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날들이 더러 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 가서 그런가) 요즘은 현실에서도 숲이나 바다가 전보다 더 좋다. 그래서 게임도 <저니>나 <압주>처럼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잔잔하게 즐기는 작품들을, 예전부터 높이 평가해오던 편이다.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을 넘어서, 지루하지 않게 재미를 주는 것도 대단한 역량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스컴에서 직접 <키퍼>의 개발팀 더블 파인 프로덕션을 만났을 때부터, 이 작품을 오래 기다려왔다.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오르는 걸어다니는 등대와 외로운 새 한 마리가, 신비로운 세상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되는 ‘콘셉트’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출시 전 Xbox 측에서 제공 받은 리뷰 코드로 직접 만나본 플레이도 그 기대에 충분히 부합하는 경험이었다.
다만, 단서가 하나 붙는다. 후반부 플레이에서 초반부의 경험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진 마시라. <키퍼>의 사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보게 된다. 속칭 ‘뇌절’이라 부르는 과한 욕심이 변주의 측면에선 도움이 되는 때도 있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때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이 게임을 추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 플레이에 대한 호불호는 순전히 취향의 차이일 가능성도 높다.(누군간 좋아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Xbox 게임 패스 데이원 플레이로도 즐기실 수 있으니, 이 아름다운 세계로 발을 담가보시라. 이 세계가 아름답고 처연하다는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하 신작 <키퍼>의 스포일러 없는 리뷰다.
# 부서지고 왜곡된 세계, 그 안에 사는 아름다운 존재들
인간이 사라진 섬. 오래된 등대가 침묵 속에 잠들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로 의식을 갖고 깨어나게 된다. 다른 수많은 등대들처럼 바닥에 부서지게 된 ‘주인공’ 등대(작중에 이름이 안 나온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곤충 같은 다리를 뻗어 일어서고, 섬 중심에서 뻗어나오는 강렬하고 위험한 에너지에 이끌려 산 꼭대기로 향하게 된다.
바다를 지키던 등대가 등산을 하게 된다는 설정도 참 독특하지만, 이 여정에서 정말 다양한 존재들을 만난다. 어째선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활기찬 바닷새 ‘트위그’와 함께, 이 섬에서 긴 시간 살아왔던 걸어다니는 돌처럼 보이는 생물들, 과거 존재했던 문명의 흔적들, 지금도 그 안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지키는 존재들을 만난다.
<키퍼>는 일부 조작 체계에 대한 친절한 안내들 외엔, ‘대사’와 같은 언어적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다. 이 기묘한 세계를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게임은 걸어다니는 등대로 빛을 비추며 각종 환경 및 생명체들과 상호작용하고, 트위그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옮기거나 조작하는 방식으로, 난관을 헤쳐가며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험난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의 탑과 눈처럼 산 꼭대기엔 거대한 ‘무언가’가 있고, 산과 바다는 유해한 존재로 보이는 각종 균과 벌레들로 잠식되기도 했다. 이 길을 터주는 것도 등대의 불빛과 트위그의 재치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때로는 징그럽고 기괴한 세계에 대한 묘사를 보는 것만 해도 큰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 단순함에서 복잠함으로, 퍼즐의 아이디어도 돋보였다
<키퍼>는 등대의 불빛으로 특정 대상을 쫓아내거나 파괴하는 방식 외에도 꽤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떤 원주민(생명체)들은 근처의 식물이 활성화되거나 특정 방향에 빛을 비춰주면 그 쪽으로 스스로 이동하는데, 그렇게 이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어떤 장소에 도달하게 해주거나, 이들을 부서지는 바닥 위에서 뛰게 만들어 바닥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기 위해 중반부까지의 변주를 일부만 소개하면, 솜털 같은 홑씨들을 등대 본인이나 환경에 잔뜩 묻혀 더 가볍게 뛰어오르거나 떠오르고 가라앉게 할 수도 있고, 해와 달 모양의 거울에 빛을 비춰서 시간을 조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시간을 되돌리는 기믹에선 함께 다니는 새 ‘트위그’가 알이나 유령의 상태로도 변하기도 한다.(당연히 이를 활용하는 퍼즐도 등장한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중반부까지의 퍼즐은 참신한 아이디어들 안에서도 너무 어렵지 않은 난도를 선보여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기자 같은 퍼즐게임 마니아도, 이 장르에 처음 발을 들일 사람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선을 잘 탔다고 느껴졌다.
문제는 후반부다. 걷지 못하던 등대가 걷는 과정이 초반부터 나왔고, 더 기이한 존재들도 더러 등장하니, 어떤 전개가 등장해도 이상할 건 없다곤 하지만, 그 변주가 1절, 2절, 3절을 넘어 뇌절을 향해가는 순간이 온다. 총 다섯 시간의 플레이 중 마지막 한 시간은 (엔딩 장면의 아름다움만 제외하면) “이렇게까지 간다고?” 싶어서 헛웃음과 한숨만 나왔다.
▲ 너무 아름다운 게임이라 그 아쉬움도 더 크다
# 분명 중반부까진 잘 만든 게임이었는데…
스포일러 없이 모호하게 설명하는 것보단,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끔 개발자의 말을 전해드리는 편이 빠를 것으로 보인다.
더블 파인 프로덕션에서 <키퍼>의 크리에이티브 리드를 맡은 ‘리 페티’(Lee Petty)는 팬데믹 기간 동안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다가, 앞으로 만약 인간이 사라진다면 야생동물만 남게 되는 걸까, 그들이 계속 진화하고 발전해나갈 수 있을까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균류’와 ‘균사체’들을 통해 나무가 영양분을 나누고 소통하는 방식 등에도 주목했다. 생명체들이 연결되고자하는 욕구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제작 과정에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다.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다크 크리스탈>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처럼 기묘한 세계와 독특한 생명체들이 있는 작품을 좋아해, 몽환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 '리 페티' 크리에이티브 리드의 경력과 '초현실주의'에 대한 애정을 알고 플레이한다면 <키퍼>의 전개가 그렇게 튀어나가는 걸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키퍼>라는 게임 자체는 백지 상태에서 플레이해야 더 잘 즐길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개발팀의 소개에 등장한 저 콘셉트가, 처음엔 세계의 웅장함과 다채로운 색감, 흥미로운 생물군 정도로만 등장하지만, 후반부엔 정말 말 그대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나온다. 이 '사이키델릭'한 연출이 과해지는 순간부터 게임이 앞서 달려온 선로에서 크게 벗어나기 시작한다.
크리에이티브 리드가 언급한 '균류'와 '신경망' 같은 소재를 활용하는 연출이 다소 징그러웠던 적대적 존재들과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긴장감 있어도 아름답던 세계가, 통상적인 시선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비주얼로 뒤바뀌게 된다.
이 구간에서 플레이 패턴도 양상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속도감도 바뀌고, 플레이 로직도 바뀐다. 그러면서 느린 템포에서는 참고 넘어갈 만 했던 조작감과 시야가 바로 발목을 잡는다. 언어적 설명이 없는 게임이기에 경험이 주는 주제의식 전달이 전부인데, 특정 구간에선 더 이상 등대가 가진 등대의 정체성도 희미해지고, 목적성도 흐릿해져 '파괴와 탐색의 자극'만 남은 느낌이 든다. 색감의 사용도 과해지면서 처음의 고급진 느낌도 사라질 때가 많았다.

누군가는 이 변주에서의 도약과 도전을 과감하다 평가하겠지만, 개인적으론 그 앞에서 쌓아온 경험의 연장선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데 실패한 결과물로 보였다. 길을 잃었다가 최후반부 엔딩에 가서야 다시 고삐를 잡은 느낌이랄까.
첫인상처럼 종합적으론 분명 아름다운 세계였다. 하지만 ‘사이키델릭’을 장르 태그에 내건 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으로 몰아가거나, 게임의 톤 앤 매너를 갑자기 뒤바꿔도 모두가 만족하게 할 방패가 돼주진 않는다.
이 몽환적이고 복잡한 세계 안에서도 중반부까지 길을 잃지 않게 만들고, 높은 완성도로 버그도 없게 만든 점은 높게 사고 싶다. 처음에 게임이 보여주고자 했던 콘셉트와 정서도 개인적으론 매우 취향 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 더블 파인 프로덕션 또한 이번 경험을 토대로 다음 작품에서는 핸들을 부드럽게 꺾고, 선을 지키는 것의 미덕을 유념하지 않을까 싶다.
- 등대와 트위그를 비롯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정서
- (뇌절하기 전까지) 적절했던 긴장감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모호함
- 플레이어 입장을 많이 고려한 조작 안내와 동선(이 또한 후반부는 제외)
- 그런 것치곤 엔딩은 다시 방향을 잘 잡았다
- 사람에 따라 조금 답답하다 느낄 수 있는 조작감과 고정 시점
- 사전 정보가 없어야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구성인데, 개발 의도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너무 당황스러울 전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