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전 엄마와 다시 만난 곳. 광주 기독병원 신관.
암이 재발했다. 전이됐다. 서울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내려온 지 3일차, 엄마는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헬스장을 다녀온 아빠는 앰뷸런스를 불렀다. 혈액검사를 받아오던 기독병원에 입원했다.
CT촬영과 혈액검사 결과가 나빴다. 위독했다. 복수가 찼고, 몸이 부었다. 산소호흡기를 꼈다. 주사액을 5~6개를 계속 꽂고 있었다. 포도당, 항생제, 백혈구, 혈소판, 알부민, 칼륨, 나트륨, 몰핀... 치료가 아니었다. 완화였다.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하루 기력이 빠졌다. 걸어서 화장실 가기, 침대 위에 앉기, 누워서 목 들기가 차례대로 안 됐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불안했다. 병원에 와서 더 나빠지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더욱 불안했다.
엄마가 잠든 사이, 아빠와 아들들은 의사와 면담했다. 전화통을 붙들었다. 대안이 없었다. 중환자실에 보낼 수는 없었다. 동생은 말기 암환자를 받아주는 한방병원을 찾기로 했다. 형은 완화병실을 알아봤다. 한방병원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1인용 완화병실도 나오지 않았다.
아들들의 어깨가 내려갔다. 늦은 밤 아빠는 엄마에게 '아들들이 서울에서 좋은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살아야지' 하는 의지를 보였다. 남은 선택은 하나가 됐다.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에 일이 벌어져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의 의지를 믿는 수밖에.
병원에서 자료를 뽑고, 앰뷸러스를 불렀다. 목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기력이 빠진 환자는 고속도로를 3시간 이상 달렸다.
항암치료를 받아왔던 병원 응급실로 갔다. 관건은 입원실에 얼마나 빨리 들어갈 수 있느냐. 월요일 오후 입원실은 나지 않았다.
나는 이틀 동안 응급실에서 밤을 보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2구역 9번 침대. 김 여사는 이틀째 응급실에서 분투 중이다. 밤과 새벽 내내, 3차례의 혈액검사, 엑스레이, CT, 실패한 복수 추출이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밤새 환한 조명 아래 각종 소음, 이를테면 하악하악 가쁜 숨소리, 마르고 거친 기침소리, 가래 끓는 소리, 낮거나 높은 신음소리, 연거푸 피 토하는 소리, 수술 받는 환자의 비명, 그 다리를 누르고 있는 아내의 울음, 숨 끊어가는 환자를 붙드는 자식의 호소, 운명하는 남편에게 고생했다, 걱정말라는 아내의 흐느낌, 바이탈의 이상 또는 정지를 알리는 뚜욱뚜욱, 뚜뚜뚜뚜 기계음 등이 쉴새 없이 들려왔다.
밤새 물 한 모금 못 마셨다. 이튿날까지 병실을 배정받지 못했다는 소리에 실망했다. 앉기도 힘들 정도로 기력이 빠지고, 숨이 차고, 몸이 부푼 이유를 몰라 불안했다. 가끔 눈물이 찔끔 났다.
김 여사는 좁은 침대 안에서 혼자만 아는 일생일대의 싸움을 치르고 있다. 아프고 서럽고 기약도 없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다. 포기는 자식들에게 싸줄 배추김치를 세는 단위일 뿐이다.
이틀을 새고, 새벽 3시 엄마는 마침내 입원실로 이동했다.
입원실에서 주사액 1~2개만 꽂았다. 항생제와 포도당, 칼륨과 철분, 혈소판 등을 번갈아 맞았다. 하루하루 조금씩 기력이 회복됐다. 목을 들었고, 침대 위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걸음도 떼었다. 12일 만에 산소호흡기도 뗐다. 얼굴과 다리의 부기도 거의 빠졌다.
하지만 불안했다. 복수를 빼냈는데, 계속 복수가 찼다. 퇴원해도 당분간 복수를 빼내는 튜브와 주머니를 차야 한다는 의사의 이야기에 실망했다.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몸 속에 암과 다시 싸워야 하는 건 그렇다 치는데, 독일에서 제일 아끼는 여동생이 오는데, 튜브와 주머니를 차고 맞이하는 게 정말 싫었다.
김 여사는 2주 만에 하루를 봤다. 바람을 느꼈다. 노을이 아름다웠다.
독일에서 하나 뿐인 여동생이 왔다. 7년 만의 재회였다. 함께 노을을 봤다.
김 여사는 17일 만에 병원에서 나왔다. 생사의 위기를 이겨냈다.
7월 말 다시 병원이다. 전이된 암과 싸워야 하는 험난한 시간이 기다린다.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당신의 긍정적 마인드와 강한 의지에 건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