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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칼럼

[송재경] 나의 게임 입문기 (2/2)

송재경의 잡담 4회

2011-04-13 13:50:36

 

카이스트에 입학해서 전길남 교수님 연구실(SA, System Architecture)에 들어갔다.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프레젠테이션을 듣고서였다. 요즘은 흔한 이야기지만, 당시 전 교수님의 PT 주제였던 ‘Internationalization, Localization(국제화, 지역화)’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매력적인 내용이었다.

 

재일교포인 전 교수님(아래 사진)은 한국 사회에서 자라지 않고, 대학교까지는 일본에서, 대학원 석박사는 미국 UCLA에서 마쳤고, 그 후 미국 나사(NASA) 제트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에서 연구원을 하시던 분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해외 과학자 유치사업에 의해 79 2월 국내로 들어오시게 됐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유닉스 워크스테이션 개발했고, 그 뒤 서울대를 거쳐 카이스트 교수로 오셨다.

 

 

외국에서 생활하셔서 그런지 사고방식이 무척 달랐다. 맞담배를 권한 것도 한 예다. 지금 보면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90년에는 문화충격이 꽤 셌다. 모든 석사·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1주일에 한 번씩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하는 수업 방식도 달랐지만, 프레젠테이션할 때 교수님 이하 모든 학생들이 재떨이를 갖다 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듣게 한 것은 정말 파격이었다. 그것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놓고서. 한국 사회의 유교 질서를 타파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참 많이 깨지기도 했다. 프레젠테이션할 때 많이 혼났는데, 첫 장에 마침표가 잘못 찍혀 있다거나, 몇 분의 몇 표시가 안 되어 있어도 혼을 내셨다. 요즘은 그때 배운 걸 내가 똑같이 하는 것 같다. 우리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면 내용은 안 보고, 그런 걸 보고 있으니까. ^^;;

 

한국 인터넷의 대부로 불리는 전 교수님은 한국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 국가로 만든 분이다. 구미에 계시던 82 3월 서울대학교와 구미 연구소 사이에 전용선이 연결됐다. 외국에서도 굉장히 큰 인정을 받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전화선으로 PC통신을 하는 게 첨단이던 시절, 네트워크와 이와 관련된 유저 인터페이스를 다루던 SA랩은 카이스트 내에서 왕따 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연구실에 있을 때 인터넷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인터넷 1세대 트로이카였던 정철, 허진호, 박현제 선배님 등 이 연구소 출신 80~82 학번이 우리나라 인터넷 인프라를 깔았던 분들이다. 그 이후 세대(85~88 학번)가 그 인프라 위에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 내가 온라인게임을 개발하게 된 것도 이런 거시적인 맥락 속에 가능했던 것 같다.

 

카이스트 석사 때 <넷핵>(Net Hack)을 열심히 했다. <넷핵> ‘Roguelike game’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로그>(Rogue)와 그 뒤를 이은 <>(Hack)을 이어받은 D&D(던전&드래곤) 룰에 따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당시 <로그>는 유닉스에 기본으로 탑재된 게임이었다.

 

<로그>에서는 모니터에 표시되는 @가 게이머 자신을 의미했다. #은 통로를 표시한 것이고, 마이너스 기호(-)와 세로 바(|)를 활용해 방을 만들었다. 플러스(+)는 모퉁이를 나타냈다. @가 돌아다니다 보면, 소문자 d가 돌아다니는데, 이것은 개를 의미했고, 대문자 D는 용이었다. D에서 마이너스 기호(-)가 나오면 용이 불을 뿜는 것이었다. 그 마이너스를 피해 지하 50층까지 내려가 무언가를 찾아내 지상으로 올라와야 하는 게임이었다.

 

층마다 위의 기호들을 활용해 만든 각기 다른 맵들이 존재했다. 판마다 층의 구조가 달라졌다. <디아블로>도 따지고 보면 <로그>를 벤치마킹한 게임이다. 지하 16층까지 가서 디아블로를 죽이고 와야 하는 형식이나, 각 층의 구조가 판마다 달라지는 것 등은 특히 그렇다. <리니지>도 <로그>를 벤치마킹한 면이 많지만, 멀티플레이가 되니까 달라 보이는 것 같다.

 

<넷핵>(아래 이미지) <로그>를 조금 더 발전시킨 게임인데, 내 생애에서 가장 열심히 한 게임으로 기억한다. 카이스트 석사 1학년 때(90) 48시간 연속으로 자지도 않고 플레이했다. 스물 넷이었으니까 젊어서 체력이 따라줬다.

 

전산실에서 <넷핵>을 계속 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수업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아직도 하고 있네” 하고,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와서도아직도 하고 있네” 하던 시절이었다. 이 게임은 다른 사람이 죽은 시체(이 시체는 유령인데, 몬스터다.)는 볼 수 있지만, 멀티플레이가 안 됐다. 연구실 사람들끼리 “멀티플레이로 할 수 있다면 정말 째지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넷핵> <디아블로 2>의 하드코어 모드처럼 세이브는 할 수 있지만, 죽으면 세이브도 날라가고 그냥 끝났다. 정말 긴장하면서 플레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나온 텍스트 머드(Mud)보다 훨씬 더 공간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재미있는 판도 많았고, 아이템도 많이 나왔다. 딱 한 줄씩 나오는 설명을 보면서 게임을 했다. 애니메이션이 없으니까, 머릿속에서 흥미진진하게 상상하면서 하던 게임이었다.

 

그 시절 키보드에는 화살표가 없어서 h/j/k/l 키를 누르면 @을 좌/하/상/우로 움직였다. <바람의 나라> 초기버전에서 hjkl 키로 움직였던 것도 그런 탓이다. a 키는 바라보는 쪽 공격, b 키는 가방 열림, c 키는 채팅 등 <바람의 나라> 초기 인터페이스도 <넷핵>에서 따왔는데, 상당 기간 유지됐다. 지금도 그때 추억 때문에 가끔 <넷핵>을 받아서 해 보는데, 10분 정도 하면 계속 하고 싶지는 않다. <디아블로>가 거의 같은 게임이고 더 재미있어서, 굳이 억지로 따로 할 필요가 없으니까.

 

슬슬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석사 마치고 박사 과정 들어가는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석사는 마쳤고 박사는 아직 안 들어가서 장장 노는 시간, 그때 처음으로 텍스트 머드를 알게 됐다. 김지호가 만든 <kit mud>였다. 그때는 한국과학기술대학(KIT)과 한국과학기술원이 통합하던 과정이었다. KIT에 다니던 김지호와 그의 친구들이 오픈소스로 돼 있던 덴마크의 ‘DIKU 머드를 뜯어고쳐 <kit mud>를 만들었다. 내 인생 최초로 멀티플레이 게임에 노출됐던 시기였다.

 

그 전에는 하이텔 같은 PC통신에서 채팅이 있었는데, 지금의 메신저처럼 글로 하는 것이었다. 머드는 글로 하는 것에 설정이 들어가고, 몬스터와의 전투가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한두 달 플레이하다가, 내가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열심히 파 보기 시작했다.

 

당시 DIKU 머드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머드가 있었는데, 스웨덴 학생이 만든 ‘LP 머드였다. LPC라는 스크립트로 짜여 있었는데, 소스를 가져다가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터넷은 월드와이드웹(www)이 나오기 전이어서, 메일링 리스트가 주류였다. 그 곳에 메일을 보내면, 그 리스트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메일이 가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토론을 진행하던 방식이었다. 쉽게 말해 이메일로 게시물을 주고받는 커뮤니티로, 게시물은 내 이메일 보관함에 쌓이는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텍스트 머드를 개발하는 사람들이 토론하던 ‘mud-dev’라는 메일링 리스트에 가입해 눈팅을 열심히 했다. MMORPG <에버퀘스트>와 책 <재미이론>으로 유명한 라프 코스터도 주요 멤버였다. 여기서 ‘앞으로 머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열심히 토론했다. 그래픽과 머드 내 여러 사용자 간의 데이터 교환 등에 대한 토론이 많이 있었다.

 

당시 텍스트 머드는 공간감은 없지만, 채팅도 되고, 멀티플레이가 가능했다. 머드에 그래픽이 합쳐지면 정말따봉’이겠다고 생각했다. 박사 과정을 접기 전, 몇 개월 동안 이 둘을 합친 걸 열심히 연구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멀티플레이가 되는 게임을 만들었다. <넷핵> 같은 인터페이스에, 화면에서 돌아다니며 채팅하는 수준의 프로토타입이었다.

 

박사 과정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논문을 쓸 주제도 잘 안 떠오르고, 놀고 있었다. 선배들이 빈둥거리지 말고 회사에 가라는 이야기를 했고, 평생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하시던 어머니께서 공부는 그만하고 돈을 벌어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취직할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게임을 만드는 큰 회사가 없었고, 게임 만들려면 창업을 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의지나 역량, 비전이 없었다. 대기업은 여전히 가기 싫었고, 한컴(한글과 컴퓨터)이 리딩 소프트웨어 업체여서 들어가게 됐다.

 

한컴에서는 게임과 관련 없는 일을 하다가 삼정데이타시스템 오충용 사장이 도와달라고 해서 LP 머드를 고쳐서 <쥬라기공원>(아래 이미지)을 만들었다. 아르바이트 삼아서 LP 머드를 한글화해 줬고, 거기에 <쥬라기공원> 스토리를 덧붙여, 94 7 24일 천리안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예전 신문을 뒤져보니, 국내 최초의 상용 머드였다.

 

 

그게 시금석이 된 것 같다. 텍스트 머드로 한 달에 이 정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확신이 생겼다. 그래픽 머드를 만들면 저것보다 잘 되겠지, 하는 확신. 그때 한컴에서 맡았던 프로젝트가 잠시 일정이 미뤄지면서, 두 달 정도 온라인게임을 만드는 시도를 했었다.

 

희상(이희상, 현 엔씨소프트 부사장)이가 클라이언트를 만들고, 내가 서버를 짜는 식으로. 돌아가는 버전까지 만들지는 못 했다. 그런데, 당시 한컴에서는 이런 쪽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두고, 정주(김정주, 현 NXC 회장)와 넥슨을 창업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대기업에 간 것보다는 훨씬 잘한 것 같고, 한국과학기술원에 간 것도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