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젊고 물정 모르던 시절, 아버지는 내가 지금도 종종 되뇌는 조언을 하나 해주셨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면 꼭 기억해라, 세상 모든 사람이 너만큼 좋은 조건에 놓여있지 않다는 걸.”
<위대한 개츠비>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개인의 됨됨이를 살필 땐 그가 처한 조건까지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을 담고 있다. 그 말처럼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여러 요인-국적, 지능, 기질, 부모, 자산-에 휘둘리며 평생을 산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달성한 것이라 믿는 대부분의 성과조차 엄격히 따지면 온갖 선천적 조건의 영향 아래 있는 것들이다.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적 오만’이라는 용어를 통해 이 자명한 사실을 간과하는 이들을 꼬집는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발판이 된 우연과 행운은 잊어버리는 승자들의 경향을 보여준다.”
자상한 부모, 좋은 동네와 같은 ‘호재’ 덕분에 사람이 훌륭해질 수 있다면, 반대로 불우한 집안, 낙후된 동네 등의 ‘악재’로 인해 비루해지는 사람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린 ‘좋은 환경에서 컸으면 더 성공했을’ 이들에 대해선 종종 이야기하지만 ‘좋은 환경에서 컸으면 더 착하게 살았을’ 사람들은 거의 생각해 보지 않는다. 애드혹 스튜디오의 데뷔작 <디스패치>는 바로 그런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 슈퍼히어로 테마의 친숙한 변주
<디스패치>는 평범한 인간과 슈퍼히어로·슈퍼빌런이 뒤섞여 살아가는 가상 세계를 무대로 한 인터랙티브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히어로·빌런들이 지니는 초월적 힘의 출처는 유전자, 마법, 기술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주인공 ‘로버트 로버트슨 3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첨단 로봇(일명 ‘슈트’)에 탑승해 ‘메카맨’이라는 이름의 슈퍼히어로로 오랫동안 활약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숙적 슈라우드와의 일전에서 슈트가 복구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파괴되면서, 공식적으로 히어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은퇴한 로버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슈퍼히어로 직원들을 보유한 사설 보안업체 ‘슈퍼히어로 디스패치 네트워크’(이하 SDN)의 간판스타 ‘블론드 블레이저’다. 블론드 블레이저는 예고도 없이 로버트를 찾아와 SDN의 자금력으로 메카맨 슈트를 재건해주겠다며, 대신 그동안 어떤 히어로 팀의 전담 ‘디스패처’를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미국에서 디스패처(dispatcher)란 신고 전화 혹은 문자를 받고 적절한 경찰, 소방 인력을 현장에 파견(dispatch)하는 직업이다. 각종 민원·신고의 우선순위와 대응 방안을 일차적으로 판단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작지 않다. 각종 드라마틱한 상황에도 자주 노출되는 직업군이다 보니, 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나 게임도 종종 제작되어 왔다.
손해볼 것은 없다는 생각에 로버트는 스카웃을 받아들이지만, 이윽고 시작된 디스패처 활동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그가 담당하게 된 ‘Z팀’은 빌런에서 히어로로 갓 전향한 오합지졸들이기 때문. ‘피닉스 프로그램’이라는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SDN에 합류했지만 오직 돈벌이에만 관심 있는 이들은 아직도 히어로보다는 빌런에 가깝고, 상식에 벗어난 각종 행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로버트가-이전의 디스패처들과 마찬가지로-반나절도 못 가 도망칠 것이라는 Z팀의 예상과 달리, 그 또한 절대 만만치 않은 인물이란 사실이 금세 밝혀진다.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을 모두 바쳐가며 히어로 생활에 전념했던 로버트는 비슷한 설정의 여타 히어로 캐릭터들과 달리 ‘샌님’ 혹은 ‘천재’가 아닌 거칠고 질긴 현장직 베테랑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지점에서 <디스패치>의 내러티브가 지닌 첫 번째 특징이 드러난다.
▶ 팀원들을 설득하는 로버트.
# ‘히어로’ 이전에 ‘사람들’ 이야기
기존의 전통적 히어로물은 인물의 특출난 정체성을 중심으로 거대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패턴이 많다. 특히 DC 코믹스 작품들은 이런 경향이 워낙 강해 종종 ‘신화’에 비유되기까지 한다. 마블 코믹스는 그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여전히 ‘사람 냄새’를 전달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두 기업 작품 모두 결국엔 ‘특별한 존재들의 특별한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반면 <디스패치>는 등장인물들을 특이한 재주를 지닌 보통 사람에 가깝게 설정해 서사 전반적 현실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히어로물에서 필수로 여겨지는 영웅/빌런의 ‘탄생 설화’ 내러티브마저 고의로 대부분 배제했다. 대신 캐릭터들이 당장에 펼치는 활약과 상호간 다이나믹에 훨씬 집중하면서, 히어로물보다는 차라리 직업물의 구조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다.
주인공 로버트의 자잘한 여러 설정에서도 현실성 추구는 확인된다. 아무런 초능력 없이 오로지 슈트에 의존해 범죄에 맞서 온 로버트의 신체는 그 결과 각종 흉터로 가득하다. 심지어 메카맨 슈트마저도 무적의 결전 병기보다는 끝없는 유지보수가 필요한 일반적 전투 장비처럼 그려진다(로버트가 히어로 활동에 전재산을 탕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상처 투성이인 로버트의 신체
대신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스스로를 노출시켜 온 로버트의 정신만큼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단련된 상태다. 초능력자 집단인 Z팀의 위협과 조롱에 주눅들기는 커녕, 그들의 한심함을 꾸짖고 계도하는 로버트의 모습은 그래서 어색한 만화적 과장이 아니라 외려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소신으로 가득 찬 데다 노련하기까지 한 로버트의 매력을 한층 배가하는 요소다.
게임 속 여러 사건 또한 히어로물에 어울리지 않는 현실성으로 몰입감을 강화하긴 마찬가지. 설정상 SDN은 ‘구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사설 기업이다. 그러다보니 Z팀은 나무에 올라간 고양이 내려주기 따위의 별로 위급하지 않은 민원에도 출동해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안타깝지만 상당수 국가 공권력이 마주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설정은 기존 히어로들에 비해 훨씬 ‘직업인’에 가까운 Z팀의 정체성을 유저의 마음에에 와닿게 한다.
▶ 별별 잡무에 다 동원된다.
# 기본 게임 메카닉
로버트는 오전/오후에 한 번씩 구형 컴퓨터 앞에 앉아, SDN에 접수되는 각종 민원에 대응한다. 각각의 민원에는 파견될 수 있는 인원의 최대치와 해결에 필요한 능력치(전투, 기력, 기동성, 카리스마, 지능)가 정해져 있다. 다만 후자는 수치상으로 직접 드러나지 않아, 유저가 신고 내용을 통해 유추해야 한다. 가령 ‘빨리’ 와서 악당들을 ‘물리쳐달라’는 신고가 들어오면, 기동성과 전투력이 높은 캐릭터를 파견해 보는 식이다.
모든 신고는 시간제한 내에 대응 못 할 경우 실패로 돌아간다. 일단 배치 명령이 떨어지면 캐릭터들은 각자의 이동 속도에 맞춰 현장을 방문, 시간을 들여 사건에 대응한 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한다. 복귀한 뒤에는 다시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야 다시 현장에 배치될 수 있다. 민원의 성패는 필요한 능력치에 얼마나 잘 맞춰 인력을 배치했는가에 따라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두 명 이상의 캐릭터를 한 임무에 배치하면 능력치를 단순 합산한 것 이상의 능력치 증폭이 이뤄지면서 성공 확률이 비약적으로 커진다. 따라서 실패를 방지하고 싶다면 한 민원에 복수의 캐릭터를 배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일손이 모자라 일부 민원을 놓치거나, 민원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력만 보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미션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단기/장기적으로 게임플레이에 영향을 미친다. 우선 임무 성공 시 캐릭터는 경험치를 쌓아 랭크를 올리게 된다. 랭크를 1 올리면 능력치 포인트를 1점 획득해 원하는 항목에 투자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캐릭터들은 기존의 자기 약점을 보완할 수도, 혹은 원래의 강점을 더 강화할 수 있다. 반대로 임무에 실패한다면 배치된 캐릭터가 확률적으로 부상을 입는다. 1회 부상당하면 해당 근무 동안 능력치가 1점씩 감소하고, 두 번 연속 부상당할 경우 아예 근무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신중한 배치는 필수다.
▶ 확률 기반의 성패 시스템
# 메카닉과 스토리의 정교한 연계
<디스패치>의 이러한 파견 메카닉은 일견 단순하고 지루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게임의 핵심 축인 ‘스토리’ 및 ‘캐릭터’와 정교하게 맞물려 서사의 힘을 강화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우선 Z팀은 미션 내용에 따라 캐릭터 성격에 어울리는 대사를 자주 읊는다. 대부분은 코믹한 분위기에 맞게 웃음을 주는 것들이며, 더 나아가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쌓인 각 인물에 대한 정성적 분석은 다시 게임플레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가령 일부 미션 중에는 특정 캐릭터를 배치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발생하는 특수한 것들이 있다. 만약 캐릭터의 특성을 충분히 잘 파악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을 예측해 최선의 상황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게임 후반부에 도시 정전 상황에서 여객기를 긴급 착륙시키는 미션이 등장하는데, 이때 빛을 사용하는 캐릭터 ‘프리즘’을 공항에 배치하면 빛 능력을 이용해 비행기를 안전히 유도해 내는 특수 선택지가 활성화된다. 일종의 ‘텍스트 퍼즐’ 메카닉인 셈이다.
또한, 배치 시스템은 메인 스토리 전개에 따라 익숙한 포맷을 적절히 변주하면서 스토리 몰입을 극대화하는 역할도 한다. 예를 들어 Z팀 내 극심한 성과 경쟁이 벌어지는 초반부 스토리에서는 한 미션에 함께 파견된 캐릭터들이 서로를 곤경에 빠뜨리는 특수 이벤트가 계속 발생해 애를 먹인다.
▶ 스탯 투자를 통해 캐릭터를 강화한다.
성장 요소도 깨알같이 등장한다. 각 캐릭터는 간헐적으로 활성화되는 훈련 이벤트를 통해 고유한 패시브 능력 2개 중 하나를 개방시킬 수 있다. 이는 타 캐릭터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막대한 이득을 주면서 일종의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해준다.
이처럼 <디스패치>의 배치 시스템은 고유한 문법으로 전략적 재미를 주는 게임플레이 메카닉이자, 독특한 이야기 전달 장치다. 유저는 이를 통해 SDN 사무실의 한쪽에 앉아 온갖 기상천외한 상황을 마주하는 로버트의 처지와 역할에 깊이 공감하고 빠져들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알아봤듯 <디스패치>의 설정, 캐릭터, 게임 메카닉은 모두 히어로물의 장르적 제약을 넘어 현실감을 강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달성하려는 내러티브적 최종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히어로 애니메이션이라는 태생적으로 비현실적인 장르를 선택해 놓고 구태여 실감 나는 톤을 이야기 추구하는 데는 어떤 창작적 의도가 있을까?
▶ 슈퍼히어로(빌런)이지만 하는 짓이나 말은 지극히 평범 혹은 그 이하다.
# 몰락의 책임
<디스패치>의 진정한 핵심은 다양한 대화 선택지와 이로부터 뻗어 나가는 풍성한 애니메이션이다. 최근 수년간 3D 애니메이션 작품의 평균적 퀄리티는 여러 넷플릭스 히트작의 영향으로 대폭 상향된 바 있다. <디스패치>는 이렇듯 높아진 기준을 다시금 웃돌며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특히 실사 영화에서 영감을 빌린 여러 창의적 구도와 화면 전환 연출은 인상적이다. 또한, 히어로와 빌런 각자의 독특한 물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액션씬, 그리고 인물 내면을 선명한 질감으로 묘사하는 표정 및 목소리 연기는 게임플레이 파트를 완전히 배제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가치가 느껴진다. 실제로 <디스패치>는 본래 TV 시리즈로 계획했다가 피벗된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디스패치>의 이러한 고퀄리티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다채로운 내러티브를 감상하다 보면, 게임이 유저들에게 반복적으로 어떤 화두를 반복적으로 던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게임은 유저들에게 묻는다. 개인의 도덕적 몰락은 과연 온전히 개인의 책임인가? 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할 때, 건네져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하 스포일러 주의]
이런 주제 의식은 게임 초반부의 ‘해고’ 스토리에서부터 이미 명확히 드러난다. 이 구간에서 플레이어는 블론드 블레이저의 지시에 따라 최저 성과를 기록한 ‘소나’와 ‘쿠페’ 중 하나를 팀에서 내보내는 어려운 선택을 내리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게임 디자인적 장치로 보이기 쉽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보기보다 깊다.
▶ 게임의 상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해고 스토리
‘해고’는 거의 무조건 유저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해당 분기를 기점으로 Z팀은 점차 제대로 된 히어로 집단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올곧은 로버트의 지휘 아래 Z팀이 바른 삶의 기쁨을 빠르게 깨달아 나가는 동안, 해고된 캐릭터는 슈라우드의 간부가 되어 최종장에서는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재등장한다.
이 구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소나’와 ‘쿠페’의 본질적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을 유저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2회차 플레이로 양쪽 선택지를 모두 확인해보면 더욱 명확해지는 사실이다). 해고 시점에 ‘소나’와 ‘쿠페’의 성과 점수는 완전히 동일하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도덕적 결함이나 반사회적 행동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플레이어의 선택’이라는 불가항력적이고 절대적인 외력, 즉 ‘운’에 의해 양극단으로 갈리고 만다.
이처럼 게임은 우리에게 ‘어떤 이들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본 작품의 장르가 히어로물이어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드러난다. <디스패치>에서 히어로/빌런의 ‘능력’은 개인의 선천적 조건과 환경에 대한 은유다. 메인 히로인 중 하나이자 투명화 능력을 지닌 Z팀 멤버 인비저갤의 대사에서도 이런 비유가 드러난다. “나는 망할 빌런 능력을 타고났어.”

이에 대비하여 로버트는 타고난 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일반인을 대변하는 듯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늘 집을 비우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로버트는 그러나 비뚤어지지 않았고, 아무 능력 없는 일반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훈련으로 극복해 결국 히어로로 거듭난다. ‘빌런 팔자’를 한탄하는 인비저갤에게도 로버트는 “그 논리라면 아무 능력 없는 나는 회계사여야 했다”며 운명론을 부정한다.
다만 이 대화에서 로버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한다. 그가 히어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슈트’라는 아버지의 유산이 막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로버트의 슈트는 일반적 가정에서 대물림되는 경제, 사회적 유산을 은유하고 있다. 결국 로버트 역시 게임 후반부 ‘체이스’와의 대화에서 이 점을 스스로 지적한다 “나도 너나 아빠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어?”
이렇듯 우리 대다수가 그저 우연과 행운의 중첩이라는 것을 알기에, 로버트는 오히려 개인의 모든 가능태에 희망을 걸 줄 안다. 게임의 굿 엔딩은 로버트(유저)가 인비저갤의 과거 악행을 용서하고, 그를 끝까지 지지했을 때 도달할 수 있다.
▶ 울보였던 로버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난다.
# 힘의 숭배
로버트가 인간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 지지, 그리고 선해지려는 노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그의 반대 항인 슈라우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철저히 ‘힘의 논리’를 추종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디스패치>의 주제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슈라우드가 인간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은 오로지 상대가 지닌 힘의 크기뿐이다. 설정상 혁혁한 공로를 세워온 전직 슈퍼히어로 체이스에 대해서도 ‘이제는 약할 뿐’이라며 경멸을 드러내는 슈라우드의 태도는 그러한 관점을 잘 드러낸다.
반대로, 최강의 히어로로 꼽히는 블론드 블레이저에 대해서 슈라우드는 어색할 정도의 열렬한 존경을 표한다. 그가 게임 내내 온 도시를 헤집어가며 확보하려는 것 역시 강력한 ‘동력원’인 아스트로 펄스라는 사실 또한 그의 ‘힘(우월성) 숭배’를 은유한다.
▶ 왜 이러나 싶을 정도
모든 것을 우열관계로 파악하는 슈라우드는 언제나 자신이 상대보다 ‘한 수 위’의 존재이며, 그래서 상대를 모두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예측은 우열의 궁극적 확인이다. 그가 볼 때 예측은 언제나 우월함에서 열등함으로의 단방향으로만 작동할 수 있다(블론드 블레이저와의 대면에서 그는 구태여 자신의 계산이 그녀의 계산보다 정확하다고 짚은 뒤에야 자리를 뜬다).
그런 슈라우드에게 인간은 그 가능성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한정적 존재다. 슈라우드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인간의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모두 선천적 조건과 환경의 극복을 처음부터 포기한 채, ‘예측할 수 있는’ 단편적 양태 그대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굿 엔딩 한정) 이야기의 끝에서 슈라우드는 결국 그의 ‘예측’을 깨고 로버트의 총알을 대신 맞은 인비저갤의 희생 때문에 쓰러진다. 슈라우드의 말을 빌리면 본성을 뛰어넘은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과거를 잣대로 그녀의 미래까지 한정 지어버리지 않은 로버트의 열린 태도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로버트의 신뢰와 지지 속에서, 인비저갤은 원래라면 할 수 없었을 일을 해낸다.

# 시즌 2, 언제?
<디스패치>는 슈퍼히어로 포맷을 이용,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휴머니즘 드라마다. 매력 넘치는 캐릭터와 흥미로운 사건들을 전면에 내세워 유저들을 힘 있게 끌어들이는 한편, 성숙한 대사와 정교한 플롯으로 주제의식을 이야기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전달하는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개발사 ‘애드혹 스튜디오’는 ‘텔테일’ 출신 베테랑 일부가 뭉쳐 만든 신생 기업이다. ‘텔테일’ 게임들이 ‘선택의 허상’을 제시했을 뿐 실제로는 선형적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기존 비판을 인식한 듯, 이번 작품에서는 전체 러닝타임을 제한하고 그 대신 유의미한 분기를 제공해 리플레이 가치를 높인 점이 인상적이다.
스트리머들을 성우로 대거 기용하는 모험적 선택은 출시 전 우려를 낳았던 지점이다. 하지만 다행히 섬세한 디렉팅을 통해 이들의 경험 부족을 채워넣은 것으로 보인다. 탁월한 선곡 감각 역시 귀를 즐겁게 만드는 요소다.
▶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단점이 별로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구태여 문제를 꼽아본다면, 이야기의 호흡을 더 늘려도 좋았을 것 같다는 인상을 곳곳에서 받을 수 있다. 특히 체이스가 중태에 빠진 뒤 모든 멤버가 크게 좌절하고 분노하는 전개는, 체이스와 다른 멤버들의 유대가 워낙 희박하게 그려졌던 탓에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물론 가장 큰 단점은 이 작품의 시즌 2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뒷이야기와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가득한 작품인 만큼, 다시 돌아와 팬들을 다시금 기쁘게 만들어주길 희망해 본다.
- 매력적인 조연, 더 매력적인 주연
- 세련된 스토리텔링
- 유의미한 게임플레이 메카닉
- 2시즌 언제??
가마괴 (리뷰어)
가마괴는 까마귀의 옛말입니다. 반짝이는 걸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