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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고칼럼] 아마도 흔한, 그래서 씁쓸한 업계의 어느 일상

디스이즈게임 2016-10-13 18:07:11

# 굴지의 글로벌 게임회사 A와 인기 IP 시리즈 H

 

A사는 게임 업계 최고참 수준의 연혁을 갖는 글로벌 기업이다. 

 

수십 년 전, 전자 오락 상품은 그저 아동용 완구 시장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A사는 이 바닥 강자였다. 그렇게 긴 연혁을 거치는 동안, A사의 몇몇 작품들은 게임 시장에 가히 위대하다 할 만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하더라도, A사를 제외하고 현대 게임 시장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연혁 만큼 A사에는 그 각각이 적게는 서너 개, 많게는 십여 개의 넘버링 타이틀을 거느린 십수 년 묵은 IP가 즐비하다. A사는 각 IP의 확장 과정에서 하위 넘버링 타이틀 하나로도 완성판, 감독판 등 다양한 버전을 재판매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특기로도 업계와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때문에 A사가 어느 IP의 새로운 넘버링, 혹은 스핀 오프 타이틀을 발표하는 것 역시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로 통한다.

 

지금은 간판급 IP 중 하나로 자리잡은 H 시리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A사는 H 시리즈와 관련해 또 하나의 신작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사업은 최종적으로 A사의 지부가 외주 계열사 K를 지휘해 진행하는 형태로 굳어졌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 A사가 자사 타이틀 개발에 아웃소싱을 적극 활용하는 것 또한 근래 들어 흔한 일이었다.

 

 

# '설계변경'이라는 네 글자에 담긴 의미

 

A사 지부의 지휘 아래 H 시리즈 신작을 제작하던 중, 외주 계열사는 전폭적인 설계 변경을 요구받았다. 굳이 빗대어 말하자면, 화이트 와인으로 양조되고 있던 것을 레드 와인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하는 정도쯤 되지 않았을까. 물론 게임 개발과 와인 제조가 동일선상에 있을 순 없으므로 이것이 제대로 된 비유는 아니겠고, 그저 많은 개발진들이 ‘설계 변경’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흔히 느끼는 감각이 그렇지 않을까 한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다.

 

원청 회사의 요청에 따라 게임의 기둥 설정이 변경됐다. 시스템 디자인과 전체 개발 사양, 그리고 구현 목표 또한 변경과 재설정이 잇따랐다. 개발진들도 각기 목표를 새롭게 변경하거나, 변경하도록 지시 받거나, 변경된 목표에 맞춰 기존 작업물들을 다시 만드는 식으로 움직이게 됐다. 그러는 사이 연 단위의 시간 속에서 제작돼왔던 수십 기가 바이트 분량의 문서와 자료, 리소스들이 백업 폴더 속에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 만든 배를 산으로 보냅시다.

 

다시 수 개월이 지나, 개발진들은 A사의 지사가 요청한 바에 따라 새로 설정된 목표를 바탕으로 제작한 결과물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A사 본사의 평가서는 뜻밖이었다. A사 지사에 의해 변경되었던 목표의 달성 정도나 요청 사항의 구현도 등에 대한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프로젝트의 방향성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논하고 있었다. 개발진들은 어째서 이야기가 이리로 튀었는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곧이어서, 그렇게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던 그들에게 ‘대기할 것’이라는 주문이 내려졌다.

 

이후로 개발진들은 수십 일 간 ‘대기’ 상태에 머물렀다. 소문은 무성했으나 이게 맞다 싶은 이야기는 무엇 하나 없었다. 그 사이 몇몇은 개발팀을 떠나고, 나머지는 남았다. 어쨌거나 많은 이들이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밝혀줄 답을 궁금해 했다. 하지만, 수십 일의 시간이 흘러 튀어나온 답은 A사 본사의 중간 평가서에 버금갈 만큼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문제의 ‘답’을 들고 외주 계열사를 방문한 A사 본사의 중역은 문자 그대로 알만한 책임자였다. 그는 미안하다는 이야기로 운을 뗐다.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알려진 그의 성향을 고려해 보면 이건 꽤나 의외였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개발진들과의 질의 응답을 통해 나온 그의 ‘답’에 비하면 이 '의외'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 프로젝트는 엎어졌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중역은 A사 지사의 설계 변경이나 재개발에 따라 변동된 개발 진척도 등, 여태까지의 사태 추이 자체를 개발진 방문이 결정되기 얼마 전이 되어서야 보고 받았다고 했다.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다국적 거대 개발사의 최고위 중역이, 자사의 간판급 IP의 차기작 개발을 두고, 그 개발진들에게 한 줄로 말해 ‘나는 상황을 몰랐다’는 요약되는 이야기를 전한 것이었다.

 

중역은 뒤이어 회사측의 커뮤니케이션 미스, 관리 미숙 등에 대한 유감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어쨌거나 결론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중역은, A사의 지부의 지휘를 통해 진행되었던 이번 프로젝트를 중지함은 물론, 앞으로도 A사가 외주 개발사 K에게 유사한 형태의 프로젝트를 발주 진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발표했다.

 

여행사 직원이 실수로 평창으로 갈 사람을 평양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게 남 얘기가 아니었다. 

 

연 단위가 넘어가는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이런 식의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단절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는 둘째 치고, 앞으로 개발진에 대한 사항들은 언제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 나오지 않았다. 많은 말들이 오가긴 했지만, 중역과 개발진들이 자리하던 공간을 채운 것은 결국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다'는 내용을 꾸며주는 흔한 수식어들뿐이었다.

 

이 날 이후 개발진에게 내려진 주문은 또 다시 ‘대기할 것’이었다. 물론, 독자 분들도 예상할 수 있을 만한 일이겠지만 이번의 ‘대기 주문’은 한 달을 채 넘기지 않았다.

 ​ 

 

# 그걸로 끝인줄 알았는데...

 

개발진들이 '새로운' 대기 주문을 받은 수주 후, 한 업체가 대상 인원 100명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굉장한 잡음을 일으켰다. 체불 임금자가 넘쳐나는 이 업계에서, 회사가 이런 저런 이유로 개발 인력을 털어내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니다. 다만, 이번 건은 규모 면에서나 절차 면에서나 잡음을 피할 수 없었고, K사의 개발진들을 두고도 또 다시 내외적으로 무성한 소문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문제의 사건이 업계를 강타한 그 다음 주 어느 날, 외주 개발사는 희망 퇴직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근속 기간에 따라 적게는 2개월에서 많게는 4개월의 퇴직 위로금이 붙고, 사측은 고용 보험을 보장해 주겠다는, 흔한 희망 퇴직 절차였다. 마찬가지로 흔히 있을 법한, '사측은 퇴직을 강요 및 강제하지 않는다'는 문구도 함께 따라 붙었다.

 

단, 사측이 '별도 기준에 따라서 퇴직 위로금을 받을 수 없는 신청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못 박은 사실은 당사자들이 흔한 일이라며 넘기기에는 그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리고, 신청 진행 상황에 따라서 신청 자체가 '사전 종료'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문구는 그 무게를 몇 곱절로 늘려놓고 있었다.

 

희망 퇴직 결정 기한은 일주일. 사측이 결정하는 '퇴직 위로금을 받지 못하는 신청자'의 기준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청 사전 종료’만큼이나 업계에서 흔히 언급되는, 그리고 업계의 경영자들이 원하는 단어는 그리 흔하지 않다. 경험 많은 이들은 희망 퇴직 신청을 두고 쓰인 이 '신청 사전 종료'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에 대해 감을 넘어선 확신을 가졌다. 

 


모두 쉬쉬했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들을 수 있었던 그런 이야기.

 

# 단 하루 만에 업계에 사라진 팀 하나

 

일주일 간 진행한다던 희망 퇴직 신청 접수는 단 하루만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희망 퇴직 신청 접수 다음 날, 사측은 신청자들 대상으로 면담을 시작했다. 희망 퇴직 신청 접수 발표가 퇴근 직전이었으니 사실상 하룻밤 만에 희망 퇴직 면담이 시작된 셈이었다. 지나치게 빠른 희망 퇴직 진행에 경험 많은 이들조차 적잖이 당황했지만, 진짜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면담이 진행되고부터였다.

 

면담 대상자들은 면담일 바로 그 날 사무실에서 퇴거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를 거부한 이들은 사측의 요구에 의해 바로 다음 날 퇴거를 약속하게 되었다. 빨리 짐부터 추리고 봐야 하는 현실이 향후의 처신 고민이니 동료들 간의 감정 정리니 하는 마음의 문제들이 나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반나절에서 단 하루 만에 팀 하나가 또 업계에서 사라졌다.

 

 

#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금세 발견할 수 있는 업계 어느 일상

 

단 이틀 만에 끝나버린, 매우 속도감 넘치는 엔딩을 빼고 나면, 이 이야기는 이 업계에서 어느 동네 마트나 편의점에 굴러다니는 싸구려 와인들만큼이나 흔해 빠진 것이다. 맥주나 소주처럼 가게에 없다는 것이 좀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 조금만 찾다 보면 금세 동네 어느 가게에선가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흔함이다.

 

원청이 하청을 주고, 어느 사이에 윗선에선 상황이 바뀌고, 그 결과 아래의 개발진들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아니 책임을 지는 누군가가 있긴 하는지도 모른 채 몇 장의 서류와 함께 직장에서 내보내진다. 업계에서는 싸구려 와인만큼이나 흔한 일이고, 싸구려 와인처럼 기분 나쁘게 입 맛이 씁쓸해지는 일이다. 개중에 보상이라도 받는 이들이 자진 퇴사자 당하는 이들보다야 나은 편이라는 소리가 공공연히 도는 현실에서는 껄쩍지근하게 들러붙는, 싸구려 단맛까지 느껴진다.

 

 

# 마치며

 

그래도, 이번 이야기에는 하룻밤하고도 두어 나절 만에 사무실을 비워냈더라는, 과히 경쾌하다고까지 할만한 결말이 주는 경영적인 측면에서의 상쾌한 역동감과 속도감이 존재한다. 흔한 와인이 주는 것과 같은 기분 나쁜 씁쓸함과 껄쩍지근한 싸구려 단 맛 속에서, 유일하게 흔하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따지고 보자면 흔한 싸구려 와인들 각각에게도 나름의 향취와 맛이 있을 것이고, 개중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경영적인 측면에서의 상쾌함처럼 곱씹어 볼만한 독특함을 갖추고 있는 물건도 있을 것이다. 가성비가 좋기로는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그만이라고 하니, 혹여나 이번 이야기의 흔한 맛에 질려버린 분이라면 캘리포니아산 와인 한 잔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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