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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TRPG다 ① “태초에 D&D가 있었다”

‘도서출판 초여명’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

디스이즈게임(디스이즈게임) 2013-10-22 18:44:34
[새 연재, 이것이 TRPG다] 컴퓨터 RPG의 선조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TRPG. 디스이즈게임이 TRPG의 역사와 한국 TRPG의 변천사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5년 동안 한글 TRPG만 출판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TRPG를 플레이하고 있는 모습.(관련기사 ☞ TIG VS Dice 시리즈)

TRPG(Table-talk Role Playing Game)는 컴퓨터 대신 주사위와 필기구, 그리고 룰북을 따라 다른 플레이어들과 이야기하며 즐기는 현재 C(컴퓨터)RPG의 원조 격인 놀이입니다.

TRPG의 기원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19세기 영국의 브론테 세 자매가 서신으로 비슷한 것을 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즉흥극인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를 꼽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면 선사시대부터 해 왔으니 TRPG의 기원은 인류의 여명기에 있다는 거창한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TRPG가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이 1974년 ‘TSR’(Tactical Studies Rules, Inc.)의 <던전앤드래곤>(Dungeons and Dragons, 이하 D&D)부터였다는 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전략 보드 게임’을 주로 출시했던 TSR은 한 사람이 한 명의 모험가를 연기하는 <D&D>라는 게임을 출시했습니다. 그래서 게임의 분류도 배역을 맡는 놀이, 즉 롤플레잉게임(Role-playing Game)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습니다.


1974년 출시된 <D&D> 초판본.

한국에서 흔히 쓰이는 TRPG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T)RPG를 컴퓨터나 콘솔 RPG와 구분하기 위해 앞에 테이블토크(Table Talk)의 ‘T’를 붙인 것이 시작입니다. 한국에서도 RPG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컴퓨터 게임을 연상하기 때문에 TRPG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영어권에서는 TRPG라는 약자를 쓰지 않고 그냥 RPG라고 하며, 컴퓨터 게임과 구별할 때는 ‘Tabletop RPG’나 ‘Pen & Paper RPG’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 출간된 TRPG도 <D&D>입니다. 이것은 <D&D>가 만들어지고도 신판이 수없이 나온 후인 1995년 초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대학교 2학년의 무료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학교 근처 서점에서 한국어판 <D&D> 박스를 샀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와 <D&D>의 인연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 잠시 미국에서 생활했었는데, 그때 얼마 안 되는 용돈을 털어 말로만 듣던 <D&D>를 산 적이 있습니다. 빨간 상자(D&D Basic Set)에 들어 있던 얇은 책자 두 권을 몇 달 동안 해지도록 읽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다음 단계인 파란 상자 세트(D&D Expert Set)를 샀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D&D>는 제가 이미 익숙한 두 상자의 내용물을 합친 <D&D 초중급 세트>였습니다. 꽤 멋진 그림이 그려진 크고 튼튼한 상자에 스테이플러로 제본한 책 몇 권과 주사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어판 <D&D>를 출간한 회사는 당시 <게임매거진>이라는 게임잡지를 만들던 ‘커뮤니케이션 그룹’이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그룹은 <D&D>가 출간되기 전부터 <게임매거진>에 TRPG 코너를 열어 <천일모험기>를 비롯한 리플레이, 각종 시나리오, RPG 관련 기사를 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여러 테이블에서 삼삼오오 플레이를 하는 ‘모험자대회’라는 행사를 통해서 판촉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D&D> 한국어판이 출간된 이듬해인 1996년에는 일본의 판타지 소설 <로도스도 전기>를 바탕으로 한 TRPG 시스템 <소드월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비록 단 한 번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알찬 내용을 담은 <RPG 무크>라는 잡지도 냈습니다.

1995년 커뮤니케이션 그룹에서 출판한 <D&D 초중급 세트> 한국어판.

한국에 <D&D>가 처음 출간되었던 1995년은 요즘과 환경이 많이 달랐습니다. 당시 인터넷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신기술이었고, 모뎀으로 접속하는 PC통신(VT 터미널 기반 텍스트 통신)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요즘은 아마존이나 이베이를 통해 절판된 책까지 구할 수 있고 전자책이라면 배송료도 내지 않고 구입할 수 있지만, 그때는 TRPG를 하고 싶어도 외국 서적을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TRPG 룰북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보물처럼 여겨 밖으로 함부로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갖추고 있는 팀에 들어가지 않으면 TRPG를 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D&D>의 출간과 더불어 바뀌었습니다. 한국어로 쓰인 룰북이 서점에 나와, 누구나 사람만 모으면 손쉽게 TRPG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TRPG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TRPG를 처음 접했고, 귀국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7년에 도서출판 초여명이라는 TRPG 전문 출판사를 세운 뒤로 <GURPS> 시리즈를 비롯한 관련 서적을 계속 내 왔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겪은 것, 들은 것, 그리고 배운 것들을,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여기에 써 보려 합니다. 아무쪼록 재미있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서출판 초여명 김성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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