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릿 스펀지’. 말 그대로 슈팅 게임에서 막대한 양의 총알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톰 클랜시의 더 디비전>(이하 디비전) 시리즈는 이 불릿 스펀지로 악명이 자자했고, 지금도 <디비전>하면 불릿 스펀지, 불릿 스펀지 하면 <디비전>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이 불릿 스펀지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말을 아끼겠다. <디비전>이 불릿 스펀지 게임이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첫인상의 낙인이 이토록 무서운 법이다.
이러한 오명을 의식했던 것일까. 개발사 매시브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비소프트의 슈팅 게임 이벤트 ‘FPS Day X’에서 곧 선보일 <디비전 2>의 신규 모드 ‘리얼리즘 모드’를 최초로 공개했다. “불릿 스펀지 없는, 더 현실적인 모드”라는 이들의 설명에 많은 유저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당시 현장에 참석했던 기자는 한발 앞서 리얼리즘 모드를 체험해볼 수 있었다. 사실 얼마 전 공개된 <디비전 2> 생존 모드의 시연으로 알고 간 것이었지만, 그러면 어떠랴. 자칭 ‘명예 디비전 요원’인 기자에게는 그저 반가운 소식일 따름이었다. 늦게나마 리얼리즘 모드를 플레이해본 소감을 전한다.
▶ 지난 1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FPS Day X' 현장에서 최초로 공개된 <디비전 2>의 리얼리즘 모드
# 그래서, 리얼리즘 모드가 뭔데?
소감을 밝히기에 앞서, <디비전 2>의 리얼리즘 모드에 대해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리얼리즘 모드는 시리즈 출시 10주년을 기념해 준비된 신규 콘텐츠로, 오는 3월부터 시작되는 10주년 기념 시즌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10주년 기념 콘텐츠답게, 리얼리즘 모드는 10년 전 <디비전> 1편이 선사했던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작과 동일하게 뉴욕을 배경으로 한 ‘뉴욕의 지배자’ 확장팩 캠페인을 무대로 하며, 전문화나 시그니처 무기 등 <디비전 2>에서 추가된 요소들은 배제됐다. 오직 전용 캐릭터로만 플레이할 수 있고, 캐릭터 및 장비의 성장 또한 불가능하다.
리얼리즘 모드는 이름 그대로 극한의 현실성을 추구한다. 실제 전장처럼 적의 위치를 알려주는 레이더는커녕, 적들의 레벨과 체력을 보여주는 UI조차 없다. 그뿐인가? 무기의 잔탄량도 표시되지 않으며, 한 번 잃은 체력은 자연 회복되지 않는다. 스킬 쿨타임은 가혹할 정도로 길어졌고, 현장에서 조달 가능한 탄약은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핵심은 피격 부위에 따른 대미지 판정의 현실화다. 손이나 발보다 머리에 총을 맞는 것이 훨씬 치명적인 것은 당연한 이치. 이에 맞춰 부위별 대미지가 전면 재조정됐다. 누구든 머리를 제대로 맞으면 즉사하니, “불릿 스펀지는 없다”던 개발진의 설명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 화제의 리얼리즘 모드, 직접 해봤습니다
이번 시연에선 뉴욕의 지배자 확장팩 캠페인 중 ‘월 스트리트’ 임무를 리얼리즘 모드로 진행했다. 아론 키너의 수하 4명 중 하나인 ‘제임스 드래고프’를 처치했던 바로 그 미션이다.
시연 버전의 세팅은 간소했다. 주무기는 돌격소총, 경기관총, 산탄총, 지정사수소총 등 4종이었고, 스킬은 펄스와 터렛만 해금된 상태였다. 맵 곳곳에 SHD 테크 상자 아이콘이 표시된 것으로 보아, 실제 플레이 시엔 이를 수집해 추가 스킬을 해금하는 방식일 것으로 추측된다.
본격적인 플레이에 돌입하자 가장 먼저 뼈저리게 다가온 것은 UI의 부재였다. 화면 좌측 상단의 레이더가 사라지니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막막했다. 적의 머리 위 마크도, 등급과 체력을 보여주는 체력바도, 심지어 피격 방향을 알려주는 인디케이터조차 없다. 색적(索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과제가 된 셈이다.
믿을 것은 오직 두 눈뿐이다.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배경과 적을 구분하기 위해 화면 구석구석을 뚫어져라 쳐다봐야 했다. 정 위치를 모르겠다면 아껴둔 펄스를 돌리는 수밖에. 덕분에 평소엔 지나치던 게임의 배경 디테일을 감상하게 된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 익숙한 레이더도, 적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마크와 체력바도 없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おついちTube')
▶ 색적할 수단이 없으니 눈을 크게 뜨고 배경 속에 숨은 적들을 찾는 수밖에.
교전이 시작되자 ‘현실적인 대미지 판정’의 의미를 즉각 깨달을 수 있었다. 적이 누구든 머리를 맞으면 단 ‘한 방’이다. 야닉 반체로 디렉터는 클리너의 가스통 같은 약점이 있는 적이라도 머리를 노리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게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디비전>은 악명 높은 ‘불릿 스펀지’ 게임 아니었나. 소위 ‘샷발’만 좋다면 TTK(Time-to-kill)를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플레이어에게도 ‘양날의 검’이다. 머리가 아닌 팔, 다리, 보호 장비 등을 맞췄을 땐 대미지가 급감하는 것이 체감됐다. 반대로 플레이어 역시 머리를 맞으면 치명적이다. 1편의 향수를 자극하는 3칸짜리 방어도에 체력 자연 회복마저 없으니, 엄폐 없는 전투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탄약 부족 또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기본 소지량도 적은데 수급처마저 마땅치 않다. 잔탄량 UI조차 사라져(무기 교체 시 잠시 표시되긴 하나 의도된 기능인지는 불명확하다) 남은 총알 수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결국 실시간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무기를 바꿔가며 싸우는 처절한 사투가 이어졌다.
▶ 누구든 머리에 한 방만 맞으면 바로 죽는다. 정말 획기적인 TTK가 아닐 수 없다.
▶ 잔탄량 표시 UI도 사라진 상황, 대신 잔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를 표시하는 UI가 추가됐다.
▶ 무기 교체 UI로 잔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게 의도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킬을 쓰면 되지 않나?”라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그 또한 쉽지 않다. 설치한 터렛은 적의 총알 몇 발에 고철 덩어리가 됐다. 쿨타임도 길어 마음껏 쓸 수 없다. 결국 터렛은 공격용이 아닌, 적의 관심을 끌거나 위치를 파악하는 색적용으로 써야 했다. 다행히 자동 조준 기능은 살아있었으니까.
여기에 ‘스태미나 시스템’까지 추가되어 긴장감을 더한다. 전력 질주를 하면 UI 하단에 하얀색 게이지가 감소하고, 이것이 소진되면 뛸 수 없다. 구르기 또한 스태미나를 소모하니, 연속 구르기로 공격을 피하는 꼼수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보스전. 퀘스트 UI에 보스의 체력바가 뜨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보스 공략법의 변화다. 드래고프는 시야 확보를 위해 방패 중앙을 방탄유리로 마감했는데, 이 유리를 깨고 머리를 맞추니 보스조차 단 한 발에 쓰러졌다. 우리가 알던 그 <디비전>과는 분명히 궤를 달리하는 경험이었다.
▶ 심지어 보스마저도 머리를 맞으면 한 방에 죽는다. 내가 알던 <디비전>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 갑자기 왜 리얼리즘 모드를 추가하는가?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매시브 엔터테인먼트는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리얼리즘 모드를 선보이는 것일까? 현장에서 개발진이 내놓은 답변은 명료했다. “불릿 스펀지를 덜어내고 본연의 전투 경험을 살려, 기존 유저에게는 환기를, 신규 유저에게는 <디비전>의 매력을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에는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분명 이번 리얼리즘 모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RPG의 숙명과도 같은 성장 시스템과 그로 인한 불릿 스펀지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 과감히 성장을 포기한 선택은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우려도 남는다. 이 모드는 한시적 이벤트일 뿐, 수백 시간을 파고들 엔드 콘텐츠가 아니다. 그렇다면 기존 유저들이 굳이 성장도 없는 이 모드에 뛰어들게 할 확실한 동기나 보상이 필요한데, 시연 버전에선 그 명쾌한 해답을 찾기 어려웠다.
신규 유저 유입 효과 역시 미지수다. 냉정히 말해 리얼리즘 모드와 본편의 경험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 리얼리즘 모드로 입문한 유저가 시즌 종료 후 마주할 본편의 경험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 극명한 괴리감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이는 개발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보인다.
▶ 리얼리즘 모드로 입문한 유저들도 결국 본편을 플레이해야 하는데, 이 괴리감을 어떻게 좁힐 것인지 의문이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코보잭')
그렇다면 이 모드의 진정한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시리즈의 오랜 팬이자 기자의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하건대, 이번 리얼리즘 모드는 향후 추가될 ‘생존 모드’를 위한 테스트베드로 보인다.
시각 정보를 차단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극한의 효율을 짜내야 하는 리얼리즘 모드의 문법. 그리고 혹독한 환경에서 자원을 모아 탈출해야 했던 전작의 ‘생존 모드’. 어떤가, 퍼즐 조각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이번 모드에서 검증된 시스템들이 머지않아 우리가 맞이할 생존 모드의 핵심 뼈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 <디비전>의 생존 모드의 화면. 텅 빈 화면이 지금의 리얼리즘 모드와 비슷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