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나 숏폼 플랫폼에서 ASMR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그 시장에도 세부 장르가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던 것은, 광이 날 때까지 동전을 닦거나, 오래되고 녹슨 물건을 가져다 새것처럼 깨끗하게 복원하는 종류의 영상들이었다. 넋 놓고 보고 있다 보면 잠시 현실의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기도 했고, 뭔가 나 자신까지 정돈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기도 했다.
게임 시장에서도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를 비롯해 소위 청소 게임으로 불리는 장르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크래프톤 산하 5민랩에서 아주 적은 인원이 모여 만든 <언더스티드: 과거에서 온 편지>의 게임 페이지를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트렌드의 덕을 보려한 게임 중 하나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정식 출시된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고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됐다.
많은 ASMR 스타일의 게임들이 ‘어떻게’ 잔잔한 쾌감을 줄 것인지에 집중하는 데 그치는 반면, <언더스티드>는 “세상엔 낡고 오래된 물건이 정말 많은데 왜 하필 그 물건을 닦고 고쳐야 하는지” 그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굳이 품을 들여서 닦는 데엔, 그 물건에 얽힌 소중한 기억과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대답이다. 물건 닦기 이상으로 내러티브에 공을 들인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오랜만에 정말 따뜻한 감성의 게임을 만나 참 좋았다. 혹시 학교,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계신가. 진학, 취업, 이직 등의 이유로 고민을 하고 계신가. 그런 분들에게 이 게임이 좋은 휴식처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오래된 물건 그 안에 담긴 소중하고도 아픈 이야기
물건의 먼지를 털어내고 녹을 제거하는 테마의 작품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물건에 얽힌 가족의 사연을 따라가는 내러티브 게임에 가깝다는 인상을 더 크게 받을 것이다. 그런 만큼 스토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타이틀이기에 스포일러가 없는 선에서 소개하려 한다.
게임은 딸 ‘아도라’가 엄마와 아빠와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다. 이모의 편지를 받고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다락방의 문을 열기 위해 녹슨 열쇠를 닦는 것을 시작으로, 그 다락방 안에서 다시 만나는 많은 물건들이 이 가족이 겪어온 소중하고도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기자 본인처럼 게임을 누가 만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크레딧을 꼭 먼저 보고 플레이하는 괴상한 패턴을 가진 분이 계신다면, 엔딩 테마 보컬 곡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게임에 진입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실제로 이 게임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작중에서 ‘아도라’의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했다는 언급이 꾸준히 되고 있기도 하고, 주인공 ‘아도라’ 또한 작곡가를 꿈꾸며 장비를 사거나,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 첫 자작곡을 녹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아버지는 아도라의 곁에 없고, 아도라의 어머니는 어째선지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겠다는 아도라를 응원하기보단 크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아도라'와 부모님 사이의 이야기를 물건의 역사를 따라가며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아도라는 음악을 업으로 삼길 원하지만

▲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갈등의 길로 이야기는 이어지게 된다.
어머니가 과거 꿈 꿨던 직업, 아도라가 아버지의 공백을 따라가며 그리는 미래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한 곳에서 만나기도 하면서 가족의 갈등은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해 간다. 구도도 관계도 다르지만 영화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이 하는 고민과 흡사한 면들도 느껴져 신선했다.
<언더스티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4개의 챕터, 약 2시간 내지는 3시간 안팎의 플레이타임 안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지부진한 곁가지 없이, 아도라와 어머니, 아버지 세 사람이 지나온 길과 교차점을 ‘물건’의 복구 과정과 함께 속도감 있게 전달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에도 참 좋았다. 이들이 겪는 갈등이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의 극적인 버전이라는 점도 공감대를 사기에 좋았다고 본다.

▲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물건을 닦으며 다시 알아가게 된다. 상상력을 조금 더 보태자면, 마치 램프의 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이 물건을 닦는 행위가 모든 갈등이 사라지게 해달라는 소망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 시뮬레이션 게임으로서의 재미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스토리에서의 감성도 그렇지만, 물건의 먼지를 털어내고, 녹을 없애고, 광을 내는 과정도 잔잔한 ASMR 힐링 쪽에 가깝다. 수세미로 문지르고, 칫솔로 닦고, 손수건으로 광을 내고, 중후반부에는 에어 브러시나 소형 스팀 청소기 같은 도구도 활용하게 된다.
99%만 달성해도 다음 물건의 이야기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남은 1%가 아까워서라도 저절로 100% 복구를 목표로 하게 되는데, 처음엔 쉬울 수 있어도 뒤로 갈수록 그 난도가 꽤나 올라간다. 가령 축음기나 카세트 레코더, 카메라처럼 열고 닫거나 조작할 수 있는 물건들은, 기기를 열어 안쪽의 구석구석도 닦아줘야 하고, 누를 수 있는 버튼 사이 틈새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식이다.

▲ 악기의 구멍을 닦으면 소리가 난다거나 하는 소소한 요소들도 좋았다.
▲ 스팀 청소기로 인형을 깨끗하게 하기도 하고
▲ 구조가 복잡한 물건들도 등장한다.
천천히 소소한 재미를 즐긴다고 생각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마련된 조작법의 수에 비해 이에 대한 안내가 조금만 더 친절하거나 직관적이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했다.
예를 들어, TAP 키로 힌트 모드에 진입할 수 있는데, 이 설명은 첫 소개 이후 인터페이스나 키 바인딩 설정에도 등장하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다. 휠을 누른 채 옮겨 평행이동하는 조작도 후반에나 적극적으로 쓰여 나중에 찾게 되는데, 키 바인딩까지 꼼꼼히 찾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 쉬운 조작은 아니었다. 키보드 숫자 키로 도구를 빠르게 바꾸는 것이나 청소 도구를 잡는 방향을 꺾는 조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런 소소한 아쉬움 외엔 아트, 사운드, 내러티브, 플레이의 흐름 등 여러 측면에서 참 좋은 인상을 많이 남긴 게임이었다. 특히 자신들이 전달하려 한 스토리와 관련된 핵심 소재인 노래, 글, 가족이라는 테마 등을 물건 복구라는 과정 사이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 서사에 어울리게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노래나 연출도 좋았다.
# 알고 나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게임 안팎의 이야기
<언더스티드>를 만든 개발팀은 크래프톤 산하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5민랩이다. 크래프톤 이름만 보면 대기업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5민랩은 그 중에서도 매우 작은 몸집으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는 독특한 조직이다. 일반 유저들에겐 <스매시 레전드>, <킬 더 크로우즈> 등의 게임으로 익숙하시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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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알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5민랩 ‘킬 더 크로우즈’ (바로가기)
▲ <킬 더 크로우즈>
▲ <스매시 레전드>
여러 파트의 협업 인원들이 있지만, 게임을 개발한 핵심 팀원 3명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최윤정 PD는 6개월로 예상했던 프로젝트가 1년 10개월이 걸려 세상에 나오게 된 기쁨을 전하기도 했고, 임경우 디자이너는 BIC에서 데모로 받은 피드백들처럼 본편도 흥미로운 경험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민영 프로그래머는 10대의 끝과 20대의 처음을 함께 한 게임이라 의미가 크다고 언급했다.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초기에 <언더스티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SF물로 진행될 계획이었다. 인류가 모두 사라진 지구에서 새롭게 탄생한 생명체들이 각각의 이유와 목적으로 인류의 물건을 청소하고 수집하게 된다는 (어찌 보면 지금보다 더 참신하다면 참신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최윤정 PD는 여기에서 가장 핵심에 있던 정서인 “물건은 개인의 서사와 소중한 기억을 담고 있다”는 점에 더 집중해, 지금처럼 ‘아도라’와 그 가족, 그리고 각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쪽으로 게임의 방향을 다시 결정하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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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 게임 ‘언더스티드’, 원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 (바로가기)
▲ <언더스티드>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으로 개발되던 시절의 이미지들
▲ 초기 프로토타입에서의 칫솔 사용 방식 (사진 출처: 스팀 페이지 개발일지)
국산 게임인 <언더스티드>의 퍼블리셔가, 우리에게 <커피 토크>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토게 프로덕션인 것도 눈에 띈다.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게임 개발사 겸 유통사로, <웬 더 패스트 워즈 어라운드>, <묶이지 않은 자들을 위한 우주>처럼 내러티브 어드벤처 게임 유통에서도 큰 강세를 보이고 있는 곳이다. 관통하는 감성의 결이 <언더스티드>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취향에 따라선 다소 단순한 로직에 짧은 플레이타임을 가진 이 게임이 평범하게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론 수준 높은 내러티브 구성과 작은 요소들에도 공을 많이 들인 <언더스티드>와 같은 게임이 국내에서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만약 당신이 게임에선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유저거나, 현실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힐링 게임을 찾아 헤매는 게이머라면 <언더스티드: 과거에서 온 편지>를 꼭 한 번 플레이해보길 추천한다.
-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갈등과 메시지
- 아트, 사운드 등 여러 요소에 공을 많이 들인 게 보인다
- 가볍게 다룰 수도 있는 플레이 로직을, 가볍지 않은 이야기와 엮은 시도가 참신하다
- 엔딩 이후 숨겨진 스테이지가 찍어주는 진짜 마침표
- 가격이 아주 조금만 더 낮았다면 어땠을까(볼륨은 지금도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