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어느 정도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단단한 갑옷을 입은 용사가 성에 갇힌 미녀를 구한다'라는 클리셰는 어느 매체를 막론하고 거의 교과서처럼 활용됐다. 게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리즈와 캡콤의 <마계촌> 시리즈를 비롯해 이런 전통적인 클리셰를 활용한 게임이 차고 넘칠 지경이다.
하도 클리셰가 굳건해서 그런지 이런 정석에 가까운 클리셰를 다양하게 비트는 게임도 심심찮게 나오고는 한다. 인디 게임 중에서도 이런 게임들이 몇 가지 있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까지 왜곡하는 <브레이드>나 구출 대상인 공주를 반대로 살해하려 드는 <슬레이 더 프린세스> 같은 게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주에 새로 출시된 <러비쉬> 역시 전통적인 클리셰를 색다른 방식으로 비튼 게임이다. 물론 이 게임 또한 단단한 갑옷을 입은 용사가 마왕의 성에 갇힌 미녀를 구한다는 골자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녀를 구할 주인공이 다소 막 나가고 막돼먹었다는 사소한 차이가 하나 존재할 뿐이다.
▶ 플랫포머 한 걸음에 코미디 한 걸음, 반반 패러디 많이.
# 레트로의 탈을 쓴 B급 코미디
<러비쉬>는 앞서 패미컴 스타일의 메트로배니아 게임 <아스탈론: 대지의 눈물>을 출시했던 LABS Works의 신작이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마왕성에 침입한 용사 '솔로몬'의 이야기를 담은 횡스크롤 액션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이다.
1980년대 패미컴 시절 게임이 떠오르는 8비트 풍의 픽셀 그래픽과 칩튠 사운드트랙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레트로의 향수를 제대로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 시절 플랫포머 게임의 감성을 잘 살린 특유의 인터페이스 구성 및 레벨 디자인, 조작감 등 개발사의 특색이라 할 만한 부분도 여전히 잘 살아있다.
다만 캐릭터와 스토리에 있어서는 전작과 현격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다소 무겁고 진지했던 전작과는 다르게 이번 <러비쉬>에서는 경박하면서도 뒤틀린 성격을 지닌 주인공을 내세우며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게임 그 어디를 둘러봐도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선지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게임 내에 온갖 패러디와 오마주가 산재해 있다.
▶ 게임 화면만 딱 봐도 알 것 같은 패미컴 시절 8비트 감성
▶ 공룡이 불꽃 대신 거품을 뿜는 그 게임을 안다면 몹시 반갑게 다가올 풍경.
일단 전형적인 용사물 클리셰를 완전히 이탈한 스토리가 꽤나 흥미롭다. 당장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마왕성에 침입한 주인공 솔로몬부터가 범상치 않다. 시작부터 동료들을 버리는 건 물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뒤 나타나는 이벤트에서 그의 행적은 한결같이 경망스럽기 짝이 없다.
특히 하얀 하트가 그려진 헬멧을 활용해 상대를 강제로 매료시키는 광경은 과연 주인공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바르고 올곧은 용사의 전형을 벗어던진 이런 광경도 나름 흥미롭게 다가온다.
각종 패러디와 오마주 또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1980년대 레트로 감성을 강하게 추구한 탓인지 유독 저 시절 게임의 패러디와 오마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다.
현시점에서 보면 무려 40년가량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게임들을 가져다 쓴지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패러디는 스테이지와 이벤트를 가리지 않고 마구 등장한다. 그야말로 패러디와 오마주가 홍수처럼 흘러넘친다고 봐도 될 정도다.
적절한 패러디와 오마주는 늘 그렇듯 알면 반갑고 몰라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런 패러디와 오마주의 재미를 꽤 적절하게 잘 살리고 있다.
▶ 그야말로 막되먹은 주인공의 표상. 주인공으로써의 권위 따위는 개나 줘버린 모습.
▶ 가장 최신 트렌드라고 볼 수 있는 뱀서라이크도 이렇게 보니까 엄청 옛날 게임처럼 느껴진다.
# 짧은 호흡, 풍부한 서브 콘텐츠
<러비쉬>에는 총 90가지 스테이지가 준비돼 있다.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특정 조건을 충족시켜 탈출구를 열고, 주인공 솔로몬이 그곳에 도달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극히 일부 특수한 스테이지를 제외하면 대개는 오로지 한 화면 안에서 모든 게임이 진행된다. 덕분에 스테이지 하나를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정말 짧으면 15초 내외고, 길어봐야 1분을 넘지 않는다. 그만큼 게임의 호흡이 짧아 게임의 진행 속도가 빠르다(스테이지를 클리어한 뒤 랜덤으로 나타나는 이벤트를 반드시 봐야 한다는 걸 감안해도).
게다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한 대(혹은 두 대)를 맞으면 무조건 사망하니 긴장감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 이는 곧 짧고 굵게 즐기기 좋은 게임이란 걸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 각 스테이지의 디자인에 있어서도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을 만큼 적절하고 합리적인 난이도 배분이 돋보인다. 정확하고 정교한 컨트롤을 요구하긴 한다. 하지만 스테이지의 규모가 작고 클리어 시간도 짧아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개인적인 체감으로는 조금 어렵긴 해도 '하드코어'라고 불릴만한 수준은 아니고, 살짝 매운 수준이라고 본다.
열 번째 스테이지마다 준비된 보스전은 각 보스의 체력이 많은 대신 패턴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이로 인해 보스전의 흥미는 조금 떨어지는 대신, 고전 플랫포머 게임의 감성을 추구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밖에 상점에서 용사의 추가 능력을 해금하는 아이템을 구매해 체감 난이도를 더 낮출 수 있다. 각 스테이지마다 불살, 스피드런, 숨겨진 왕관 찾기 등의 조건이 걸려 있다. 이를 충족시키면 추가 왕관을 습득할 수 있어 한 스테이지를 여러 번 플레이해야 하는 동기도 잘 부여한 모습이다.
▶ 대부분의 스테이지는 하나의 화면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 놀랍게도 불살 플레이가 가능하다! 게다가 불살 플레이에 추가 보상까지 걸려있다.
은근히 서브 컨텐츠에 많은 공을 들인 게임이기도 하다. 특정 이벤트를 통해서만 즐길 수 있는 몇 가지 미니 게임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스테이지에는 숨겨진 통로나 추가 아이템, 새로운 NPC와의 만남 등 각종 이스터 에그도 깨알같이 준비돼 있다.
특히 7개의 어둠의 달의 경우 이를 수집하기 위한 과정에서 더욱 난이도 높은 플랫포머 구간을 거쳐야 한다. 이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데, 이를 전부 수집해야 진입할 수 있는 숨겨진 보스전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 외에도 데모 격에 해당하는 프롤로그가 탑재돼 있고, 이 프롤로그에서만 수집할 수 있는 요소가 별도로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서브 컨텐츠인 데다가 게임의 스케일이 그리 크지 않아 미니 게임도 금방 끝나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풍부한 서브 컨텐츠의 존재는 분명 인상적으로 다가올 만하다.

▶ 이것저것 미니 게임이 정말 많다. 알게 모르게 서브 컨텐츠가 풍부한 편.
다만 고전 플랫포머의 감각을 그대로 재현한 탓인지, 그 당시 플랫포머 게임에서 일괄적으로 드러나는 단점이 이 게임에서도 어느 정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스테이지 디자인상 정교하면서도 테크니컬한 조작을 요구할 때가 많은데, 조작이 살짝 뻑뻑한 데다가 충돌 판정이 크다 보니 의도한 대로 조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또한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도중 게임을 잠시 멈추거나 메뉴 화면을 부르는 기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각 스테이지가 워낙 짧아 금방 클리어하거나 혹은 곧바로 죽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럼에도 일시 정지 기능의 부재는 여전히 아쉽게 다가온다.
곧바로 엔딩으로 직결되는 마왕과의 최종 보스전 역시 조금은 실망스럽다. <악마성 드라큘라>의 오마쥬를 다분히 의식한 점은 흥미롭지만, 마왕에게 데미지를 아예 넣을 수 없는 패턴이 몇 가지 있어 보스전 자체의 재미가 떨어져 버린다. 최종 보스전의 쉽고 어려움을 떠나 패턴의 불쾌함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그밖에 무작위로 나타나는 이벤트는 랜덤성으로 인한 재미를 유발한다. 다만 100% 달성을 위한 수집에는 방해로 작용해, 엔드 게임 콘텐츠로는 결함이 살짝 드러난다.
▶ 황당하게도 일시 정지 기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스테이지 구성이 작다지만 이건 좀…
▶ 공격이 아예 안될 때가 많아 보스전의 재미가 크게 떨어진다. <악마성 드라큘라> 오마쥬인 건 알겠지만…
# 총평
<러비쉬>는 용사물의 클리셰를 작정하고 비튼 경망스러운 캐릭터와 유쾌한 스토리 전개가 어우러진 인디 게임이다. 끝을 짐작하기 힘든 다양한 패러디와 오마주, 짧고 굵으면서도 플랫포머 장르의 기본에 충실한 레벨 디자인, 그리고 풍부한 미니 게임 및 서브 콘텐츠가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철저히 고전 플랫포머의 감성을 추구한 게임이니만큼, 고전 플랫포머 게임과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어느 정도 공유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패미컴 풍의 비주얼과 사운드는 굉장히 힙하게 다가오지만, 그 시절의 감각을 고스란히 살린 조작감과 난이도 배분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여러 고전 게임을 아우르는 패러디와 오마주는 누구나 즐기기 좋다. 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테크니컬한 조작을 요구하는 플랫포머 구간은 누구나 즐기기엔 어느 정도 난이도의 부담이 따른다. 이로 인해 추천 타겟층을 잡기가 다소 애매한 게임이기도 하다. 그래도 레트로 감성의 고전적인 플랫포머 게임을 원하는데, 너무 하드코어한 게임은 피하고 싶다면 이 게임이 꽤나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쿠타르크 (블로거)
2014년부터 10년째 인디게임 리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1,000건이 넘는 게임 리뷰를 작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