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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접칼럼] 넥슨의 7가지 실패 이야기

임상훈(시몬) 2015-12-14 16:05:30

좋은 책은 다양한 시각을 다면적으로 담고 있다. 12월 초 출간된 <플레이>도 그렇다. 

 

나는 그중 '실패'에 주목했다. 

 

넥슨은 21년 동안 다양한 시도를 했다. 실패가 많았다. 성공도 있었다. 나는 실패를 '삽질'이라고 불렀다. 넥슨은 삽질로 근육을 키웠다. 실패가 넥슨을 키웠다. 실패한 성공이다.

 

넥슨은 굵직굵직한 성공을 했다. 성공은 빛났다. 실패의 그늘을 감췄다. 그늘은 짙어졌다. 퍼졌다. 터졌다. 성공이 넥슨을 퇴보시켰다. 성공한 실패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 7개를 모아봤다. 넥슨의 저력은 실패를 책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외 이런 회사는 거의 없다. 내부자여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책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과 내 생각도 추가했다.

 

 

1. 김정주의 카이스트 합격 취소

 

김정주는 송재경, 이해진과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동기다. 카이스트 시험 공부를 함께 했다. 모두 합격했다. 김정주는 스키장에 가서 놀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학점미달로 학부 졸업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양 필수인 사회학 개론 대신 교양 선택인 범죄심리학을 들은 탓이었다.

 

1990년 송재경과 이해진은 카이스트에 갔다. 김정주는 유급했다. 5학년이 됐다. 1년이 뒤쳐졌다.

 

하지만, 이 시기는 김정주에게 특별한 자양분이 됐다. 카이스트에 갔다면 대전 대덕 캠퍼스에 박혀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친구들과 헤어진 1년 동안 그는 사회를 경험했다. 선배 회사들을 둘러보며 창업 의지를 다졌다. 카페도 차려봤다. 사장 노릇까지 했다. 1년 뒤 카이스트에 들어갔다. 이미 공사다망한 학생이었다.

 

이 시기 카이스트에서 인터넷에 푹 빠졌던 송재경은 온라인게임 개발자가 됐다. 카이스트를 거쳐 삼성SDS에서 유니텔의 검색 솔루션을 개발했던 이해진은 검색포털 회사를 차렸다. 미국 현대전자 보스턴연구소에 갔던 김택진은 TCP/IP 연구에 집중했다. 엔씨소프트는 그 1년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대와 카이스트 사이 1년도 김정주에게 그런 역할을 했다. 김정주는 프로그래머 대신 사업가로 방향을 잡았다. 

 

(그림=김재훈)

 


2. <퀴즈퀴즈>의 유료화 실패

 

1998년 넥슨 개발팀은 대형 게임을 개발하고 있었다. <택티컬커맨더스>는 <스타크래프트> 대항마였다. <어둠의 전설>은 <바람의 나라> 후속작이었다. 그 시절 온라인게임은 대형 타이틀이 대세였다.

 

병역특례로 들어온 이승찬은 퀴즈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회사는 큰 타이틀만 쳐다보고 있었다. 퀴즈 게임은 찬밥이었다. 제대한 절친 김진만과 회사와 집을 오가며 서너달 동안 뚝딱거렸다. 1999년 여름 김정주가 이 게임을 발견했다. 이거다, 싶었다. 당장 서비스하기로 했다. 강신철을 투입했다.

 

<퀴즈퀴즈>는 1999년 10월 베타테스트를 시작했다. 대박이 났다. 두 달만에 가입자가 100만을 돌파했다. 3달 만에 동시접속자가 1만을 넘었다. 캐주얼게임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넥슨은 곤경에 처했다. 동접자 수만큼이나 트래픽 비용도 늘어났다. 넥슨은 아직 조그만 회사였다. 수익도 변변치 않았다. ​김정주는 유료화를 주장했다. 이승찬은 반대했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은 없었다. 정액제만 있던 시절이었다.

 

2000년 1월 2일 <퀴즈퀴즈>는 유료화를 단행했다. 동접이 반토막이 났다. 기존 유저의 70%가 떨어져 나갔다. 이승찬의 마음도 넥슨에서 떠났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부분유료화는 그 결과 태어났다. 넥슨은 세이클럽 아바타 꾸미기 아이템을 벤치마크했다. 온라인게임에 부분유료화를 도입했다. <퀴즈퀴즈>는 더 잘 됐다. 넥슨은 부분유료화 원조회사가 됐다. 넥슨의 비즈니스 모델은 국내는 물론 글로벌 회사들까지 벤치마크했다. 

 

이승찬은 병역특례를 마치고 퇴사했다. 위젯을 창업했다. <메이플스토리>를 만들었다. 넥슨은 퍼블리싱 계약을 했다. 일부 지분도 샀다. 인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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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장 유보와 정상원의 퇴사

 

엔씨소프트는 2000년 7월 코스닥에 상장했다. 엔씨 직원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넥슨 내부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 어차피 개발자들끼리 다 아는 사이였다. 하루 아침에 처지가 달라졌다. 만나면 주식 이야기를 많이 했다.  

 

김정주도 개발자들의 동요를 알았다. 2001년 1월 전 직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적어도 매출이 3,000억 이상은 되어야 상장할 수 있습니다." 2000년 넥슨의 매출액은 268억 원이었다. 당장 상장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김정주는 개발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하는 게임회사에서 상장을 하면 주주의 이익을 위해 휘둘리게 될 것을 염려했다. 그 외풍에 쓰러지지 않으려면 매출 3,000억 원은 넘겨야 한다고 봤다.

 

2001년 10월 <크레이지아케이드 비엔비>가 출시됐다.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마비노기>와 <카트라이더>가 개발 중이었다. 하지만, 개발진의 불만을 계속 쌓여갔다.

 

2002년 1월 한빛소프트가 상장했다. 2002년 10월 NHN이 상장했다. 2003년 5월 웹젠이 상장했다. 넥슨만 안 했다. 김정주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대표였던 정상원은 창업상담을 하는 개발자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2003년 말 정상원은 김정주와 독대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상장하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약속이 없다면 더 이상 대표 자리를 맡지 않겠다고 했다. 넥슨은 2004년 2월 서원일을 후임 사장으로 선임했다.

 

이 시절 테헤란로에는 코스닥 상장붐이 셌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려 문제가 된 회사도 있었다. 넥슨은 샴페인을 터뜨릴 생각이 없어 문제였다.

 

2004년 6월 정상원은 넥슨을 떠났다. 남은 개발자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림=김재훈)

 

  

4. <메이플스토리> 현금인수와 개발진의 이탈

 

이승찬의 <메이플스토리>는 2003년 4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7월 동시접속자 10만을 가볍게 넘었다. 김정주는 조바심이 났다. <리니지>급의 4번 타자로 판단했다. 넥슨에는 슬러거가 필요했다. 인수를 타진했다. 

 

쥐어짜며 게임을 만든 이승찬과 위젯 식구들은 지쳐있었다. 2004년 9월 넥슨은 위젯을 인수했다. 탁월한 베팅이었다.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안다. <메이플스토리>는 넥슨의 대표 게임이 됐다.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등에서도 터졌다.

 

문제는 위젯을 사는 방식이었다. 김정주는 약 400억 원의 현금을 지불했다. 넥슨이 가진 모든 현금이었다. 지분 교환이 아닌 현금 지급 방식을 넥슨 개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확고했다. 결과는 뻔했다. 개발자들이 줄줄이 이탈했다. 

 

공식은 간단했다. 안에서 열심히 만들어봐야 별 보상을 못 받는다. 밖에서 잘 만들면 큰 보상을 얻는다.

 

먼저 퇴사했던 정상원을 네오위즈가 모셔갔다. 넥슨을 나온 개발자들의 상당수는 네오위즈로 갔다. 게임산업 지형도가 바뀌었다. <메이플스토리> 인수로 넥슨의 숫자는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대신 개발 역량은 크리티컬 대미지를 입었다.

 

미래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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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재훈)

 

 

5. 인센티브 제도와 '돈슨'의 주홍글씨

 

2004년 11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비서​ 출신 데이비드 리가 넥슨의 공동대표가 됐다. ​넥슨은 잘 나가고 있었다. 그해 6월 정식서비스를 시작한 <마비노기>에 호평이 줄을 이었다. 같은 달 오픈 베타에 들어간 <카트라이더>는 그해 12월 PC방 점유율 1위에 있던 <스타크래프트>를 밀어냈다. 국민게임이 됐다.

 

하지만, 개발팀의 상황은 달랐다. 상장은 유보됐다. 성과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안 됐다. 데이비드 리가 해야할 일은 확연했다. 취임과 함께 인센티브 제도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서민, 김동건, 장영석과 논의했다. 김정주를 설득했다. 개발팀은 게임 매출의 3%를 인센티브(출시 첫해 6%)로 받게 됐다. 개발자들은 미국 변호사 데이비드 리를 신임했다.

 

2006년 넥슨 매출액은 2,449억 원이었다. 인센티브는 70억 원이 넘었다. 당시 넥슨 인력 규모에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메이플스토리> 같은 대박 게임 개발자에게 엄청난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당사자는 즐거웠다. 회사에는 짙은 그늘이 퍼지기 시작했다.

 

인센티브는 개발이 아니라 운영 능력을 향상시켰다. 일부 개발팀은 신규 인력의 충원을 꺼려했다. 인센티브를 나눠주기 싫어서였다. 퍼블리싱하는 외부 게임이 론칭하는 날, 넥슨의 기존 게임이 아이템 드랍율 2배 이벤트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유저층이 겹쳐서였다. 유저를 빼앗기기 싫었다. 인센티브 때문이었다.

 

운영 능력은 결국 매출과 연결된 능력이었다. <메이플스토리> 등 주요 게임의 매출은 계속 늘어났다. 유저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넥슨은 '돈슨'이라는 주홍글씨를 스스로에게 더 깊게 새겼다.

 

2011년 11월 이후 <메이플스토리>는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모바일 환경 변화 탓이다. 밸런스 붕괴 탓도 크다. 2014년 신임 대표가 된 박지원은 데이비드 리가 키운 인재다. 하지만, 그는 데이비드 리 시절의 성공 뒤에 짙어진 그늘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취임 후 넥슨에서는 매출과 영업이익보다 UV(순방문자)가 더 중요한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넥슨은 노력 중이다. 하지만, 주홍글씨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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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허들 회의의 강화와 신규 개발력의 약화

 

2006년 2월 넥슨은 <제라>의 흥행참패로 충격에 빠졌다. 넥슨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100억 원 이상 들인 게임이었다. 그런 게임이 망했다. 

 

개발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만드는 중에 대표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제라> 같은 실패의 반복을 막아야 했다. 2005년 데이비드 리 취임 이후 시작한 허들 회의가 더욱 강화됐다.

 

허들 회의는 게임 개발을 중간 점검하는 자리였다. 개발 부서와 비개발 부서 리더 6~7명이 참가했다. 창의성과 함께 사업성도 보려는 의도였다. 다른 부서와 정보를 공유해 개발 과정을 합리화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제라>의 트라우마가 컸다. 2006년부터 허들은 높아졌다. 허들 회의에서 탈락하면 개발이 바로 중단됐다. 개발팀은 해체됐다.

 

허들 회의는 성공했다. 실패를 줄였다. 허들 회의는 실패했다. 성공도 줄여버렸다. 개발자들은 시장 대신 허들을 보고 개발했다. 먼저 허들을 넘은 게임을 따라했다. 집단 리뷰 체제는 게임을 둥글둥글하게 만들었다. 특색 있는 게임이 나오기 힘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자들은 굳이 허들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라이브 게임을 잘 운영해서 인센티브를 받는 게 더 안전한 이익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넥슨은 M&A(인수합병)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메이플스토리> 등으로 확보한 글로벌 진출 역량을 활용하는 전략이었다. 네오플과 <던전앤파이터> 인수는 빛나는 성과였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늘이 있었다. 직접 개발해 성공한 게임의 부재였다. 

 

허들 회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아니, 인센티브와 함께 반대로 작동했다. 김정주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개발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2013년 9월 정상원을 다시 넥슨으로 합류시켰다. 정상원은 2014년 4월 신규개발본부에 인큐베이션실을 신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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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리그오브레전드> 인수 실패와 엔씨소프트와 동맹

 

넥슨은 <리그오브레전드>를 만든 라이엇게임즈를 인수하려고 했다. 텐센트와 경쟁이 붙었다. 결국 졌다. 2011년 2월 텐센트가 4억 달러에 <리그오브레전드>의 최대 주주가 됐다. 넥슨의 패인 중 하나는 자금 조달 속도였다. 넥슨은 비상장 기업이었다. 텐센트처럼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모을 수 없었다.

 

넥슨에게 두고두고 아쉬운 실패였다. 텐센트의 라이엇게임즈 지분 인수는 글로벌 게임 시장의 판도를 바꾸었다. 넥슨은 상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속도를 냈다. 2011년 11월 상장을 했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했다. 하지만, 글로벌 게임시장의 상황은 더 악화됐다. <리그오브레전드>는 시장을 지배했다. 블리자드의 <디아블로 3>로 시장을 호령했다.

 

넥슨과 엔씨소프트는 동병상련이었다. 김정주와 김택진은 손을 잡았다. EA를 인수하려는 큰 그림을 그렸다. 실패했다. 이후 협업 노력은 무위로 그쳤다. 넥슨의 제안을 엔씨가 거절하는 패턴이 주로 반복됐다.

 

넥슨은 답답했다. 지분을 추가 인수하고,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지분보유 목적을 변경했다. 미디어에 난리가 났다. 두 회사가 다투는 형국이 됐다. 공식적으로 동맹은 깨졌다. 엔씨는 넷마블과 주식 교환으로 넥슨에게 한 방을 먹였다.

 

넥슨은 결국 지난 10월 엔씨소프트 지분을 팔았다. 현금을 회수했다. 쓸 곳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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