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에서 발매 당일 가장 많이 팔린 PC게임, 일주일 동안 630만 장이 넘게 팔린 게임, 한국 PC방 점유율 40% 육박. <디아블로 3>가 발매 후 열흘 동안 세운 업적들입니다.
왕이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때리고, 도망치고, 아이템을 모으는 말초적인 재미에 충실했고, 블리자드표 ‘마법의 묘약’인 ‘기가 막힌 레벨 디자인’을 양념으로 가미했습니다. <디아블로>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았던 스탯 포인트를 통한 성장과 스킬 트리를 포기한 점도 눈에 띕니다.
하지만 완벽한 왕은 아닙니다. 이해가 안 가는 어설픈 스토리 전개와 플레이하는 사람이 지칠 정도의 반복, 이제는 시리즈의 전통인가 의심해 볼 만한 버그들은 실망투성이입니다. 문제는 그래도 게임은 재미있다는 거죠. 기록을 갈아치우는 ‘왕의 귀환’ <디아블로 3>를 살펴봤습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 10년이 지나도 여전한 말초적인 즐거움
강산이 변하고 남을 10년이란 시간도 <디아블로> 시리즈의 재미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디아블로 3>의 재미는 전작 <디아블로 2>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시작됩니다.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쿼터뷰 방식 시점부터 마우스를 이용한 이동, 보이는 대로 치고 빠지는 액션 등은 10년 전의 그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죠.
게임에 대한 복잡한 이해도, 사전지식도 필요없습니다. 그냥 원하는 캐릭터를 고르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파괴하면 됩니다. 복잡한 선택지? 깊은 뜻을 가진 이야기나 인물 간의 갈등? 복합적인 시스템과 치밀한 전략? 게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커스터마이징? 그게 뭔가요? 우걱우걱.
적이 있으면 가서 때리고, 적이 나보다 강해 보이면 도망가고, 길이 없으면 헤매고(?) 아이템이 나오면 (빛보다 빠르게) 줍고. 좋든 나쁘든 <디아블로 3>에서는 헤맬 일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뇌 대신 슈크림이 들어 있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진행은 직관적이고 인터페이스는 단순합니다.
■ 살아 숨쉬는 치열한 전장. ‘업그레이드’된 연출
<디아블로>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게이머(없겠지만)에게 <디아블로 3>를 보여주면서 최신게임이라고 말해 봅시다. 그 남자의 반응으로 적절한 것은?
1. 우와. 그래픽 최고다.
2. 이 게임 정말 재미있어 보이네!
3. ???
아마도 3번이 가장 많을 겁니다. <디아블로 3>는 솔직히 말해 ‘최신게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첫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캐릭터는 손가락보다 작고 시야는 고정돼 있죠. 색감도 칙칙합니다. <디아블로>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게임으로 잊혀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직접 게임을 즐겨보면 그래픽 걱정은 ‘기우’라는 걸 알게 됩니다. 캐릭터가 작은 만큼 한 화면에는 수십, 수백의 적이 쏟아지고, 물리엔진 도입으로 공격에 맞은 적들이 이리저리 날아갑니다. 찬찬히 뜯어 보면 작아도 세부적인 부분까지 그려 넣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건물 사이 뚫려 있는 천장을 통해 쏟아지는 눈. 이처럼 작은 연출이 차곡차곡 쌓여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특히 3막의 거대한 성벽 위에서 벌이는 전투는 연출의 절정입니다. 가고일이 쉴 새 없이 날아와 아군 병사를 끌어 성벽 밖으로 내던지고, 부상을 입은 병사가 기어간 자리에는 혈흔이 길게 늘어집니다. 투석기에 맞은 벽이 무너지면서 병사들은 저 아래로 떨어지죠. 머나먼 전장에서는 거대한 괴수의 전투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그래픽 퀄리티’를 높이기보다는 세밀하고 다양한 연출로 분위기를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고나 할까요? 덕분에 <디아블로 3>는 전투에 한해서는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 생명연장의 꿈, 도전의식을 불태우는 불지옥
블리자드는 <디아블로 3>에서 새로운 난이도 불지옥을 핵심으로 내세웠습니다. 발매 전부터 이미 수십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불지옥 난이도를 자랑했죠.
불지옥은 기존의 보통, 악몽, 지옥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난이도입니다. 불지옥의 소감은 한마디로 ‘끔찍’합니다. 지옥 난이도에서 디아블로를 처치했던 유저라도 불지옥에서는 일반 몬스터에게도 허덕이기 십상입니다. 세상을 구하려 온 용자가 지나가던 일개 좀비에게 죽는 세상. 용자고 뭐고 불지옥에서는 덧없을 뿐입니다.
하드코어 게이머에게는 확실한 즐거움을 줍니다. 지옥까지는 얼마나 쉽게 깨느냐가 관건이었다면 불지옥부터는 퀘스트를 깨며 스토리를 진행해 나가는 것 자체가 관건이니까요. 불지옥을 클리어하기 위해 기술과 아이템 조합을 연구하고, 한 막, 한 막을 클리어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디아블로 3>의 최종 목적인 셈입니다.
불지옥 덕분에 아이템 수집의 목적성도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디아블로> 시리즈의 아이템 파밍이 ‘남보다 좀 더 강해지기 위해’였다면 <디아블로 3>에서는 ‘불지옥을 깬다’는 확실한 목적을 주니까요. 목적성을 가진 아이템 파밍은 조금은 덜 ‘노동’스럽죠. 새롭게 생긴 경매장도 확실히 제 몫을 거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블리자드가 밝힌 것처럼 불지옥에서 ‘뛰어난 인공지능의 적들을 상대로 치밀한 전략싸움을 벌이는 재미’를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중간 보스급 몬스터들의 능력이 하나 추가되고 공격력과 방어력을 엄청 뻥튀기했을 뿐이죠.
뭔가 특별한 재미를 기대했던 유저라면 실망했을 부분입니다. 지금의 난이도 설정 방식이라면 이후 새로운 난이도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입니다.
■ 어렵지만 졸리다? 양날의 검이 된 난이도
문제는 ‘유저의 피로도’입니다. 어려운 과제를 만났을 때 사람의 판단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포기한다, 혹은 도전한다. 난이도가 높으면 포기하는 사람이 늘고, 난이도가 낮다면 도전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겠죠. 그런데 <디아블로 3>의 난이도는 전자에 가깝습니다.
불지옥이면 모를까 악몽과 지옥조차 어렵습니다. 가볍게 게임을 즐기려는 유저라면 이런 난이도는 오히려 독입니다. 특수능력이 잘못 조합된 몬스터를 만나면 여지없이 죽고, 죽고, 또 죽습니다. 불에 타서 죽고, 레이저에 맞아 죽고, 역병에 녹아 죽고, 얼어 죽고, 감전돼 죽고, 피해반사에 죽고. 아차 하면 죽습니다. 잠깐 이거 <슈퍼 마리오>였나요?
난이도가 오를수록 전투는 길어지고 전투의 피로도도 늘어납니다. 다양했던 기술과 룬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자주 바꿀 일이 없죠. 여기에 같은 콘텐츠를 반복해서 즐기다 보니 보통 난이도를 깬 이후에는 분명히 어렵고 긴박한 순간인데 졸린, 미묘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보통 난이도만 즐기면 되지 않느냐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작을 즐겼던 유저라면 당연히 ‘최고 난이도는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보통 게임에서 재미난 콘텐츠는 맨 뒤에 몰려 있으니까요. 거기에 레벨 60은 약 40시간 정도 플레이하면 달성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죠.
음식집에 와서 기껏 코스 요리를 시켜놓고 디저트를 못 먹으면 아깝잖아요? 심지어 그 음식집에서는 개장 전부터 ‘우리집은 디저트가 제일 맛있다(재미있다)’고 소문을 냈는데 말이죠. 자연히 유저들의 1차 목적은 ‘최고레벨 달성 후 불지옥에 가겠다’가 되고, 어설프게 어려운 악몽과 지옥의 난이도는 ‘짜증’으로 다가옵니다.
리뷰를 위해 최고 레벨을 키우고 나서도 다시 다른 직업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를 않더군요. ‘이 걸 또 깨라고?’ 불지옥까지 간 야만용사를 두고 악마사냥꾼을 키울 때 든 소감입니다.
■ “천하의 악마왕이 혓바닥은 왜 이리 길어?” 엉성한 스토리
스토리도 심하게 아쉽습니다. 블리자드는 <디아블로 3> 발매 전에 숱한 떡밥들을 던졌는데요, 정작 본 게임에서는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스토리를 보여줍니다. 자격을 증명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던 네팔렘의 사원 안에는 인간광신도가 널려 있고, 심연으로 사라졌다던 지옥의 군주들은 어째서인지 검은 영혼석에 옹기종기 갇혀 있습니다.
얼굴에 대놓고 ‘나 배반함’이라고 써 있는 적을 대놓고 믿고, 조금 전까지 까맣게 모르던 적의 정체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고 답하는 등 스토리에도 구멍이 뻥뻥 뚫려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니까요.
악마왕의 허세도 강력하죠. 3막 아즈모단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즈모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봉화를 올리게 놔두지 않겠다.
아즈모단: 용케 봉화를 올렸지만 내 병력들은 이미 너희 성 지하를 공격 중이다.
아즈모단: 내 부하들을 처치했지만 내 공성병기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아즈모단: 내 공성병기를 부쉈지만 그것이 없어도 내 부하들이 널 이길 것이다.
아즈모단: 내 부하를 처치했지만 내 부인은 강력하다.
아즈모단: 내 부인을 처치했지만 내가 직접 널 처치해주지.
… 얘, 허세로 악마왕 먹었나요? 디아블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디아블로: 지옥에서 군대를 불러왔다.
디아블로: 입구를 하나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디아블로: 지옥 입구를 두 개 다 막았지만 이제 곧 내가 이길 테니 괜찮다.
디아블로: 내 군대가 다 쓰러졌지만 내가 군단이니 괜찮다.
디아블로: 내 영토에서는 내가 더 강하다.
디아블로: 이럴 수는 없어.
… 힘으로 안 될 것 같으니까 주인공을 웃겨서 죽일 심산인가요? 이에 질세라 주인공을 협박하다가 천상이 힘을 잃으며 픽하고 1초 만에 쓰러지는 임페리우스까지. 이건 뭐 주요 캐릭터 선발을 입담과 개그 순서로 뽑은 느낌입니다.
손발은 오그라들고 기껏 몰입했던 연출은 모니터 속의 남일이 되어 버립니다. 스케일이 크고 성우를 많이 쓴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차라리 발매 전부터 던진 떡밥이나 없었다면 ‘<디아블로>에 무슨 스토리야’라고 생각하며 넘어갔을 텐데 말이죠.

<디아블로> 시리즈 최강의 허세남으로 등극한 임페리우스.
■ 들어오긴 쉽지만 나가긴 어려운 재미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디아블로 3>의 불지옥에 입성한 소감입니다.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앞에서 말한 스토리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어설픈 초·중반 난이도는 반복 플레이의 의지를 끊어놨고 ‘고쳐질 것이라 믿어서 리뷰에는 넣지 않았지만’ 불안정한 서버 상황과 갖가지 버그들은 <디아블로 3>를 어서 끊으라고 자극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블로 3>는 재미있습니다. 스토리가 엉망이어도, 난이도가 당장이라도 욕이 속사포 랩처럼 나올 것처럼 높아도, 버그에 오류까지 사람을 괴롭혀도, 때리고 피하고 줍고 강해지는 재미의 기본이 너무나 잘 녹아 있거든요.
‘깨알 같은 재미’도 대폭 늘었습니다. 특히 추종자들의 입담은 ‘압권’입니다. 평소의 어줍잖은 농담 따먹기는 입담의 경지에 이르렀고 자기들끼리 고민을 나누고 진실을 찾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이쪽이 메인 스토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메인 스토리보다 기사단원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요.
사운드와 대폭 늘어난 주인공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책장을 모아 이야기를 수집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여기에 게이머라면 한 번쯤 접해 봤을 유명 게임의 후속작이라는 ‘추억’까지 겹치면서 <디아블로 3>는 굉장한 ‘재미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유명 IP가 가진 힘이죠. 재미가 있고 끝을 보기 전까지 손을 떼기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분명히 낼) 확장팩에서는 추억에 의존한 재미보다는 ‘역시 블리자드’라는 찬사가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재미를 보여줬으면 기대 혹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9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