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든 게임은 전 세계 3억 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해 즐겼고, 중국에서만 최대 260만 명이 동시에 접속한다. 바로 <던전앤파이터>(이하 던파)다.

<던파>의 김윤종 디렉터(37)가 새로운 개발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더욱 강렬한 재미를 주겠다며 개발사 이름을 ‘A(아드레날린)-스톰’이라고 지었다(던파 개발팀 이름은 A-쇼크였다).
김윤종 대표는 작년 3월 말 네오플을 떠나 9개월 동안 쉬고 올해 1월 10일, 자신이 세운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그보다 먼저 회사를 떠났던, 혹은 나중에 떠났던 <던파> 초기 멤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실 김윤종 대표는 <던파>의 인지도에 비해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앞에 나서기보다 개발에만 빠져 있는 내성적인 성격 탓이다. 그런 그를 실로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쌓인 이야기가 많아 인터뷰를 두 편으로 나눈 점, 미리 양해를 구한다. /디스이즈게임 이재진 기자
A스톰을 시작하기 전까지, 김윤종 대표의 개발자 인생은 3개의 게임으로 압축된다. 각각의 게임을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레 1997년 시작된 그의 개발자 경력이 보였다. 먼저 시계를 14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언제부터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나. 1997년 대학교 4학년 졸업반 때 취업을 알아보면서 게임 개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게임회사를 찾아가 코에이 <삼국지>와 유사한 형태의 삼국지 전략 게임 개발에 참여했다. 그곳에서는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를 맡았다.
그 후에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반적인 IT회사로 가서 병역특례를 했는데, 거기에서도 게임을 만들게 됐다. 가고 나서 바로 IMF가 터져 회사의 작업물량이 없어졌다. 뭐라도 해 보자고 해서 음악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
당시에는 <비트매니아>나 <EZ2DJ>가 유행했다. 그래서 PC에 있는 미디(MIDI) 음원을 활용하는 음악 연주 게임을 만들었다. 혼자 만들어서 사내에 공개했더니 동료 직원들이 계속 즐겼다. 덕분에 정식으로 개발팀을 꾸려서 게임을 완성해 서비스했다. <VOS>라는 게임이었다.

솔직히 동시접속자 수나 회원 수는 꽤 됐는데, 당시에는 돈을 벌 줄 몰랐다. 말하자면 장사 능력이 없었다. 돈을 못 버니까 결국 서비스를 중단하게 됐다.
네오플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는지 궁금하다. IT업체를 나와 친구들(첫 개발사에서 알게 된 개발자들)과 함께 3명이 모여서 회사를 세우고 게임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접었다. 나이도 점점 들고, 자금도 없었다. 무모한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뭘 먹고 살까… 고민했다. 쭉 게임을 만들어 왔지만, 다양한 직종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살짝 방황했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중 구인공고를 보고 네오플을 찾아갔다.
그래서 처음에 무슨 게임을 맡았나. 2002년 가을, 허민 대표(전 네오플 대표)를 처음 만났다. 허 대표가 “우리 회사에 알바는 필요 없다”고 해서 당황했다. 알고 보니 “(아예) 와서 일하라”는 뜻이었다. 게임 쪽에서 계속 일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 대표의 뛰어난 언변에 휘말려서(웃음) 일하게 됐다. 자신감도 되찾았다.
처음에는 네오플이 게임포털 ‘캔디바’에서 서비스하는 <윙또>라는 게임의 서버 프로그래머를 맡았다. 기획자도 없었기 때문에 중간 역할도 했고, 클라이언트의 네트워크 부분도 맡아서 작업했다.
<윙또>는 투자한 비용 정도는 충분히 뽑았다. 그때 내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런 것을 회사에서 괜찮게 봤는지 평사원에서 개발본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개발본부장을 하면서 <신야구> <천생연분>(캔디바 게임) 등 네오플에서 진행하던 게임의 개발을 모두 관할했다. 관리도 하면서 네트워크(P2P) 쪽 개발은 계속 맡았다. <윙또>에서 만든 네트워크 알고리즘을 <미스터 해머>와 <신야구>에 썼고, <던파>에서도 활용했다.
<던파>는 개발 시작, 론칭, 서비스 유지 등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윤종 대표는 <던파> 이야기를 하면서 ‘좌절’과 ‘부족’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많이 배웠다고도 했다. 그만큼 <던파>는 그에게 있어 흥행 성적보다도 ‘큰 가르침’을 준 게임이었다. 김윤종 대표로부터 ‘던파에 미쳐 있었던 5년’에 대해 들어 봤다.
<던파>의 개발은 어떻게 시작됐나. 허 대표가 “시장에 액션게임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액션게임 팀을 꾸리게 됐다. 당시에 <스트리트 파이터 온라인>이 국내에 나왔었다. 그래서 “우리도 대전격투 게임을 만들자”고 해서 팀을 꾸렸는데, 너무 코어해지고 조작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시장이 크지 않겠다고 생각해 그만뒀다.
그때 기획자 한 명이 “사람끼리 싸우지 말고 예전에 횡스크롤 아케이드 게임처럼 앞으로 가면서 싸우는 게임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던파>의 시작이었다.
2005년 겨울에 첫 테스트(CBT)를 진행했다. <던파>는 회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원래는 게임포털 캔디바에 붙는, 7~10명이 5개월 동안 만드는 게임이었다. 물론 허 대표가 중간점검을 하며 신작을 만드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연장할) 여지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2년 정도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고생했다. 더 준비하고 오픈하고 싶었는데 회사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신작 프로젝트들이 잘 안 되거나 접히고 있더라.

네오플의 위기였을 텐데 개인적인 변화는 없었나. 개발본부장 자리를 내려놓고 <던파>에만 집중했다. 사실 <던파> 개발 초기에는 기획을 아우르면서 P2P 프로그래밍도 맡았다. 틈틈이 툴이나 몬스터 코딩 같은 것도 했다. 초반 고블린과 첫 보스 코딩은 내가 한 것이다.
그런데 ‘친구 추가’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서버가 죽더라(웃음). 그래서 코딩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 프로그래밍은 안 하고 있다. 간간이 스크립트를 짜긴 했지만.
이른바 ‘프로그래머 출신 디렉터’인데,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코딩을 했던 입장에서 프로그램 트러블에 대해서 대처하기 용이한 측면이 있다. 프로그램 그룹이 성격상 폐쇄적인 경우가 있기 때문에 용어를 알아듣고 판단할 때 장점이 있다. 게임을 개발할 때 개발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중요한데, 개발에 대한 감각이 있으면 ‘이건 딱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겠구나’는 식으로 비용(시간과 인력+커뮤니케이션 손실 보충시간)을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다.
단점은, 뭔가 계속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프로그래밍 배경이 없으면 상상력을 더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경험이 있다 보니 구현이 안 될 것 같으면 스스로 잘라내는 경우도 있더라. 그래서 창의적인 부분은 기획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내용은 좋은데 구현이 어려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결국 비용 대비 효과의 문제다. 효과가 충분히 있을 것 같으면 밀어붙이는 편이다. 보통 액션 게임의 스킬을 보면 ‘체계’가 있을 경우 새로운 스킬을 추가하기 쉽다. 반대로 완전히 새로운 메카닉(방식)의 스킬이 나오면 대부분 개발팀 내부에서 커트당하기 쉽다.
하지만 <던파>에서는 대부분 밀어붙였다. 예를 들면 ‘닐 스나이핑’이라고 해서 FPS처럼 저격 마크가 나오는 스킬이 있고, 궁극기도 체계가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았다. 또는 변신을 한다거나. ‘확실히 이건 재미있겠다’ 싶은 것이 있어야 경쟁력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많이 나오면 가능하면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려고 했다.
2D 도트 게임이었기 때문에 그래픽 작업 부하도 엄청났을 텐데. 처음에는 ‘아바타’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웃음). 2D에서 아바타는 비용이 엄청난 작업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네오플 안에서) <던파> 하나만 보고 있으니까 현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많이 모았다. 회의하면서 도움을 받았다.
사실 처음에는 <던파>의 캐릭터 비율이 SD(3~4등신)였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등신이 낮으면 타격감이 떨어진다”였고, 그래서 바꿨다. 누군가 “아바타를 꼭 넣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넣어 보자고 생각했다. 이렇듯 네오플 내부에서 제시한 아이디어가 <던파>가 잘되는 데 좋은 영향을 많이 주었다.

흥행에 탄력이 붙으면서 바빴을 것 같다. 2008년 네오플이 넥슨에 인수될 때까지는 <던파>에 파묻혀 살았다. 한마디로 5년 동안 <던파>에 미쳐 있었다. 끊임없이 일이 있었다. 직접 일을 만들기도 했고…. 그렇게 했던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 ‘오픈을 빨리 했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가슴을 졸였다. ‘콘텐츠가 떨어지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감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업데이트를 자주 했던 것인가. <던파>를 업데이트하는 속도가 빠르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솔직히). 나중에 “왜 그렇게 빨리 했냐”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업데이트했다. (다른 게임과) 비교할 수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효율이 다소 떨어지는 작업이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을 적절하게 잘 쳐냈다.
속된 말로 ‘삽질’을 최소화했다. 개발하다가 재미가 없거나 예상만큼 구현이 안 됐거나 해서 사장되는 콘텐츠도 나올 수 있는데, 사전에 효과를 충분히 고민해서 진행했다. 덕분에 만든 건 다 업데이트했다.
생각만큼 효과가 없어서 아쉬웠던 콘텐츠는 없었나. <던파> 결투장을 개선(업데이트)해서 ‘설산의 추적’이라고 죽으면 바로 살아나는 결투장을 넣었다. 내가 직접 기획했었는데, 망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망한 경우가 없었다. 차라리 욕을 많이 먹는 게 좋다. ‘사망의 탑’도 직접 했는데, 처음에는 욕을 많이 먹었다. 심지어 팀 내부 기획자들도 욕했다. 그래서 계속 고쳤다. 그러나 ‘설산의 추적’은 욕도 안 나오더라. 그때 가졌던 PvP에 대한 생각이 <사이퍼즈>에 영향을 미쳤다.
개발실의 작업 시간 조율은 어떻게 했나. 주 5일 근무였지만, 야근을 많이 했다. 거의 업데이트 직전에는 무조건 야근했다. 개발 중간에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야근했다. 정신적으로 지치는 게 부담이 많이 됐다. 클라이언트 파트장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져서 건강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다들 많이 고생했지만, 위기감이 계속 있었다. 오픈 베타를 시작하고 좀 지난 시점에도 ‘계속 이 속도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금방 없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항상 존재했다.
유저들이 많이 즐겼고, 그만큼 불만도 많았다. 게임의 불안정성이나 최적화, 밸런스 이슈 등은 유저들의 말이 맞는 부분도 참 많았다. 그래서 답답했고 고치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다.
밸런스 욕이 절반은 됐던 것 같다. 업데이트가 많아서 변화가 많다 보니 그냥도 밸런스를 맞추기 쉽지 않은데 더 어려웠다. 스킬 추가, 전직 추가, 던전 변화, 스킬 개편 등이 계속 이어지면서 밸런스를 잡는 데 어려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던파>에서 본인의 역할은 전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디렉터’라고 표현하지만, 팀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스스로를 ‘코어 게이머’라고 생각한다. <던파>를 처음 오픈했을 때는 내 기준으로 만들어서 게임이 굉장히 어려웠다. 고블린에게 크리티컬 히트를 맞고 죽을 정도였다. 나는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기준으로 냈는데 유저들은 힘들어 하더라. 그래서 ‘내 기준으로 만들면 게임이 망하겠구나’ 생각했다.
당시 팀 내부에 캐주얼 감성을 가진 멤버 3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방향성 조정을 맡겼다. 그렇게 2006년 6월에 오픈 베타를 시작한 <던파>가 12월 패치로 방향성이 확 달라졌다. 대중적인 방향으로 난이도를 낮추는 등 대전환을 가져왔다. 솔직히… 그때 ‘디렉터를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고 좌절했었다.
그런 좌절감은 어떻게 극복했나. 내가 개발을 총괄하는 디렉터이긴 하지만, 잘 모르겠으면 직위고하를 따지지 않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잘 모르니까 유저들이 뭐라고 하나 열심히 들여다봤다.
솔직한 얘기로 게시판을 들여다 보는 일은 ‘이렇게까지 욕을 먹으면서 게임을 만들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계속 욕을 먹다 보니 어느 정도 면역은 되더라(너털웃음). 요즘 만들다 나왔던 <사이퍼즈> 게시판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웬만한 불만 표출은 욕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던파>에서는 디렉터를 하면서 P2P 네트워킹을 살피고, 기획 일감 중에서 일부를 직접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다. 아무도 할 사람이 없거나 해결이 안 돼서 넘어오는 것을 맡았다.

중국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네오플을 떠난 지금도 계속 잘되고 있다. 솔직히 감이 없다. 동시접속자 수가 몇 백만씩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직접 보이지 않으니까 잘 모르겠다. 중국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개인적으로 <던파>라는 프로젝트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말 많이 배웠다. 한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좋은 동료들도 많이 얻었다. 잘못했던 것, 실수했던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김윤종 대표를 이야기하면서 <사이퍼즈>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그는 네오플을 떠난 지금, <사이퍼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아직도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동료들이 게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이퍼즈>는 그가 콘셉트를 확립하고 개발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개발을 맡았던, 네오플 시절의 엄연한 ‘차기작’이다.
<사이퍼즈>는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던파>를 서비스하면서 <사이퍼즈>를 기획했다. 초기에는 <던파> 팀에서 내부 기획자들과 함께 <사이퍼즈>를 구상했다. <던파>의 흥행이 애매했던 (과거) 시점에 차기작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당시에 여러 후보들 가운데 <사이퍼즈>가 있었다.
그런데 <던파>가 ‘거너 사격개시’' 업데이트를 기점으로 확 잘되면서 차기작 이야기가 쑥 들어갔다. 그러다가 <던파> 디렉터를 다른 개발자에게 넘겨주고 <사이퍼즈> 개발을 시작했다. 2007년 여름쯤부터 <사이퍼즈>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이퍼즈>에 전념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인가. 2009년 10월 <사이퍼즈> 개발이 시작됐고, 그 해 11월에 팀이 세팅될 때 합류했다. 그때도 <던파>처럼 소규모 인원(7명 정도)으로 시작했다. 핵심 인력들은 <던파> 팀에 그대로 두고, 나만 나와서 <사이퍼즈>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카오스>(워크래프트3의 유즈맵)를 좋아했다.

<사이퍼즈> 개발에는 어디까지 참여헀나. <사이퍼즈>는 론칭까지 약 2년 반 정도 개발했는데, 그중에서 50% 정도까지 참여했다. <사이퍼즈>가 PvP 게임이었기 때문에 방향성을 잡고 스토리를 중점적으로 썼다. 방향을 설정하고 조금 있다가 디렉터를 다른 동료에게 넘겨줬다. 퇴사를 생각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내가 없어도 잘 진행되도록) 프로젝트를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다. AOS 방향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나온 셈이다.
그런데, 스토리를 직접 쓰나. <던파>의 경우 마법사까지는 직접 스토리를 쓰다가 그 후로 담당자에게 넘겼다. <사이퍼즈>의 경우는 14개 캐릭터까지는 직접 썼다. 글 쓰는 걸 아주 좋아한다.
현재 <사이퍼즈>가 서비스 중인데 소감은 어떤가. 론칭을 잘해서 기쁘다.
/인터뷰 2부에서 계속…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