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PG에 로그라이크를 더한 게임.”
오션드라이브 스튜디오의 신작 <로스트 아이돌론스: 베일 오브 더 위치>(이하 베일 오브 더 위치)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문장이다. 치밀한 전략의 ‘차가운’ SRPG와 예측 불가능한 변수의 ‘뜨거운’ 로그라이크.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이 조합은 수많은 게이머의 기대를 받으며 약 1년간의 얼리 엑세스를 마치고 오는 9일 정식 출시된다.
지난 얼리 엑세스 체험기에서 기자는 이 게임을 ‘맛있지만 잔가시가 남는 음식’에 비유한 바 있다. 탄탄한 SRPG의 기본기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두 장르의 이질적인 결합이 낳은 문제점들이 재미를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정식 출시를 앞두고 다시 마주한 <베일 오브 더 위치>. 과연 개발사는 1년의 시간 동안 그 잔가시를 모두 발라냈을까?

# SRPG+로그라이크, 참신해보이는 두 장르의 만남
앞서 말했듯 <베일 오브 더 위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SRPG에 로그라이크를 더한 게임”이다. 독특한 매력으로 견고한 팬층을 지닌 SRPG와 게임에 끊임없는 신선함을 불어넣는 로그라이크. 이 두 장르의 만남이라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게이머의 구미를 당기게 할 것이다.
기자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오션드라이브 스튜디오 김희재 대표의 전작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으로 SRPG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도 SRPG라면 일단 도전하고 보는 ‘SRPG 사랑단’이자, 틈틈이 로그라이크 게임을 즐기는 로그라이크 애호가로서 이 조합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 조합이 그저 참신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참신함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불어 주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왜 시도하지 않았고 주류가 되지 못했는지는 명확하다. 물과 기름을 섞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 SRPG의 전투에 로그라이크의 무작위성에 기반한 성장 시스템을 더한 게임. 어떤가, 흥미가 동하는가?
# 뜨거운 로그라이크, 차가운 SRPG
로그라이크와 SRPG는 서로 상극이다. 이 둘의 차이를 ‘온도’에 빗대어 설명해 보겠다.
로그라이크는 뜨겁다. 열에너지를 받은 분자들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우리가 흔히 로그라이크(혹은 로그라이트)라 부르는 게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영구적 죽음, 절차적 생성, 그리고 반복 플레이를 전제하는 구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로그라이크는 긴장감이 높다. 매 플레이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게임은 의도적으로 호흡을 짧게 가져간다. 한 판의 길이는 줄이고, 빠른 템포와 역동적인 게임 플레이로 플레이어가 부담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당신의 라이브러리에 있는 수많은 로그라이크 게임들을 떠올려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 대표적인 로그라이트 게임인 <아이작의 번제>.
반면 SRPG는 어떤가? 로그라이크에 비하면 호흡이 굉장히 길고 정적이다. 마치 체스나 장기를 두듯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되돌리기’나 ‘불러오기’를 통해 최적의 수를 찾아야 한다. 앞서 로그라이크를 뜨겁다고 표현했으니, 그 반대인 SRPG는 차갑다는 말이 어울린다.
SRPG에서 우리는 예측 가능한 결과를 기대한다. 적중률 95%인 공격이 5%의 확률을 뚫고 빗나가지 않기를, 상대의 행동이 예상 범위 안에서 이뤄지기를 바란다. 심지어 캐릭터의 성장마저 치밀하게 계산된 대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SRPG다. 돌발 변수가 발생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재앙처럼 여겨진다.
자, 다시 한번 게임의 소개문을 떠올려보자. “SRPG에 로그라이크를 더한 게임.” 이처럼 서로 상극인 두 장르가 만났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주문을 받은 바리스타는 어떤 음료를 만들어 제공할 수 있을까?
▶ 수많은 유저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SRPG <X-COM 2>의 '감나빗!'
# 전투는 재밌지만, 성장의 즐거움을 앗아간 '무작위성’
로그라이크와 SRPG. 단독으로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장르이지만, 둘이 섞이면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무언가가 된다. 이 ‘미적지근함’은 특히 캐릭터의 성장 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SRPG로서 <베일 오브 더 위치>의 기본적인 완성도는 훌륭하다. ZOC 기반 전투와 상성 시스템 같은 문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두 가지 무기를 교체하며 싸우는 시스템으로 전략의 깊이를 더했다. 3D 탑다운 뷰 시점의 카메라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전장을 확인하는 편의성도 돋보였다. 솔직히 전투를 하는 재미는 충분하다.
문제는 캐릭터의 성장 경험이다. SRPG에서 우리는 전투는 과정이고 결과는 캐릭터를 육성하고, 그 성과가 플레이를 통해 확실히 체감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과정은 즐거우나 결과는 아쉽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성장으로 얻는 스탯의 수치가 너무 낮다. 스탯 상승치는 카드 등급에 따라 다른데, 흔히 얻는 일반 등급 카드는 고작 3%의 상승률을 보인다. 정말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전설 등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9%라는 체감 가능한 수치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상승하는 스탯의 종류마저 무작위다. 마법사 캐릭터인 ‘로랑’을 성장시킨다고 상상해보자. 당연히 마법 공격력이나 치명타 확률 같은 스탯을 원하겠지만, 엉뚱한 스탯이 나온다면 골드를 소모해 결과를 다시 ‘뽑아야’ 한다. 필요한 스탯이 나오지 않는 한, 레벨업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쉽다.
▶ 분명 밀리 딜러로 키우고 있었는데, 자꾸 방어 관련 스탯만 성장 보상으로 나온다…
그나마 공명석을 활용한 장비 성장은 확실한 피드백을 준다. 높은 등급에서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고, 신화 등급에서는 새로운 스킬까지 해금되니 체감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장은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 결과값에 랜덤성에 추가한 방식의 게임은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비중을 얼마나 할지 여부가 중요하다.
결국 확률에 의존하는 성장 구조 탓에, 원하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육성한다기보다 확률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에 맞춰 아등바등 캐릭터를 성장시킨다는 인상이 강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다양한 선택지에 소위 최소한 꽝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꽝이라는 요소를 결정하는 건 결국 유저의 선택이다. 딜러가 탱커에 가까운 모습으로 성장 한다고 해서 이를 성장으로 볼지, 아니면 꿩대신 닭으로 볼지는...
▶ 장비 성장에 필요한 공명석의 효과 역시 무작위다. 이미지 같은 행복한 고민의 순간은 흔치 않다.
▶ 높은 등급으로 장비를 성장시키면 새로운 스킬이 해금된다. 덕분에 장비 성장은 비교적 확실하게 체감되는 편.
# 강제되는 도전, 하지만 동력은 부족하다
“’불의 제단’에서 영구적인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지 않나?”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게임에는 ‘룬’을 통한 클래스 성장, ‘불꽃의 잔재’를 소모한 장비 스탯 부여 등 영구적인 성장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영구 성장 요소가 게임 플레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충분히 업그레이드를 진행하면 게임의 난이도도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다만, 영구 성장에 필요한 재화를 얻는 과정이 몹시 고단하다.
게임은 로그라이크의 절차적 생성 방식으로 맵을 생성하며, 플레이어는 원하는 보상을 선택해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명석, 유물 같은 일회성 보상과 함께 영구 성장에 필요한 재화나 동료를 얻을 수 있는 이벤트가 무작위로 등장한다.
▶ 플레이어가 선택한 보상에 따라 달라지는 모험의 경로
문제는 게임 클리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공명석과 유물이라는 점이다. 이 일회성 아이템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기에, 한정된 보상 기회 속에서 영구 성장 재화를 선택하는 것은 곧 해당 판의 난이도를 높이는 행위가 된다. 즉, ‘이번 판을 쉽게 깨는 것’과 ‘다음 판을 위해 강해지는 것’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아쉬웠던 부분은 전투 스테이지의 구성과 등장하는 적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다. 매번 같은 전략으로 같은 적과의 전투를 반복하다 보면 게임은 금세 단조롭게 느껴진다. 게임은 끊임없이 도전을 요구하지만, 그 도전을 감수할 만큼의 동기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이 구조의 스테이지를 몇 번이나 마주했는지 모르겠다.
# 끝내 빠지지 않은 ‘잔가시’
지난 얼리 엑세스 체험기에서 기자는 <베일 오브 더 위치>를 “맛있지만 잔가시가 남는 음식”에 비유했었다. 탄탄한 SRPG의 기본기라는 맛있는 살점 사이로, 불확실한 성장 경험과 분리된 영구 성장 구조라는 잔가시가 느껴진다는 의미였다. 정식 출시 버전에서는 이 가시가 조금 더 연해지길 기대했다.
아쉽게도, 정식 출시 버전에서도 그 잔가시는 여전히 단단하다. 세꼬시라는 회에서 가시가 주는 식감과 고소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잔가시’의 정체는 결국 뜨거운 로그라이크와 차가운 SRPG의 미묘한 만남 그 자체다. SRPG 팬에게는 ‘계획적인 성장’의 재미가 줄었고, 로그라이크 팬에게는 ‘반복 플레이’를 이끌 동기를 주지 못했다. 연한 가시를 통해 고소함함과 식감을 제공하려 했으나 유저에겐 호불호의 느낌을 주는 요소가 된 듯 하다.
단맛에 소금을 살짝 더하면 감칠맛이 폭발하듯, 장르의 융합에는 섬세한 조율이 필요하다. 훌륭하게 만들어진 SRPG라는 요리를 기반으로, 로그라이크를 부담스럽지 않은 양념처럼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베일 오브 더 위치>는 모두가 극찬하는 특별한 요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SRPG 장르에 대한 충실한 완성도
- 로그라이크의 무작위성으로 인한 부족한 성장 체감
- 높은 영구적 성장 의존도, 그에 비해 부족한 플레이 동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