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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카드뉴스] 이 부부는 2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도서출판 초여명 이야기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김승현(다미롱) 2016-05-31 18:08:33

좋아하는 것을 하다가 서로 만났고,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강산이 2번 변했고, 부부는 언제부턴가 그 분야 사람들에게, 그것을 즐기는 이들에게 '한국 TRPG의 역사'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1990년대, 한국 경제의 황금기. TRPG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TRPG에 빠진 여자가 있었다. 컴퓨터 RPG에선 찾을 수 없는 TRPG의 자유로움이 좋았던 남자. 컴퓨터 RPG에선 느끼기 힘든 TRPG의 깊이가 좋았던 여자. TRPG로 만난 된 둘은 연인이 되었고 함께, 같은 미래를 꿈꿨다.

'우리가 느낀 재미를 알리고 싶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김성일·박나림 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신혼방에서 서류와 씨름하며 TRPG 출판사를 낳았다. '도서출판 초여명'.​ 그렇게 탄생한 한국의 2번째 TRPG 출판사. 그리고 얼마 뒤, '한국 유일의 TRPG 출판사'란 이름을 10년 넘게 떠안아야 했던 회사.

초여명이 태어난 지 5개월이 지났을 때,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첫 책 <겁스 기본세트>는 하루 1권 팔리기도 힘들었다. 책 창고를 빌릴 돈도 없어 신혼방은 가구 대신 재고로 가득 찼다. 

인쇄비가 없어 빚 내서 신간을 만들고 생활비는 번역 외주로 충당하던 나날. 한국 최대의 TRPG 출판사가 쓰러지고, 기대했던 국산 TRPG들도 자취를 감춰 외톨이가 된 와중에도, 부부는 15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초여명은 15년을 그렇게 자라왔다.

Q: 매번 빚내서 책 만들고, 생활비 벌려고 번역 외주하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책은 사정 좀 나아지고 낼 수도 있잖아요.


A: 룰북만 있고 새 자료가 끊긴 TRPG를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저들은 그런 TRPG를 계속하고 싶을까요?


빚을 내서 책 만드는 스트레스보다, 출판과 프리랜서 일을 오가는 삶보다 더 힘들었던 것. 그것은 아주 작은 의심 하나.

'우리가 그동안 낸 책들은 과연 '유저'들 손에 쥐여졌을까? 우리가 낸 책은 플레이에 쓰였을까? 어쩌면 도서관이나 수집가의 책장 안에 잠들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닐까?'

책을 내기에 바빠, 살아 남기에 바빠 책이 누구에게 가는지 실감도 없었던 10여 년.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가뭄에 시달리는 겁스를 볼 때마다 부부는 생각했다.

'…우리가 10년 넘게 몸 바친 이 일은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청춘을 바친 업(業)은 점점 헛돼 보이기만 했다.

이런 어둠 속에서, 부부는 실패를 각오하며 새 TRPG를 준비한다. 그저 좋은 TRPG를 알리고 싶어서, 실패해도 이번 한 번은 버틸 수 있을 같아서 시작한 <던전월드> 출판 소셜펀딩. 이 실패만 생각했던 프로젝트에서
부부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겁스 국문 1판 때부터 응원했습니다. 한국어 룰북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뻤어요."

"아직까지 어렵게 좋은 일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초여명 덕에, 겁스 덕에 학창시절을 정말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TRPG와, 초여명과 함께 자란 이들은 수백, 수천 건의 메시지로 말했다. 당신들이 있어준 덕에 정말 즐거웠다고. 당신들의 15년은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TRPG 유저들은 5,841만원이라는 기록적인 모금액으로 기획자도 실패만 예상했던 <던전월드> 소셜펀딩을 성사시킨다.

17살 초여명의 사춘기를 날려버리며, TRPG에 청춘을 바친 부부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선사하며….

그로부터 3년, 20살이 된 초여명은 그동안 5건의 새 TRPG를 발간했다. 그리고 지난 5월 21일, TRPG <크툴루의 부름> 소셜펀딩(☞ 바로가기)으로 1억 원을 모금하며 한국 게임관련 소셜펀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초여명은 꿈꾼다. 첫 책 '겁스'가 그랬듯 새 TRPG가 누군가의 팍팍한 생활을 즐겁게 바꿔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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