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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막걸리, 전교조 그리고 쌤

임상훈(시몬) 2013-10-23 21:29:17

 

오늘 오후 택배 상자 하나가 아지트에 도착했습니다.

저 멀리, 전남 영광에서 올라온 물건이었습니다. 

제목이 무려 '대마할머니'...ㄷㄷ

 

 


 

까봤습니다. 하얀 막걸리 병이 줄을 맞춰 질서있게 도열해 있습니다. 

먹음직스럽습니다. 꿀꺽.

 

 



바로 꺼냅니다. 

막걸리가 도착할 무렵 아지트에 온 손님 한 분과 갓 올라온 생막걸리를 마셨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킥킥 웃는 빨간 얼굴 소 치즈를 까먹으며 말이죠.


그런데, 막걸리를 한 박스나 누가 보냈을까요? 고등학교 쌤이었습니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 저랑 막걸리를 드셨는데, 별로라며 손수 이 막걸리를 올려보내신 거죠.

 

 



지난주 토요일 오후 2시 독립문 공원에서는 전교조 집회가 있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는 해직 선생님이 노조원으로 있는데, 정부가 그 분들을 탈퇴시키지 않으면 합법단체의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하자, 선생님들이 상경해서 항의를 하는 행사였습니다.

 

쌤도 당연히 오셨고, 당연히 저한테 전화를 거셨습니다. 당연히 저는 쌤을 뵈러 현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또 당연히(?) 중간에 나와 막걸리를 먹으러 갔고요.

모교 선생님 두 분과 다른 학교 선생님 한 분도 합류하셨습니다.

 

다른 많은 노조들이 해고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전교조만 타깃으로 삼아 문제 삼는 것은 문제가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해직자 9명을 위해 6만 명의 노조원이 법외노조라는 가시밭길을 가는 것이 너무 경직됐거나, 감정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전략적 유연성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제 생각이 잘못됐습니다. 잘못은 해직자 9명 때문에 6만 명에 이르는 노조의 합법성을 빼앗으려는 쪽에 있는 거죠. 전례도 없고, 형평성도 어긋났으며, 국제적으로도 무리한 탄압으로 여겨지고 있는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까요. 직위에 안 맞게 너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지탄받는,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마저 문제제기를 할 정도니, 매우 심한 거죠.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집회 현장으로 왔습니다. 서울시청 쪽으로 행진을 할 때가 됐습니다.

 

 



저희는 택시를 타고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 오면 늘 가던 세종문화회관 옆 종로빈대떡으로 직진했죠. 

빈대떡과 막걸리를 펼쳐 놓고, 옛날 이야기와 내년 정년퇴직하는 다른 선생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전국교사협의회부터 시작한 교원노조의 역사를 쭉 지켜와 봤기에 최근 상황이 씁쓸했습니다.

일부 일탈과 경직된 정책도 문제가 있지만, 존재 자체가 폄훼되고 매도되는 게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정부의 탄압과 대중의 무관심을 이겨내고, 선생님들의 상식적인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쌤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집에서 한 잔 더 하기로 했죠.

 

 



택시를 타러 천천히 걸어내려오다, 대한문 근처의 시국미사 현장을 지나게 됐습니다.

발길이 저절로 멈춰서게 되더군요.

 

 



개인적으로 참 오랜만의 미사 참여. 냉담자로 지낸 지 너무 오래 됐습니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기도를 했습니다. 진심으로. 

 

쌤과 택시를 타고 삼성동으로 갔습니다. 

헬렌스키친에서 자희향과 복순도가를 마셨습니다.

 

좋은 막걸리를 대접한다고 했는데, 쌤은 가격 대비 질이 못 마땅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오후 생막걸리 한 박스가 제 아지트로 떡 도착하게 된 것이죠.

 

sim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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