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은 ‘참신’, 2편은 ‘쇄신’, 3편은 ‘배신’.”
<보더랜드> 시리즈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1편은 FPS 장르에 RPG의 요소를 결합해 ‘루트슈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우리에게 참신함을 선사했다.
2012년 출시된 2편은 1편을 토대 삼아 그 위에 시리즈의 독특한 정체성을 견고하게 세우는 쇄신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6년 만에 출시된 3편은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부응하지 못했다. 편의성은 개선됐을지언정 전작의 틀을 넘어서는 발전은 없었고, 무엇보다 최악의 스토리와 캐릭터는 시리즈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팬들이 느낀 감정은 실망을 넘어 배신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또다시 6년이 흘렀고, 시리즈의 최신작 <보더랜드 4>가 출시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면 <보더랜드 4>는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기자는 과감히 펜을 들고 두 글자를 쓸 것이다. ‘혁신(革新)’. 3편이 남긴 실망감으로 낮아졌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보더랜드 4>는 모든 것을 새롭게 뜯어고치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만에 이뤄낸 진정한 혁신으로 돌아왔다.

# 심리스 오픈월드로 경계를 허물다
2019년 <보더랜드 3> 이후 6년. 그 긴 기다림이 ‘혁신’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대대적인 변화로 돌아올 줄 누가 예상했을까? <보더랜드 4>가 이룩한 수많은 발전 중 가장 빛나는 것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심리스 오픈월드로의 전환’을 택하겠다. 이는 시리즈 16년 역사를 새로 쓰는, 새 시대를 향한 담대한 진일보다.
전작들의 월드 역시 결코 좁지 않았지만, <보더랜드 4>의 배경이 되는 행성 ‘카이로스’는 체감상 그 이상이다. ‘디지러너’에 올라타 끝없이 뻗은 길을 질주할 때, 로딩 없이 펼쳐지는 카이로스의 광활한 풍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지역마다 색감과 분위기가 선명하게 대비되면서도, 그 모든 경관이 하나의 그림처럼 막힘없이 이어진다는 점이야말로 이번 작품의 백미다.
카이로스 행성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탁 트인 목초지 ‘페이드필드’, 히말라야를 연상시키는 설산 ‘터미너스 레인지’, 하늘에서 떨어진 달로 산산이 부서진 황무지 ‘카르카디아 번’, 그리고 ‘타임키퍼’가 지배하는 미래풍의 도시 ‘도미니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뽐내면서도, 일부 인스턴스 던전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거대한 지도 위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 산과 강이 만나는 푸른 초원 '페이드필드'에서 출발해

▲ 눈덮인 산 속 '터미너스 레인지'를 넘어

▲ 모래바람이 부는 황무지 '카르카디아 번'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길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다.
기어박스 소프트웨어의 CEO 랜디 피치포드는 일찍이 ‘보더랜드(Borderlands)’라는 이름에 담긴 개발 철학을 천명한 바 있다. 플레이를 가로막는 ‘경계(border)’는 허물고, 탐험할 ‘땅(land)’은 무한히 넓히겠다(Less Borders, More Lands)는 약속 말이다. 그리고 <보더랜드 4>는 그 약속을 완벽하게 지켜냈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산과 강, 거대한 건축물로 이루어진 복잡한 지형 위,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곳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수평적 확장을 넘어 수직적 탐험의 깊이까지 더해진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벽을 타고 제트팩으로 솟구치며 그래플링 훅으로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야말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자유도다.
이 광활한 세계는 결코 비어 있지 않다. 곳곳에 독특한 서브 퀘스트와 수집 요소가 숨겨져 있고, ‘교단’과 ‘리퍼’, 흉포한 야생동물들이 플레이어의 앞을 막아선다. 물론, 그 고난의 끝에는 초록색 불빛을 영롱하게 반짝이는 전리품 상자가 우리를 기다린다. 이 모든 과정이 멀리서 보면 ‘탐험-전투-파밍’의 반복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하나하나가 새로운 발견과 예측 불허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 지루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 카이로스를 종횡무진하다 결국 달까지 가버리는 주인공 일행
# 확장된 공간으로 새로워진 전투의 판도
앞서 소개된 그래플링 훅은 탐험뿐 아니라 전투의 판도까지 바꿔 놓았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전장을 누비며 펼치는 입체적인 공중전, 이것이야말로 <보더랜드 4>가 이룩한 두 번째 혁신이다.
<보더랜드 4>의 전투는 <둠>, <퀘이크> 같은 클래식 아레나 슈터, 소위 ‘부머 슈터’의 향수를 진하게 풍긴다. 2단 점프와 제트팩, 그래플링 훅을 조합한 공중 기동이 더해지면서, 전투의 무대가 지상에서 공중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오픈 월드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적들이 총알 세례를 퍼부을 때, 이를 활용한 회피와 기동이 생존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 그래플링 훅으로 어디든 빠르게!
리퍼의 소굴이나 교단의 군사 시설처럼 교전이 잦은 지역에는 전략적으로 폭발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작은 폭발물은 그래플링 훅으로 끌어당겨 적에게 되던져버리는 역발상의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 쉴 새 없이 뛰고, 던지고, 쏘는 과정 속에서 게임의 컨셉에 걸맞은 광란의 아수라장이 화면 위에 펼쳐진다.
이번 작품의 가장 큰 전략적 변화는 ‘수리 키트’의 도입이다. 적을 처치해야만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던 체력 팩에 의존해야 했던 전작들과 달리, 능동적인 회복 수단이 생기면서 전투의 호흡 자체가 달라졌다. 이제 플레이어는 잠시 몸을 숨겨 재정비할 것인지, 아니면 위기 속에서 ‘세컨드 윈드’를 노리고 더 과감하게 교전에 임할 것인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이처럼 생과 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격렬한 전투의 쾌감이야말로 이번 작품의 핵심 매력이다.

▲ 이번 작품에서 새롭게 추가된 수리 키트

▲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벌이는 1:1 결투의 긴장감이 엄청나다.
그리고 이 모든 전투의 즐거움은 보스전에서 정점에 달한다. 각 지역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보스들은 그 규모와 패턴, 시각적 연출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감히 말하건대, 최근 FPS 게임 중 이토록 박진감 넘치고 창의적인 보스전을 구현해 낸 작품이 또 있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 거대한 스케일과 강력한 화력에 압도됐던 타락한 릭터와의 보스전
# 무궁무진해진 빌드, 세팅은 끝나지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트슈터의 핵심은 결국 ‘파밍’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 장르의 창시자답게, <보더랜드 4>는 파밍과 빌드 구성의 영역에 또 한 번의 혁명을 일으켰다.
<보더랜드>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은 제조사별 특징은 여전하다. ‘말리완’의 속성 공격, ‘제이콥스’의 막강한 치명타 공격처럼 말이다. 여기에 <보더랜드 4>는 개성 넘치는 신규 제조사를 더했다. 충전 후 여러 발을 한번에 쏘는 ‘교단’, 짧은 예열 후 무서운 연사력을 뽐내는 ‘리퍼’, 심지어 다른 무기의 탄약을 빌려 쓰는 ‘다이달로스’까지, 선택의 폭은 더욱 넓어졌다.
<보더랜드 4>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시리즈의 근간을 뒤흔드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바로 ‘부품 라이선스’다. 이제 제조사 고유의 특징은 완성된 총기가 아닌, 총열, 개머리판, 탄창 등 개별 부품에 깃든다. 이는 곧 제이콥스의 몸체에 말리완의 속성 총열을 결합하는 식의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덕분에 파밍은 더 이상 완제품을 좇는 반복 작업이 아닌, 나만의 궁극의 무기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진화했다.

▲ 부품 라이선스 시스템으로 교단제 무기에 제이콥스 무기의 특성이 추가됐다.
무기뿐만이 아니다. 기존의 수류탄 슬롯은 투척 단검부터 강력한 중화기까지 장착할 수 있는 ‘오드넌스 슬롯’으로 확장되었다. 당연히 이 장비들 역시 어떤 제조사의 물건이냐에 따라 성능과 효과가 천차만별이어서, 빌드에 깊이를 더하는 또 하나의 변수가 된다.
파밍의 대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옵션을 지닌 쉴드와 수리 키트는 물론, 클래스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클래스 개조 장비’, 그리고 장착한 무기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강화체’에 이르기까지, 캐릭터의 모든 장비 슬롯이 파밍의 대상이다. 이 아이템 하나하나가 캐릭터의 운용 방식과 성능을 뒤바꾸기에, 플레이어는 끝없이 더 나은 조합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소위 ‘교복 세팅’이 완성되어 파밍의 동기가 사라지는 순간, 루트슈터의 수명은 끝난다. 하지만 이토록 무궁무진한 빌드의 가능성을 품은 <보더랜드 4>의 여정은, 아마 아주 오랫동안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캐릭터의 빌드를 바꿀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클래스 개조 장비와

▲ 강화체 장비
# 시스템은 과감하게, 스토리는 안전하게
전작, 특히 <보더랜드 3>를 경험한 팬들에게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불안 요소는 단연 스토리였을 것이다. 개발사가 공식 트레일러에서 직접 ‘셀프 디스’를 할 만큼, 3편의 이야기는 몰입하기 힘든 캐릭터와 전개로 혹평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더랜드 4>는 시스템의 혁신에 집중하는 대신 스토리에서는 안정을 택했다. 전작의 실패를 의식한 듯, 장대한 서사나 충격적인 반전 대신 누구나 예상 가능한 왕도를 걷는다.
주인공이 ‘저항군’이라는 설정의 이야기를 한번 만들어보자. 바로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강력한 힘을 내세워 폭정을 일삼는 악당이 있고, 주인공은 여기에 맞설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도울 여러 세력들을 만나서 힘을 모으고, 최후의 결전에선 악당을 무찌를 것이다. 게임의 이야기는 이 뻔한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개선점이 있다. 다행히도 이번 작품의 동료 중에는 소위 ‘발암 캐릭터’가 없다. 최종 보스 역시 가볍거나 뜬구름 잡는 악당이 아닌,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과 카리스마를 지닌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최소한 전작이 비판받았던 핵심적인 문제점들은 확실히 털어낸 셈이다.

▲ 페이드필드에서 만나는 외부인 세력의 수장 '러쉬'.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뻔한 스토리가 실망스럽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평범한 메인 스토리에 실망하기엔 이르다. <보더랜드 4> 이야기의 진정한 매력은 B급 감성으로 가득한 서브 퀘스트와 반가운 얼굴들과의 재회에 있기 때문이다.
나사가 너덧 개는 빠진 것 같은 세계관답게 게임 속 서브 퀘스트는 하나같이 기상천외하다. 자신이 불발탄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로켓의 인공지능, 삼엄한 경비를 뚫고 훔친 것이 고작 헤어 젤이 가득 든 금고였던 어느 도둑의 사연까지. 실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유쾌한 이야기들이 월드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 본인이 불발탄이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인공지능 '지지'

▲ <미션 임파서블>을 방불케하는 레이저 피하기 끝에 겨우 금고를 탈취했더니

▲ 그 안에 든건…
전작의 볼트 헌터들이 조력자로 등장하는 시리즈의 전통 역시 건재하다. 이번에는 시리즈의 터줏대감인 ‘목시’는 물론, <보더랜드 3>에서 활약했던 ‘아마라’와 ‘제인’이 등장해 유머러스한 티키타카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훌륭하다. 단순한 카메오가 아닌, 여전히 강하고 매력적인 영웅으로 존중받는 이들의 모습은 전작 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

▲ 3편의 볼트헌터 아마라와 제인의 티키타카가 일품이다.
# 돌아왔다, 루트슈터의 원조가
결론적으로 <보더랜드 4>는 시리즈의 정체성은 지키되, 낡은 것은 과감히 허물고 새로운 기둥을 세운 명실상부한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다. 단순히 전작의 단점을 보완한 수준을 넘어, 심리스 오픈월드, 입체적인 전투, 무한한 가능성의 파밍 시스템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혁신을 통해 시리즈의 미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메인 캠페인에만 30시간 이상을 쏟아붓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광활한 월드는 왁자지껄한 테마파크 그 자체였고, 정신없는 전투는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였으며, 마침내 손에 쥔 전리품은 최고의 기념품이었다. 발 디디는 모든 곳에 새로운 모험과 보상이 기다리는 경험, 이것이 <보더랜드 4>가 주는 핵심적인 즐거움이다.

▲ 쉴 새 없이 쏘고, 달리고, 싸우고… 이 난장판이 <보더랜드> 시리즈의 핵심 재미
출시 전, 다소 높은 가격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보더랜드 4>는 그 가격이 아깝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게임이다. 이토록 방대한 콘텐츠와 깊이 있는 시스템, 그리고 끝을 모르고 계속될 플레이 타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단순한 가격표 이상의 투자가 될 것이다.
‘참신’으로 시작해 ‘쇄신’을 거쳐 ‘배신’의 아픔을 겪었던 시리즈는, 마침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보더랜드 4>는 단순한 명작을 넘어, 앞으로 시리즈가 나아갈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 지상을 넘어 공중전까지 확장된 격렬한 전투
- 무궁무진한 세팅과 빌드, 멈추지 않는 파밍
- 익숙한 줄거리, 시리즈 팬들에게는 선물 같은 반가운 초상들
- 시리즈의 고질적인 번역 문제는 그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