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가을, 그녀는 담양 부잣집 7번째 딸로 태어났다. 앞산과 뒷산, 모두 그녀 아버지 땅이었다. 어린 시절 담양에서 소니 TV가 있는 유일한 집이었다.
그는 또한 보수적인 사내였다. 남아선호가 투철했다. 딸딸딸딸딸, 딸딸딸 다음에야 아들 둘을 얻었다. 첫 아들을 환갑 때 봤다.
딸에게 국민학교 이상의 진학은 허락하지 않았다. 교회 생활을 하던 매형이 아버지를 잘 구슬린 덕분에 그녀는 선교 목적으로 세워진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경기도 소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유학생활을 했다. 그녀는 집으로 매달 편지를 써야 했다. 편지를 안 보내면 용돈이 오지 않았다.
그녀 아버지에게 딸의 고등학교 진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위 언니는 공부를 잘했다. 담임선생이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했지만, 진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동생은 글을 잘 썼다. 그녀가 쓴 시는 신문에 많이 실렸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3일 간의 단식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꺾었다. 하지만, 일반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구직을 명분으로 광주의 미용 전문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동생도 언니를 따라 시위를 했다. 간호 전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녀는 딸을 낳으면 꼭 대학까지 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훗날 그녀의 외동딸은 삼 남매 중 유일하게 유치원을 다녔다. 방송국 합창단 활동도 했다. 대학원까지 갔다.
그녀의 여동생은 2세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답답한 한국을 떠났다. 독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