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만으로) 마흔이 됐다. 그리고 업계의 격동기를 함께 하다 보니,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PC MMORPG의 전성기, 모바일의 폭발, 콘솔·패키지로의 확장까지, 한국 게임 산업은 끝없이 탈바꿈해 왔다. 그런데 오랜 시간 변하지 않았던 문장이 하나 있다.
게임을 하려면 PC. MAC은 ‘일하는 사람들’의 기계.
20년 가까이 정답처럼 통하던 말이다. 지금도 커뮤니티에서 “맥으로 게임 되나요?”가 올라오면, 댓글은 늘 같다.
그 돈이면 PC를 맞추라.
하지만, 이 단단한 구도에 균열이 생긴 순간을 매년 조금씩 목격해 왔다. 그리고 그 변화가 오늘, 서울에서 열린 Apple Game Showcase Seoul이라는 애플의 국내 첫 게임 쇼케이스에서 결정적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행사는 단순히 신작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애플이 ‘한국 게임 시장을 의식하고 있다’라는 최초의 근거였고, 동시에 “맥과 아이폰을 게임 플랫폼으로 성장시키려는 전략이 본격화했음”을 보여준 신호였다.
아래의 이야기는 바로 그 ‘현장’에서 관찰한 변화들이다.
# 게임 유저와 개발자가 가장 먼저 알아챈 변화 - 아이폰

몇 년 전 <붕괴3rd> 랭커 유저를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그는 안드로이드 유저였지만, 아이폰을 추가로 샀다며, “<붕괴3rd> 때문에 샀다”라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 터치 입력의 즉각성
- 안정적인 프레임
- 크래시가 거의 없는 앱 환경
“보고 피해야 하는 게임에서 프레임은 생명”이라는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감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장에서 만난 <도원암귀> 개발자도 같은 얘기를 했다. 시연 빌드는 ‘전혀 최적화되지 않은 버전’인데,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는 깔끔하게 돌아간다고. 같은 빌드를 안드로이드에서 실행하면 플레이가 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초 공개한 TGS의 시연대가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깔려 있던 이유였다.
아이폰 17 Pro는 A19 Pro와 베이퍼 챔버 조합으로 모바일 벤치마크 상위권을 휩쓰는 중이고, 체감 성능과 발열 관리 측면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보여준다. 모바일 게임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게이머라면 아이폰을 선택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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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성능이 아니라 결제 생태계다.
구글은 리워드·포인트·구독·쿠폰·환불 정책까지 소비자 친화적인 이점을 촘촘하게 깔아놨고, 갤럭시스토어, 원스토어는 자체 스토어 프로모션으로 공격적으로 할인 정책을 쓴다. 실제로 한국 시장에서는 대형 프로모션 하나가 수천만원 대의 앱마켓 데이터 플랫폼을 무력화하는 사례가 빈번할 정도다.
반면 애플 앱스토어의 공식 정책은 철저하게 고정형이다. 할인 폭도 제한적이고, 리워드나 페이백 구조도 거의 없다. 한국처럼 ‘할인과 보너스’가 구매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시장에서는 분명 불리하다.
흥미로운 건, 애플이 이 약점을 정면 돌파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대신 애플은 시선을 완전히 다른 곳. 즉, 게임 커뮤니티와 콘솔 UX로 돌렸다.
# 애플은 이제 “콘솔” 자체를 가져오려 한다

올해 WWDC에서 공개된 ‘Games’ 앱은 그 상징적인 첫 단계다. 애플 최적화 게임 카탈로그, 애플 아케이드 통합, 친구 기반 플레이까지 모두 하나의 화면에 묶어낸 건, 콘솔 UX를 iOS 위에서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다.
현장에서 만난 <세븐나이츠 리버스> 개발팀도 <세나리>에 Games 기능을 적용한 뒤 업적과 업데이트 노출을 한 곳에서 볼 수 있게 했다. <쿠키런: 오븐스매시>는 좀 더 나아가 현실 친구와 3:3 매치가 바로 이어지는 구조까지 구현했다.
결제라는 약점 대신, “친구와 함께 게임한다”라는 경험 자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판을 다시 짜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실적인 제약은 분명하다. 게임센터는 이제 계륵이 됐고, 친구, 업적 연동은 있으나, 실제 게임 내 친구와는 분리되어 있다. 모바일 게임의 다양한 환경을 고려하면 콘솔 UX를 그대로 가져오는 건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애플이 이 간극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Games 플랫폼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의 연장선에서, 애플이 전혀 다른 영역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현장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 뜻밖의 해답: 데스크톱 생태계와의 연결

의외의 가능성은 현장에서 시연한 <아이온 2>에서 드러났다. 이 게임은 모바일은 ‘서브’에 가깝고 데스크톱 플레이가 중심이다. 현장에서 개발팀은 현재 베타로 제공되는 모바일 컨트롤러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고 맥에서 아이패드 버전의 <아이온 2>가 키보드와 마우스로 네이티브하게 작동하는 업데이트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지난 11월 출시 후, PC 버전 지원 이슈로 여전히 곤욕을 치르는 <스타세이비어>가 맥에서는 아이패드 버전으로 완벽히 실행된다는 사실이다. 개발사가 한 작업은 단순히 “맥에서도 제공” 체크박스 하나였다. 애플 실리콘의 통합 아키텍처가 만들어낸 기묘하면서도 강력한 이점이다.

# 맥은 이제 ‘앱플레이어 머신’을 넘어 AI로 간다.
<P의 거짓>은 한국 패키지 게임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이정표를 남겼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게임은 맥 버전이 PC·콘솔과 동시 출시된 작품이기도 하다. AAA 타이틀이 맥을 지원한다는 건 의미가 다르다.
이후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사이버펑크 2077>, <바이오하자드 2:RE> 같은 초대형 타이틀들이 맥 지원 대열에 합류했다. 쇼케이스 현장의 <인조이>도 마찬가지다.

<인조이>는 흔히 ‘K-심즈’라 부르는 라이프 시뮬레이션 장르다. 수십, 수백 명의 ‘조이’들이 서로 다른 성격과 우선순위를 가지고 매 순간 상호작용을 한다. 이 장르는 겉보기엔 아기자기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인공지능 기반 시뮬레이션 연산 덩어리다.
바로 이 복잡한 연산 때문에, <심즈> 외에는 대형 타이틀이 등장하기 어려웠고 모바일이나 콘솔에서도 구현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데 현장에서 만난 개발팀은 “애플 실리콘의 뉴럴 엔진이 연산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고 설명했다. 사실 애플은 2017년 A11 바이오닉부터 뉴럴 엔진을 꾸준히 고도화해 왔다. 맥은 지금 AI 서버 대안으로 언급될 정도로 연산 효율이 좋다.
결국, 언젠가 게임 그래픽의 핵심 경쟁력이 GPU의 원시 성능에서 AI가 처리하는 시뮬레이션·애니메이션·동작 해석 능력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 지점에서 애플 실리콘의 이점은 더 두드러질 것이다.
# 그렇다면, 애플은 게임 플랫폼이 되는가?

지금의 애플은 여전히 게임 시장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기보다, 자기 생태계 안에서 게임 경험을 어떻게든 확장하려는 제조사에 가깝다.
아이폰은 이미 최강의 모바일 게이밍 디바이스로 자리 잡았고, 맥은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AAA 생태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애플 아케이드와 Games 앱은 콘솔 UX를 모바일 경험으로 끌어오려 한다.
하드웨어·OS·결제·개발도구·AI 연산까지 전부 통합된 이 구조는 애플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토양이다.

아마 애플은 “콘솔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만들고 있다. 형태가 다를 뿐.
그리고 수년 간 당연하게 여겼던 그 문장,
게임을 하려면 PC. MAC은 ‘일하는 사람들’의 기계.
이 오래된 문장이 머지않아 의미를 잃게 될 날이 가까워졌음을, 애플은 이번 서울 무대에서 분명하게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