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은 언제나 벅찬 기분이 든다. 기자에게는 '하궤'(하늘의 궤적)이 그러했다. JRPG 팬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 ‘궤적 시리즈’. 하지만 기자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이 세계를 접했다.
유명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 줄거리도, 캐릭터도, 전투 시스템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니혼팔콤이 '영웅전설' 시리즈를 굳건하게 이끌어오고 있고, <계의 궤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20년 전 이야기의 시작점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열린 셈이다. 이 참에 역사적인 JPRG에 대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 점이 오히려 이번 리메이크의 매력을 더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하늘의 궤적 the 1st>는 시리즈 팬을 위한 헌사이자, 새로운 플레이어를 위한 완벽한 입문서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만나는 리벨 왕국의 롤렌트 마을은 한 편의 작은 연극 무대 같았다. 그래픽의 '개선'에 대해서는 얹을 말이 없지만, 롤렌트 마을의 목가적인 풍경은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발진은 이 게임의 월드 디자인에 '장소성'을 주요 가치로 꼽았다고 전해진다.

원조 맛집의 재해석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장소성'에 대해 확 체감할 수 있다. 과거 평면에 위치했던 '하궤'의 세계와 캐릭터들은 풀 3D 그래픽으로 재탄생했다.
마을 중앙의 시계탑이 우뚝 서 있고, 골목마다 NPC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벽돌길, 밤이 되면 켜지는 가로등 불빛, 지나가는 NPC들의 짧은 대화에서도 공간에 생동감을 주기 위한 개발진의 설계가 묻어나는 듯했다.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같은 사람에게서 다른 대사가 나오고, 사건이 해결되면 마을의 분위기가 변모한다.
▲ 픽셀 그래픽에서 풀 3D로 게임을 완전히 바꾸었다
▲ 서사를 비롯한 JRPG의 핵심은 그대로 가져간다.
이제 턴제 전투 게임에서 QTE를 통해 회피나 패링을 하는 디자인은 이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당장 올해의 게임 후보로 강력하게 거론 중인 <33 원정대>는 액션 포인트를 사용해서 사격을 하고, 적의 공격에 여러 입력 방식으로 대응하게 만들어 실시간 전투를 방불케 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팔콤 또한,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게임을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턴제 커맨드 전투를 어떻게 새로이 만들까 하는 고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팔콤의 대답 또한 실시간 전투와의 조합에 있었다. 전작 '궤적' 게임들의 요소를 차용한 것으로, 게임 중 거의 모든 적들과 필드에서 바로 전투에 돌입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 상대 몬스터를 스턴 상태로 만들어버린 뒤에 인카운트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적 몬스터를 몰고 다니다가 한번에 여러 몬스터가 모이면 턴제 전투에 돌입하는 것도 가능했다. 탑뷰 상태가 아니라 3D 공간에서 전투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 보니 (보통 난도 기준) 필드에서 몹을 아예 무시하면서 플레이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커맨드 전투에 돌입하면 전통적인 그것을 만나게 된다. 실시간에서 턴제 전투로의 전환은 어색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유로워 팔콤의 '구력'을 느끼게 된다. 공격 타이밍에 맞추어 일반 공격, 마법, 크래프트 스킬 등을 섞어서 사용할 수 있었고 크리티컬이 터지면 타이밍에 맞추어 풀버스트, 체인, 추격 등의 추가 공격을 먹일 수 있다. 턴제 게임이지만, 플레이어의 실력과 성향에 따라 전투의 흐름을 제어하는 요소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가다왔다. 적이 스킬을 쓸 것이라고 붉게 변할 때, 스턴을 먹인다거나 턴을 앞당겨서 광역 힐을 가할 때 쾌감이 상당했다.
브레이크 게이지를 모아 터뜨리면 강력한 일격으로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고, 두 캐릭터가 함께 사용하는 콤비 공격의 연출도 화려했다. 하이 스피드 모드를 활용해 전투 속도를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잡몹은 빠르게 해치우고, 보스전 때에는 속도를 줄여서 차근차근 전략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자기 리듬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는 플레이 세션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은 상대가 나온다면, 난도를 낮추는 가장 쉬운 형태로 재도전할 수 있다.
다만, 기자는 스팀에서 키보드+마우스 환경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는데 이 적을 때려야 하는데 다른 적을 때린 적이 적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컨트롤러 사용을 권장하고 있는데, 기자가 적을 제대로 조준하지 못한 것은 기자의 조작 미숙일 수도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 전투 때마다 등장하는 컷씬과 역동적인 액션이 잘 맞아떨어진다
▲ 순서는 기본이고, '각'을 잘 잡아서 이동한 뒤에 터뜨려야 한다.
▲ 크리티컬을 터뜨려 상대방을 무력화해서 턴을 옮겨오는 것도 잘 구현됐다.
▲ 필드에서 상대방을 막 때리다가 그로기가 걸리면
▲ 턴제 커맨드 전투로 옮길 수 있다. 실시간 파트에서는 이른바 '몹몰이'를 즐길 수도 있다.
탐험과 편의성: 불친절함이 사라진 JRPG의 재탄생
탐험 시스템의 편의성은 입문자에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과거 JRPG 특유의 '불친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퀘스트 목표와 NPC 위치가 지도에 분명하게 표시돼 헤맬 일이 적고, 대화하지 않은 NPC는 머리 위에 심볼이 떠 있어 놓치는 대사가 줄어든 인상이었다. 퀘스트 보상과 유격사 랭크 조건 또한 UI에 요연하게 정리돼 있어 진행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플레이어는 게임이 제시하는 탐험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
▲ 입문자들을 위해 초반부에 설명을 쏟아붓는데,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워낙 널리 통용되는 설정이기도 하고)
이런 요소 덕분에 단순한 이동이 지루하지 않고, 세계와 인물들이 점점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자동 쿼츠 세팅 기능은 입문자에게 매우 친절했다. 맵 위에는 보물 상자는 물론 포션 등을 표시하는 파란 포인트가 있어 원하는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탐험의 과정이 심심하지 않도록 동료들은 계속 말을 걸어준다. (애초에 빠른 이동을 걸어놓고 움직이면 심심할 겨를도 없이 진행되는 부분도 있다.)
요리는 파티원의 HP를 회복시켜주는 등 다양한 메리트를 제공하는 아이템인데, 각 요리는 상점에서 구매할 수도 있고 플레이어가 재료를 모아서 직접 만들 수 있다. 그 요리의 레시피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상점에서 음식을 구매하거나 보상으로 받은 음식을 소비해야 하는한다. 그 뒤 동료들은 요리를 제작할 수 있는데 그때마다 전용 컷씬이 등장하며, 대성공 때에는 플러스 스탯을 부여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어 번역 품질이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워 세계관 설명이 많은 초반부도 부담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영문 버전에서는 어색한 번역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매니아들에게 소개된 적 있는 타이틀인만큼 번역 문제에서는 자유로운 느낌이다.
스토리는 아버지의 실종을 찾아 떠나는 두 남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20년 전 FC(First Chapter)의 최종장에서 갈무리를 짓는다. 기자야 이 게임이 처음이다 보니 결말을 모르고, 동료를 모집하고 모험을 떠나는 과정이 전부 처음이었다. 옛 게임을 즐겁게 즐겼다면 필경 그때 그 길을 새로 걷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에 대한 큰 스포일러가 의미는 없겠지만, 이번 출시를 계기로 <하늘의 궤적 the 1st>를 플레이하려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서사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려 한다.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길을 떠나는 과정이 느린 호흡으로 이어지지만 그만큼 세계가 실제로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오랜만에 JRPG를 즐기면서 세계에 몰입하는 기분이 제대로 들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팔콤의 실력이 아닐까 가늠해본다.
주인공 에스텔의 활기찬 말투와 요슈아의 차분한 태도는 보이스 연기와 표정 연출 덕분에 더욱 생생하다. 중요한 장면에서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감정을 잡아내고, 보이스가 이를 완전히 살려내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덕분에 대화가 많은 JRPG 특유의 템포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 그냥 지나가고 말아도 그만인 짧은 장면에서 이렇게 많은 NPC들과 대화할 수 있다. 팔콤의 섬세한 설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
▲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 리워드가 풍성해서 게임하다 주는 것만 얻어도 상점에 안 가도 될 것만 같지만, 뒤로 갈수록 물약이 부족해져서 난도를 낮추었다.
PS3나 VITA가 없어 못해봤다면 바로 지금
<하늘의 궤적 the 1st>는 기자에게 처음 만나는 세계였다. 사실, 이 게임을 리뷰한다고 했을 때 '영웅전설'이 얼마나 높고 깊은 역사를 쌓아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옛날 PS VITA가 없어서 이 시리즈에 대해서 소문만 들어본 게이머(일단 기자부터...)라면, 지금이 바로 JRPG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걸출한 시리즈의 첫 페이지를 다시 만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 게임을 진행할수록 두 사람과 동료들이 쓸 수 있는 전투의 옵션도 많아진다.
▲ 두 사람의 여행기를 중심에 놓고 보면 복잡한 개념어나 세계관도 쉽게 넘어간다.
▲ 도감을 다 못 채워도 뉴게임플러스에서 다시 도전할 수 있다.
▲ 기자처럼 덜렁거리는 게이머들을 위한 자동 파츠 설정
- 지루할 틈이 없는 실시간+턴제 전투 디자인
- 화려한 연계 연출과 컷씬
- 그래서 유격사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