이 바로 시작해도 무리가 없는 게임이다. <슬더스> 팬이라면 멀티플레이를 통해 주변에 적극적으로 권해볼 수도 있다.
앞서 해보기임을 감안하더라도 현시점의 완성도는 충분한 편이다. 챕터 구성과 핵심 시스템은 이미 갖춰진 형태로 제공되고 있고, 새로 추가된 캐릭터와 요소들은 <슬더스>의 익숙한 재미 위에 새로운 경험을 얹는다.
전작의 파고들기 요소인 승천 모드도 돌아왔다. 단계 수는 줄었지만 난이도는 전작과 비슷한 수준으로, 클리어 이후에도 즐길 거리가 충분하다. 정식 출시 전이지만 지금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 불꽃 안의 숫자로 단계를 확인할 수 있는 '승천 모드'. 단계가 높아질수록 디메리트가 추가된다.
<슬더스>가 그랬듯, 지금은 시작일 뿐이다. <슬더스>는 1년 2개월간의 얼리 액세스를 거치며 카드가 189장에서 283장으로 늘었고, 1,300개 이상의 버그를 수정했으며, 500번 이상의 밸런스 조정을 거쳤다.
<슬더스 2>도 같은 과정을 앞두고 있다. 57만 명의 플레이어가 함께하고 있는 만큼, 더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올 정식 출시가 기대된다.
▶ 일일 최고 동시 접속자 수 57만 명을 초과한 <슬더스 2>. (출처: 스팀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