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인격>으로 전 세계 4억 명의 유저들을 매료시킨 개발사 조커 스튜디오가 마침내 자신의 패를 꺼냈다. 지난 5일 시작된 첫 번째 CBT를 통해 6년 넘게 준비해 온 신작 <렘넌트의 바다>를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전작에서 증명한 독특한 미감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한다. 목각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는 기묘한 세계, 17세기 해적의 황금기를 화려하게 뒤덮은 강렬한 그래피티, 그리고 키치하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미국 코믹스 스타일의 연출까지. 실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색적인 조합이다.
개발사는 이 게임을 단순히 '오픈 월드'나 '해양 어드벤처' 같은 흔한 태그로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게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렘넌트의 바다>는 "죽음과 부활을 오가는 무한한 여행이자, 지칠 줄 모르고 앞을 향해 노를 저은 끝에 모든 것의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라고.
이 난해한 문장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당신에게, 이 글이 작은 나침반이 되길 바란다. 자,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쳐라. 떠나간 이들의 기억이 부유하는 '잔재의 바다'를 항해할 시간이다.

# 시작은 미지의 바다로부터
이야기의 시작은 미지의 바다, 그 한가운데서부터다. 끝없는 수평선이 시야를 가득 채운 망망대해. 파도조차 일지 않던 고요한 수면은 이윽고 칼로 베어낸 듯 반듯하게 갈라진다. 투명한 장막 너머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존재와 거대한 달이 비치고, 표류하던 인형은 심연 속으로 넋을 잃고 빠져든다.
게임은 다시 깨어난 인형의 시선을 따라 진행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바다 위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남겨진 것은 어딘가를 가리키는 나침반, 그리고 곁에서 발견된 수수께끼의 한 소녀뿐이다. 시계장이 '지그문트'의 도움으로 눈을 뜬 주인공은, 아직 잠들어 있는 소녀를 뒤로한 채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긴다.
▶ 갈라진 바다 너머로 비치는 거대한 달.
▶ 시계장이 지그문트의 도움으로 깨어난 주인공. 함께 발견된 소녀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시끌벅적한 해적들의 도시 '오브토피아'에 도착한 주인공은 그곳에서 소녀를 쏙 빼닮은 인물 'R.S'와 조우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것이 단순한 방위가 아니라, 특별한 문양이 그려진 찢어진 깃발의 조각들임을 깨닫게 된다. 깃발의 정체를 밝혀내면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강렬한 믿음. 그는 선원들을 모아 깃발의 파편을 쫓는 긴 항해를 시작한다.
그의 배는 가라앉은 이들의 모든 기억을 삼켜버리는 '렘넌트의 바다' 위에 떠 있다. 플레이어는 이제 수많은 섬과 그 속에 숨겨진 보물, 그리고 위험이 도사리는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 소녀와 쏙 빼닮은 얼굴의 R.S
▶ 남겨진 나침반을 따라 찢어진 깃발 조각을 찾는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 자유로운 항해, 그런데 로크라이크를 곁들인
드넓은 바다를 떠도는 해적들의 모험을 다룬 게임은 이전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씨 오브 시브즈>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렘넌트의 바다>는 여기에 '로그라이트'의 문법을 더해 확실한 차별화를 꾀했다.
모든 항해는 거점 도시 오브토피아에서 시작된다. 여정을 함께할 배를 고르고, 선원들을 배치하면 닻을 올릴 준비는 끝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단 하나. 한 번 시작된 항해는 멈추지 않는다. 막대한 보물을 싣고 금의환향하거나, 거친 파도에 삼켜져 빈손으로 돌아오거나.
게임 속 바다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며, 수많은 섬으로 가득 차 있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특정한 항로를 강요하지 않는다. 키를 잡은 것은 플레이어이며,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지는 오롯이 선장의 몫이다.
▶ 바다의 섬 중 하나. 이런 섬이 바다 도처에 있다.
각각의 섬은 보물과 비밀이 숨겨진 오픈 월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형족 NPC의 의뢰를 수행하거나, 섬을 지배하는 필드 보스를 처치할 수도 있다. 그뿐만인가. 숨겨진 비밀 스테이지에서 퍼즐을 풀거나, 낚시와 마작 같은 미니게임을 즐길 수도 있다. 전투에 지쳤다면 때로는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멍하니 휴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담이지만, 이때 들려오는 OST의 퀄리티가 훌륭하다. 게임 특유의 밝고 청량한 비주얼에 딱 맞는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가 엄선되어 수록되었는데, 이는 탐험의 몰입감을 한층 끌어올리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 주사위 게임부터
▶ 익숙한 리듬 게임까지, 다양한 미니 게임이 숨겨져 있다.
▶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다채로운 OST는 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핵심은 '성장'이다. <렘넌트의 바다>는 무작위로 등장하는 장비와 스킬, 능력치를 선택하는 영락없는 로그라이트의 성장 방식을 따른다.
선원으로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고유의 클래스 트리를 가진다.'뱃노래 조각(Shanties Shard)'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추가 능력치와 스킬을 조합하면 새로운 클래스가 해금되고, 이에 맞는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즉, 매번 달라지는 장비와 상황에 맞춰 최적의 빌드를 깎아내고, 이를 통해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 항해의 목표다.
▶ 무작위로 등장하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전형적인 로그라이크 스타일의 방식
▶ 스킬과 스탯을 잘 조합하면 새로운 클래스를 해금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항해는 선원들이 모두 쓰러지거나 무사히 귀환했을 때 마무리된다. 렘넌트의 바다에서 돌아오면, 그간 키워온 선원들의 레벨과 장비는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그 경험과 도시에 남긴 보물은 다음 항해의 밑거름이 된다. 짧은 재정비를 마치고, 새로운 선원들과 함께 다시 미지의 바다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렘넌트의 바다>가 선사하는 '끝없는 모험'이다.
▶ 수집한 보물을 운송해 받은 보상은 항해가 끝난 이후에도 유지된다.
# 익숙한 턴제 전투에 더해진 주사위
그렇다면 항해 도중 수없이 마주하게 될 전투는 어떻게 진행될까? 조커 스튜디오는 익숙한 턴제 전투 문법에 해적의 상징과도 같은 '주사위'를 더해 자신들만의 변주를 완성했다.
전투의 시작은 필드에서부터다. 필드 위의 몬스터들은 난이도에 비례하는 고유 숫자를 가지고 있다. 플레이어가 선제공격을 가하면 타격 횟수만큼 주사위를 굴릴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 주사위 합이 몬스터의 숫자보다 높으면 적 전체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유리하게 전투를 시작할 수 있다.

▶ 숫자가 뜬 몬스터를 공격하면 주사위를 굴릴 수 있다. 화면의 햄스터는 이번 게임의 마스코트다.
본격적인 전투는 턴제로 진행되며, 여기서도 주사위는 전황을 뒤집는 핵심 열쇠다. 몬스터가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려 할 때 약점과 함께 특정 숫자가 드러나는데, 주사위를 굴려 이 숫자보다 높은 합을 만들면 적의 행동을 저지하고 추가 턴을 얻을 수 있다. 주사위는 매 턴 하나씩 충전되며, 한 번에 최대 3개까지 전략적으로 배팅할 수 있다.
여기에 속성 시스템도 더해져 전투의 깊이를 더한다. 최대 4명으로 구성된 선원들은 저마다의 속성을 지니는데, 적과 동일한 속성으로 공격할 경우 주사위 요구값이 대폭 낮아진다. 예컨대 다른 속성으로는 눈금 합이 8 이상이어야 성공하는 판정도, 상성 속성으로 공격하면 1만 나와도 성공할 수 있는 식이다. 이처럼 속성 기반의 전략적 파티 구성에 주사위라는 확률의 변수가 더해지며, 플레이어는 매 턴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를 즐길 수 있다.
▶ 턴제 전투에서도 주사위를 굴려 상대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다.
물론, 해적 테마에 빠질 수 없는 해상전도 건재하다. 바다 위에서는 실시간으로 적선과 포격전을 벌이게 된다. 3인칭 시점에서 쾌적하게 조준 사격을 할 수도 있지만, 한 번쯤은 직접 대포를 잡고 1인칭 시점에서 방아쇠를 당겨보길 권한다. 파도를 타며 적함을 격침시키는 손맛은 <씨 오브 시브즈> 못지않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 해적 게임하면 빠질 수 없는 해상전도 가능!
# CBT에서 이 정도의 콘텐츠를?
이 밖에도 미처 다루지 못한 흥미로운 디테일들이 산재해 있다. 싱글 플레이 중심임에도 <다크소울> 시리즈처럼 다른 유저에게 메시지를 남겨 소통할 수 있는 소셜 기능이나,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오브토피아의 전경은 직접 확인해봐야 할 즐거움이다.
다만, 이번 CBT에서는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아 세부적인 정보까지 파악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선원 모집의 구체적인 BM 구조라던가, 인게임 재화인 '에버나이트 젬(Evernight Gem)'의 정확한 사용처 같은 경제 시스템은 차후를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첫 CBT임에도 불구하고 10시간이 훌쩍 넘는 탄탄한 볼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렘넌트의 바다>는 이번 테스트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개발진이 유저 피드백을 바탕으로 한층 더 개선된 모습을 약속한 만큼, 정식 출시 때는 완벽한 한국어화와 함께 이 매력적인 바다를 온전히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기회가 되면 게임의 OST는 꼭 들어보길 권한다. 게임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