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필드>가 돌아왔다. 논란의 <배틀필드 5>와 실망의 <배틀필드 2042>를 지나 오랜만에 팬들 앞에 다시 선 <배틀필드 6>의 기세는 훌륭하다. 출시 3일 만에 700만 장 이상 팔렸고, 스팀에서 최대 74만 명이 동시에 플레이했다.
인게임 콘텐츠 해금에 걸리는 시간을 두고 다소 잡음이 나오지만, 일단은 성공을 점쳐볼 만한 수치다. 아직 최종 성적을 가늠하기에는 이르나, 시리즈 팬들의 엄준한 잣대를 일단 통과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팬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지난 두 편의 판매 성적은 EA의 기대 수준을 한참 밑돌았었다.
히어로 슈터의 문법을 도입하면서 실패작으로 남은 직전 작품 <배틀필드 2042>와 달리, <배틀필드 6>는 기름기를 쫙 뺀 채 기본에 치중한 모습이다. 대다수 팬들의 평가 또한 그렇다.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캐릭터도, 멋을 잔뜩 부린(오글거리는) 대사도 없다. 맨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일개 병사들이 정신없이 죽고 죽이는 현대의 수라장 뿐이다.
일신한 것은 분위기만이 아니다. 안일한 시도로 결론 난 128인 매칭이 사라졌고, 불필요한 랜덤성만 초래하는 사이클론 등의 거대 자연현상이나 지나치게 최첨단인 개인 장비(터렛, 로봇개 등)까지 덜어냈다. 결과적으로 실험적 요소가 사라진 ‘뼈대’ 상태의 <배틀필드>가 탄생했다. 제작진은 “팬들이 원하지 않는 건 하지 않겠다”는 말로 이런 기조를 설명한다.
당장의 평가를 볼 때 이건 좋은 접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신경 쓰이는 지점이 하나 있다. 거의 회고주의(懷古主義)에 가까운 자세로 게임을 만들었음에도, ‘예전 그 맛’을 되찾았다는 평가가 정작 거의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도리어 ‘좋은 게임이지만 내가 알던 배틀필드는 아니’라는 의견이 훨씬 흔하다. 기존 팬이라면 쉽게 느낄 수 있는 본질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긍정적 현상일까? IP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 돌아온 혼란
진부한 표현이지만 <배틀필드 6>가 ‘잘 빠진’ 슈터 게임이라는 데는 대다수 유저가 동의하고 있다. 만족감 있는 건플레이, 부드러운 애니메이션, 다양한 무기, 현실적 사운드, 미국 각지를 생생하게 재현한 비주얼 등 대작 FPS가 갖춰야 할 미덕의 상당수를 평균치 이상으로 달성해 놓았다.
그러나 진짜 재미를 판가름하는 것은 개별 요소의 완성도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유기적 덩어리로 통합하는 디자인 방향성이다(그래픽, 사운드, 건플레이를 따로 떼어 놓으면 퀄리티가 훌륭한데도 실패한 슈터가 많다) 그렇다면 <배틀필드 6>를 관통하는 철학은 무엇이며, 이것은 어떻게 <배틀필드 6>를 근래 나온 FPS 가운데 돋보이는 작품으로 만들어 주었을까?
시리즈의 시그니처인 ‘전장의 혼란상’과 여기서 유발되는 특유의 흥분, 몰입을 잘 구현했다는 점을 일차적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무너지는 건물, 추락하는 비행기, 길 잃은 폭발물, 뒤집힌 탱크가 유쾌하게 뒤섞이는 장관은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연출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배틀필드 6>이 전편인 <배틀필드 2042>와 천양지차의 평가를 얻고 있는 상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배틀필드 2042>에도 혼란상은 존재했다. 첨단 가젯과 자연재해를 도입하면서 어떻게 보면 이전 작품들에 비해 그 정도나 규모가 더 컸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배틀필드 2042>의 경험은 사랑받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 원없이 파괴와 혼돈을 즐길 수 있다.
# 밀도 높은 경험
평가를 갈라 놓은 결정적 차이는 아마도 게임플레이의 밀도에서 찾을 수 있다. 맵 상당 부분이 무의미한 개활지와 도로로 채워져 있던 <배틀필드 2042>에서는 즐거운 혼란을 마주치기까지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128인 플레이를 고려해 만들어진 초대형 맵에서는 이 현상이 더욱 심했다.
그랬던 <배틀필드 2042>를 철저히 반면교사 삼으라는 지시가 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배틀필드 6>의 디자인은 거의 정 반대 노선을 따른다. 일단 베타테스트 때부터 많은 유저들이 지적했듯 이번 게임의 맵은 <배틀필드> 치고 좁은 것들이 많다. 주요 거점에서뿐만 아니라 이동 중에도 끊임없이 적을 조우하게 될 만큼 맵이 조밀해, 전편과 달리 도저히 지루할 틈이 없다.
밀도 높은 경험이 이번 작품의 주요 테마라는 사실은 그 외의 여러 게임 설계에서도 드러난다. 우선 병사들의 이동과 애니메이션 모두 이전 작품보다 눈에 띄게 빨라지면서 전투 자체의 템포가 급격해졌다. <에이펙스 레전드>에서 볼 수 있던 수직 상승 장치가 맵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가 하면, 낙하산의 강하 속도 또한 이전에 비하면 내리꽂는 수준이다.
병사의 ‘회전율’도 높아졌다. TTK(사살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가 길어진 데다, 피격당하지 않으면 체력이 자동으로 차는 자동 회복 메커니즘이 전보다 더 빠르게 발동하기 때문에 재정비와 재투입이 쉽다. 이전에 없던 ‘부상자 끌어오기’ 메커니즘까지 더해지면서 병사 부활 확률도 크게 늘어났고, 완전히 죽었다 하더라도 리스폰 대기 시간이 길지 않다.
▶ 맵도 작고, 거점도 작다.
마지막으로 점령 거점의 크기가 과거 작품들에 비해 확 좁혀졌다. 이로 인해 거점 쟁탈전 때마다 피아의 병력이 비좁은 공간에 몰려들면서 가뜩이나 과열되어 있던 전투가 폭발적 양상을 띄게 된다. 이런 고속, 고자극의 전투는 빠르게 보상감을 되먹임하며 중독을 유발한다. 실제로 게임에 일종의 금단현상을 느낀다는 유저들을 웹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친절해진 UI도 한몫한다. 이번 작품에선 적 탄환이 날아온 방향이 UI로 즉각 피드백되며, 미니맵에도 인근 적의 위치가 오랫동안 표시된다. 이런 UI 정보를 빠르게 캐치하면, 킬 점수를 올리기가 편하다. 물론 적도 그만큼 나를 상대하기 쉬워졌지만,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게 사살의 쾌감을 자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리더보드를 열어보면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모든 유저가 킬과 데스 수치를 쌓아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봇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모두가 행복한’ 게임플레이를 구현한 셈이다.
여기에 샌드박스식 전투와 새롭게 등장한 가젯들도 더해지면서 즐거움은 배가한다. 비슷한 템포의 전투를 제공하는 게임은 많지만, <배틀필드> 만큼 제멋대로의 전투를 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 방면의 귀재인 유명 <배틀필드> 유튜버 ‘표림’은 새 장비 슬레지 해머를 근접 암살용 무기로 사용하는 기행을 벌써 업로드했다. 그 외에도 수직적 경로를 빠르게 개척해 주는 사다리나 현대전의 악몽으로 떠오른 드론을 이용한 전략들도 인기가 많다.
▶ 트롤 전문(?) 유튜버 ‘표림’의 새 영상
# ‘선’의 싸움에서 ‘점’의 싸움으로
오랜 <배틀필드> 유저들이 <배틀필드 6>를 플레이하며 익숙한 장난감을 다시 손에 쥔 느낌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빨라진 템포는 조금 어색하지만, 한순간에 십수 명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부수고 터뜨리고 날아가는(능동태가 아니다) 재미는 아무래도 독보적이다.
그런데, 오래 플레이할수록 이전의 <배틀필드> 경험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같은 감상을 느끼는 유저들은 많은데, 그중 상당수가 ‘더 넓은 맵’이 출시되기만 하면 이런 이질감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마침 이번 작품은 전편처럼 ‘시즌제’를 운영하며 신규 맵과 기타 새 콘텐츠가 추가될 예정에 있다.
그런데 과연 맵의 크기를 늘리는 것만으로 ‘<배틀필드> 경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 현재의 전투 방향성을 유지한 채 맵 사이즈만을 키운다면 달성되기 어려운 희망이리라 조심스레 전망해 본다.
<배틀필드> 시리즈가 제공해 온 즐거움에는 크게 두 가지 층위가 있다. 그중 하나가 앞서 설명한 ‘전장의 혼란’이라면, 다른 하나는 전장 통제권을 두고 벌이는 양 진영의 끊임없는 힘싸움이다. 전자는 가시적이고 명백하지만, 후자는 미시적이고 직관적이지 않아서, 시리즈의 재미를 논할 때 자주 누락된다. 그러나 양념과 고명만으로 음식의 맛을 복제할 수 없듯, 전략성 역시 <배틀필드> 시리즈의 고유한 재미를 재현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기본 재료’다.
<배틀필드>의 전략성은 거점간 상성 개념에서 온다. 과거 <배틀필드> 게임들에서 거점은 그저 ‘승점 공급처’로만 기능하지 않으며, 각자의 역할과 특색을 지녔다. 주변으로의 빠른 접근로를 제공하거나, 적 이동을 견제할 수 있거나, 특정 거점을 엄호하거나 압박하기에 유리하다는 식이다. 이들을 어떤 우선순위로 점령/통제하는지에 따라 전황이 계속 뒤바뀌는 것이 시리즈의 오랜 재미다.
▶ ‘스펙타클’은 <배틀필드> 재미를 구성하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유명한 <배틀필드 1>의 비행선도 단순 볼거리가 아닌, 열세의 팀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기 위해 등장했던 기믹이다.
이런 지형적 유불리와 상성은 거점 ‘끼리’가 아닌 거점 내부에서도 자주 구현되어 있다. 특히 규모가 큰 중요 거점 안에는 ‘틀어막기 어려운 우회로’나, ‘차지하기에 까다롭지만 점령하면 유리해지는 고지’나, ‘힘 싸움이 계속 펼쳐지는 통로’ 등의 특색 뚜렷한 전략적 포인트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이들 요충지를 점령/통제하려면, 당연히 팀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양쪽 병력이 몰려들어 한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일종의 전선이 형성된다. 기존 <배틀필드>가 이러한 팀플레이 중심의 다소 느린 땅따먹기 싸움을 의도했다는 걸 보여주는 디자인적 요소는 많다. 상호 의존성이 높은 병과 밸런스, 분대지원형 화기, 연막, 분대 보너스 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시리즈의 시그니처인 전장의 현장감 역시 사실은 이런 전투 디자인에서 온다. 전세 역전, 전선 돌파, 기습 성공, 기적적 방어 등의 다양한 전쟁 시나리오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기 위해선, ‘전황’이라는 빌드업이 먼저 확고히 전제되어야 하며 ‘전황’이 형성되려면 전선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
병과 전용 장비, 탈것 등 다채로운 전투 메카닉 역시 팽팽한 전황을 혈혈단신으로(혹은 분대원들과 함께) 뒤흔드는 전쟁 영웅의 감각을 선사해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가령 숙련된 탱크 유저는 주요 길목을 수십분간 틀어막아 원래라면 불리했을 전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리고 C4나 RPG-7 장인은 이런 탱크를 고물로 만들어 아군들에게 활로를 열어줄 수 있는 식이다.
한편 <배틀필드 6>의 주요 거점들은 특정한 방향성 없이 거의 모든 방향으로 접근로가 존재하는 스펀지 같은 구조이거나 아예 개방 지형이며, 맵이 전반적으로 좁아아 좀처럼 ‘전선’이 형성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유저들은 전방이나 측방의 개념이 거의 없이, 항상 적과 사방팔방 뒤엉킨 채 싸우게 된다. ‘선’의 싸움에서 ‘점’의 싸움으로 변모한 셈이다.
▶ 특정 지형을 ‘끼고’ 전선을 형성하는 플레이는 이번 게임에서 어렵다. 유저들은 거의 항상 뒤섞여 싸우게 된다.
# 느껴지는 ‘그 게임’의 향기
잘 알려져있듯 이번 <배틀필드 6> 개발을 진두지휘한 것은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만든 인피니티 워드의 공동 창립자 빈스 잠펠라다. 그래서일까, 전황보다는 개인 전투력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번 게임의 디자인에서도 어쩔 수 없는 <콜 오브 듀티>의 향취가 묻어나는 듯하다.
<배틀필드 6>의 거점은 앞서 말했듯 사방으로 개통되어있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상호 간 역학관계가 희박하다는 점에서도 기존의 <배틀필드> 시리즈와 구분된다. 특정 거점을 차지했다는 이유로 인접한 지형에서 유리함을 가져가는 건 흡사 ‘반칙’이라는 듯, <배틀필드 6>의 거점들은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게끔 독립성을 띈다.
특색 있는 지형이 많지 않고, 맵의 전 구간이 비슷하게 오밀조밀 구현되어 있다는 점 역시 이런 기조와 상통한다. 이동 중에도 잦은 근접전이 벌어지며, 거점에 일단 진입한 후에도 다른 거점의 점령 상황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채, 많은 경우 적들과 ‘피지컬 싸움’을 통해 쟁탈을 결정짓게 된다.
일종의 ‘아케이드 슈터’(arcade shooter)인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감성이 겹쳐 보이는 지점이다. 끊임없고 즉각적인 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아케이드 슈터 장르에서는 전략적 큰 그림보다는 유저 각자의 직관적 전투력이 가장 중요한 승패 결정 요인이다. 사방을 뚫어놓고 엄폐물을 흩뿌려놓은 맵은 이러한 유저 간 즉발적 ‘겨루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 골목, 계단, 건물 등이 촘촘하게 배치된 지형이 많다. 교전은 많은 경우 근거리에서 이뤄진다.
아케이드 슈터의 직관적 전투는 그 짜릿함과 만족감 측면에서 장점이 크다(‘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장수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여기에 <배틀필드> 만의 현장감과 스케일, 창의성을 적당히 버무린 <배틀필드 6>가 현재 폭넓게 사랑받고 있는 현상도 당연히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배틀필드> 시리즈만의 재미가 앞으로 온전하게 복원될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오랜 <배틀필드> 유저들조차 ‘이전과는 다르다’면서도 현재의 <배틀필드 6>를 당장 즐겁게 플레이하고 있다. 개발진이 구태여 나서서 게임을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며 수정해나갈 동기는 크지 않아 보인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 <배틀필드> IP는 그 명맥이 끊기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시리즈 팬으로서는 섭섭할 수 있는 지점이다.
다만, 일부 시리즈 팬들이 계속해서 이질감과 불만족을 호소할 가능성은 있다. 이미 여러 팬이 은연중 느끼고 있듯, <배틀필드 6>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구성해 온 두 가지 필러(pillar) 중 더 직관적인 부분에 더 치중하면서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만이 충분히 커진다면, 개발진 또한 자신들이 ‘빠뜨린 재료’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고민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물론 이미 상당량의 판매고를 올린 만큼 개의치 않은 채 지금의 노선을 유지할 수도 있다. 과연 <배틀필드 6>의 앞날, 더 나아가 <배틀필드> IP의 앞날은 어느 방향을 향하게 될까? 그 귀추를 주목할 만하다.
- 익숙하고 반가운 난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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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괴 (리뷰어)
가마괴는 까마귀의 옛말입니다. 반짝이는 걸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